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28화 (28/131)

# 28

악녀 메이커 28화

“그래도 그 능력이 모두에게 통하진 않을 것 같네요. 드물겠지만 욕망이 없는 사람도, 이미 그 욕망을 이룬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 외에도 완벽하게 세뇌하는 게 아니라, 그냥 유혹해서 뒤흔드는 것뿐이니 변수는 짐작할 수 없고요.”

잠시 상황을 모면할 때나 약점을 캐낼 때는 유용하게 써먹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글쎄…….

“아무래도 좀 위험해 보이네요.”

내가 능력의 허점을 지적하자, 킬리안은 제법이라는 듯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야. 내 능력을 써도 자신이 믿고 있는 현실과 조금이라도 모순이 일어나면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게 되고, 의심이 쌓이기 시작하면 언젠가 깨어나기 마련이지.”

역시 그런 거였나.

나는 킬리안이 손가락을 딱, 하고 맞부딪힌 것만으로 제정신을 차렸던 소피아와, 저택에 발을 들이자마자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던 폴랑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하던데. 그러자 내 표정을 또 통찰력으로 읽은 그가 알아서 답해 주었다.

“깨어난다고 해도, 내 능력에 당했다는 자각이 없는 게 보통이다.”

“보통이라는 건, 아닌 사람도 있다는 거군요.”

“드물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육체나 정신을 가졌을 경우, 내 능력에서 깨어났을 때 뭔가를 당했다는 걸 바로 꿰뚫어 볼 때가 있지.”

뭐야, 그럼 베르너는 물론이고 샬럿 어장 속 인간들은 하나같이 못 써먹잖아. 어장에 들어가기 위한 기본 조건이 수려한 외모와 각각 다른 계열의 최고의 능력치였으니까.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수긍했다. 아무래도 그의 능력에는 최대한 의지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샬럿에게는 통할까요?”

“통하기는 하겠지만, 능력을 쓸 가치도 없어 보이길래 중간에 관뒀지.”

“네? 언제 샬럿 만난 적 있어요?”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어제 우연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왜 킬리안이 샬럿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지 자세히 묻고 싶었으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연회장 입구와 그 앞을 지키는 문지기들이 시야 끝에서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문지기들은 뿔피리를 불며 내 입장을 알렸다. 그리고 나와 킬리안이 연회장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시선이 하나같이 내게 몰렸다.

특히 의복과 유행에 민감한 이들은 내가 곁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어져서 눈을 여러 번 비볐다가, 멀어지면 그제야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심지어 내 모습을 가까이 보기 위해 다른 곳을 구경하는 척 곁으로 다가와 관찰하는 이도 있었다.

이유는 뻔했다.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사교계의 동네북’ 아일라가 눈에 띄는 옷까지 입고 왔으니,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거겠지.

슈미즈 드레스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화려한 장식이 없는 자연스러운 실루엣을 들 수 있었다.

특히 허리를 바짝 조이고 가슴을 모으거나 치마를 과도하게 부풀리지 않아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지만 허리에 넓은 천을 대고 뒤에서 리본으로 매듭지어 길게 늘어뜨려, 굳이 조이지 않아도 뱃살을 가릴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다.

“세상에, 망측해라.”

“저 초라한 드레스는 뭐죠?”

“잠옷을 그대로 입고 왔나?”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정신 차렸나 싶었더니, 관심을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건 변하지 않았네요.”

나는 들으라는 듯 떠드는 험담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귀족들이 날 두고 뭐라고 떠들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입고 있는 이 드레스는 폴랑이 영혼을 담아 디자인하고 만든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아름답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짙은 녹색의 드레스는 상대적으로 붉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돋보이게 했으며, 녹음 같은 눈동자 색과 어우러졌다. 자칫하면 칙칙해 보일 수 있는 색상이었지만, 황금 실로 수놓아진 깃털 모양의 자수 덕분에 고급스러운 우아함이 강조되었다.

‘내 눈에 예쁘면 장땡이지.’

나는 땋아서 하나로 틀어 올린 머리카락과 월계관을 떠올리게 하는 황금으로 된 머리 장식, 그리고 귀에서 달랑거리는 흑진주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다른 영애들은 소설대로 전부 샬럿이 유행시킨 로브 아 라 폴로네즈를 입고 있었다. 물론, 아름다웠으나 로코코 시대의 드레스답게 지나치도록 화려하고 장식이 많았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지. 그저 사치스러움만 강조한 저것에 비하면 내 드레스는 초라해 보인다기보다는 고상하고 기품 있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평소에 입던 드레스에 비해 몇 배는 더 활동하기 편하다는 거다. 답답하게 몸을 죄는 게 없으니 행동의 제약이 사라져서 그런가, 왠지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내게 일부러 수군거리는 소리를 흘리며 내가 깽판을 치기만을 바라는 이들을 완벽하게 무시했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왜 내게 시선이 몰려?’

바로 옆에 킬리안이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아무리 아일라가 유명 인사라고 해도, 이렇게 눈 튀어나오게 잘생긴 미남이 곁에 있는데 단 한 명도 시선을 주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를 사방에서 둘러싸며 어디에서 온 누구냐고 묻지는 못할망정.

‘또 뭔 주술을 쓴 건가?’

나는 의문을 담고 킬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내려다보고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의문에 답했다.

“존재감을 지웠으니 저를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는 이상,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느껴질 겁니다.”

아, 역시 그런 거였군.

그렇지 않은 이상에야 저렇게 눈에 띄는 남자를 없는 사람인 양 무시할 리가 없지. 나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걱정이 들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은, 주의 깊게 관찰하면 안다는 뜻인데 괜찮아요? 들키면 고작 처형으로도 끝날 리가 없을 텐데.”

생각해 보니 황궁은 주술사에게 있어서 적진의 한가운데였다. 주술사를 그토록 배척하고 혐오하는 곳인데, 능숙하게 주술을 쓰는 그를 눈치채지 못할 수가 있을까?

“확실히 눈치채는 인간이 단 한 명도 없을 수는 없겠지. 그래 봤자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자 킬리안이 내게 귓속말을 되돌려 주며 한곳을 빤히 응시했다.

“응?”

나는 그가 보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옅은 하늘색 머리카락과 그보다 짙은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를 가진 훤칠한 청년 한 명이 우리 쪽을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하늘색 머리, 짙푸른 눈. 딱 봐도 직급이 굉장히 높아 보이는 화려한 마법사 로브를 입은 서글서글한 미남.

샬럿의 어장에 들기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는 대마법사였다.

‘……윽, 조연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종잇장처럼 구기며 대놓고 싫어했다.

아무리 내가 쓴 소설이라지만, 그동안 내가 만나 왔던 인물들은 전부 엑스트라거나 소설에 등장조차 하지 않은 이들이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저런 것들과 열심히 얽혀야 한다는 게 아주 끔찍했다.

‘이름이 아마도 셉티무스였던가…… 잠깐만. 들킨 거 아니야, 저거?’

유들유들하고 능글맞은 성격이라고 묘사한 셉티무스가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뜨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될 무언가를 본 얼굴이었다.

‘킬리안이 주술사라는 걸 알아보지 않는 한, 지을 수 없는 표정인 것 같은데.’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망한 건가, 시작도 하기 전에 죽을 각인가, 좌절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셉티무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카일룸…….”

응? 카…… 뭐?

“뭐라는 거지?”

당연히 주술사가 침입했다! 저기 저놈을 잡아라! 할 줄 알았던 나는,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셉티무스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우리를, 정확히는 내 옆의 킬리안을 보더니 질끈 눈을 감으며 마저 중얼거렸다.

“로툴로의 왕…….”

나는 세상의 멸망이라도 목도한 것 같은 셉티무스의 노골적인 절망감에 황당해졌다.

“그쪽 보고 왕이라는데요?”

나는 킬리안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재차 물었다. 물론 주술사가 왕의 자리에 오를 리가 없으니, 당연히 셉티무스가 킬리안을 다른 사람과 착각했겠거니 하고 확신하고 묻는 말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나와는 달리, 킬리안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내 의문에 답해주기는커녕 나른한 몸짓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셉티무스와 정확히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렸다.

“흠, 대화가 필요해 보이는데.”

대화? 주술사와 마법사가 무슨 대화? 피와 살점이 튀는 몸의 대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아가씨.”

“자, 잠깐. 괜찮은 거 맞아요? 지금 위험한 상황인 거 아니죠?”

나는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자 킬리안이 붙잡힌 자신의 소매를, 그리고 내 얼굴을 차례로 응시하더니 답했다.

“죽이진 않습니다.”

“…….”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이 위험한 거 아니냐고 물은 건데. 그래도 명색이 대마법사인데 주술사와 차분히 대화를 주고받아 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셉티무스는 돌처럼 굳어서는 얌전했다. 마법 주문을 외거나 날뛰며 동료나 기사를 부르려는 기색이 없는 걸 봐서는 대화를 시도할 여지는 있는 건가.

“……음, 그래. 다녀와.”

어쩐지 내가 끼어들 분위기가 아닌 듯해, 슬쩍 뒤로 빠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 보이니까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 주겠지.

“제가 없다고 울지 마시고요.”

“……안 울어.”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그동안 내 소심하고 미덥지 못한 모습을 질리게 봐 왔으니 저런 말을 해도 이해는 되지만…….

나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가 여기가 밖이라는 걸 떠올렸는지, 불만스럽게 손을 거두고 물러섰다.

“재밌게 놀고 계십시오. 위험하니 연회장 밖을 벗어나시진 마시고요.”

“응.”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건다고 하나하나 응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쓸 만한 사람이 있다 싶으면 친해지기 전에 제게 먼저 알리십시오.”

“알았으니까 빨리 가.”

킬리안은 놀이터에 아이를 잠시 두고 가는 부모님 같은 당부를 몇 마디 더 뱉다가 그 뒤에야 떠났다.

그런데 킬리안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셉티무스가 움찔하며 슬슬 뒷걸음질을 치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저건 마치 도망치는 모양새…….’

대마법사라면 만만한 상대가 아닐 텐데, 대체 왜 도망가는 사슴과 먹이를 쫓아 유유히 포위망을 좁히는 맹수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나는 그들이 사라지고 없는 텅 빈 자리를 응시하며 의아해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