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악녀 메이커 29화
“…….”
혼자 남겨진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직 베르너는 안 왔네. 베르너와 샬럿이 같이 올 테니, 여기서 뻘쭘하게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그런데 끊임없이 험담을 수군대던 귀족들이 내가 쳐다보자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기겁할 거면 애초에 욕은 왜 한담. 똥이 더럽다면 그냥 피하면 될 것을 왜 굳이 들쑤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내가 소설 속 악녀라는 걸 떠올리면 알 만했다.
아일라를 자극해서 더 날뛰게 하고 경멸 받게 하려는, 일종의 소설 속 장치였다. 사실 저들도 자각하지 못한 채 열심히 소설의 억지력에 휘둘리고 있을 뿐일 것이다.
‘작가가 잘못했네.’
나는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나는, 내가 만든 세계의 법칙을 뒤틀기 위해 여기에 왔으니까.
“……!”
돌아다니는 시종에게서 체리 향이 나는 샴페인 한 잔을 얻고 망설임 없이 그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갑자기 성큼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은 흠칫 놀라 이를 사려 물었다. 다짜고짜 술을 뿌리거나 뺨을 칠 거라고 확신하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놓고 경계하는 그들을 농락하듯 스쳐 지나갔다. 너흰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기, 기가 막혀.”
“가문 덕에 사교계에 겨우 붙어 있는 주제에 뭐라도 되는 양…….”
“가문 빼면 볼 것도 없는 게.”
그럼 너희는 그거 빼면 뭐 대단한 게 있긴 하냐? 부모 잘 만난 금수저인 건 피차일반일 텐데 말이야.
그저 무시했을 뿐인데 부들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더욱 그들이 한심하고 우스워 보이기 시작했다. 무도회에 오기 전까진 그렇게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던 비난도, 계속 듣다 보니 논리가 없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대체 뭘 두려워했던 건지. 막상 마주하면 별것도 아닌 것들인데.’
나는 지나가면서 봤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디로 보나 내 또래로 보였다. 화장을 겹겹이 쌓아 올리긴 했지만, 그래도 앳된 얼굴은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
‘코튼가 영애도 있네.’
제국의 유력가 가문의 이름이라면 어느 정도 외운 상태였다.
특히 친부인 메르텐시아 공작이 대표적인 귀족파 인물이니, 같은 귀족에 편에 선 가문이라면 자식들 얼굴과 이름, 하는 일, 취향, 취미까지 암기 과목 외우듯 달달 외웠다.
“코튼 영애.”
나는 그들 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한 달간 킬리안에게 내 수집품들의 안위의 위협을 받으며 열심히 배웠던 예법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저, 절 부, 불렀나요?”
내 부름에 코튼 백작 가문의 막내딸은, 두려움에 말을 더듬는 와중에도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아일라와 동갑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아직 열여덟 살이겠지.’
여기는 만 나이로 따지니까, 한국으로 치면 갓 미성년자에서 성인으로 넘어간 스무 살일 것이다. 내가 미성년자 때 쓴 소설이라, 상대적으로 등장인물 대부분이 나이가 어리고 하는 행동들도 참 철이 없었다.
‘그래도 어리다고 봐주면 끝도 없이 계속 기어오르겠지.’
그들이 약한 자 앞에서는 한없이 강해지고, 강한 자 앞에서 한없이 약해진다면 나는 강해져야만 했다.
“메르텐시아 영애? 왜 절 불러 세우셨는지 모르겠군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주저하지 말고 해 주세요.”
내가 뺨이라도 때리면 그대로 울음을 터트려 피해자인 척하려는 속셈인 건지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난 그녀에게 물리적으로 해를 입힐 생각이 없었다. 원래 갑질을 즐겨 하는 사람은 갑질로 받아쳐야만 말을 들어 먹는 법이니.
“마침 메르텐시아 영애께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잘되었군요.”
나는 정색하지도, 그렇다고 살갑지도 않은 사무적인 미소로 코튼 영애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한동안 몸이 좋지 않아 부득이하게 잠시 쉬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그러자 코튼 영애는 이 인간이 뭘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아, 네, 뭐…….’ 하고 대꾸했다.
“백작님께서도 잘 지내시고요?”
“아, 네. 아버님도 잘 계시죠.”
킬리안에게 배운 레테 제국 역사에 의하면, 초기 백작이라는 위치는 공작에게 종속된 가신이었다고 한다.
현재에 와서 백작들은 영지를 다스리며 예전에 비하면 힘이 강해졌지만, 일부 힘이 약한 백작은 여전히 공작을 섬기는 가신으로 남아 충성을 맹세했다.
코튼 백작은 굳이 어느 쪽인가 따지면 중간 정도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백작이라는 위치는 공작에게 굽실거릴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을의 처지지.
“이번에 아버지께서 동대륙에서 새로 들여온 향신료를 보여 주셨는데, 독특한 향이 모든 음식과 곁들여 먹기에 아주 좋더군요. 코튼가에서 독점권을 얻으셨다면서요?”
“그, 그건 제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잘 몰라서. 하지만 최근 향신료 사업을 확장하셨다는 건 들었어요.”
백치미의 대명사인 아일라의 입에서 사업 얘기가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코튼 영애는 아는 바가 전혀 없는지 허둥거리며 대꾸했다. 하긴, 그래서 그렇게 내게 방만하게 굴 수 있었던 거겠지.
나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는 게 없고 멍청해도, 메르텐시아 공작가의 여식이니 만큼 백작에게 내게 잘 보이라는 소리 한마디는 들었을 텐데.
아, 어차피 아일라는 내다 놓은 자식이라 그런 얘기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건가?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도 가문 내에서 나의 위치는 딱히 달라진 게 없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아니었다.
비록 킬리안의 농간에 넘어가서였을지라도, 공작은 방구석에 틀어박힌 나에게 가정 교사를 붙여서까지 이 무도회로 끌고 왔다.
공작, 빈센트의 내면 깊숙이 꼭꼭 숨겨 두었던 욕망 중에 자신의 딸 아일라가 흔적도 없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겉으로는 내가 안중에도 없어 보였지만, 내심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거겠지.
‘비록 그게 티끌만 한 관심이라도.’
킬리안이 없었다면 영원히 드러날 일도 없었을 정도의 티끌이었지만.
그러니까 결국 있으나 마나 한 정도의 어쩔 수 없는 혈육의 정이라고나 할까……. 아 거참 파고들수록 점점 더 서러워지네. 역시 아일라는 인생을 혼자 살았던 게 맞았다.
됐고, 공작이 날 우주의 먼지로 보든 말든 나는 그를 팔아먹을 거다.
그때, 영문을 몰라 머뭇거리던 코튼 영애가 타이밍 좋게 말했다.
“……저희 가문에서 들여온 향신료가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말씀은 아버지께 따로 전해 드릴게요.”
“어머, 고마워라.”
나는 눈가를 가늘게 접어 웃으며 샴페인 잔을 빙빙 돌렸다. 딱히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고, 그냥 갑질 하는 재벌가 딸내미 흉내 좀 내 봤다.
“역시 코튼가의 안목이면 믿을 수 있죠. 기대할게요. 더 질 좋은 상품 많이 들여와 주실 거라 믿어요.”
그렇게 말한 뒤,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나긋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저희 아버지께서 동대륙의 가능성에 거신 기대가 크거든요. 아무래도 투자 지분이 가장 높으시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요. 유통권도 전부 저희 가문에서 가지고 있으니까요.”
“…….”
워낙 저쪽에서 대놓고 날 모욕하기에 나도 좀 노골적으로 협박해 봤다. 물론, 여전히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미소를 잃지 않은 채였지만.
‘좀 유치하긴 해.’
그대도 덕분에 상대가 입술을 딱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해졌다. 나는 이 싸한 침묵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더욱 짙게 웃었다.
원래 이런 기 싸움에는 평정을 먼저 잃은 쪽이 지는 법이었다. 특히 귀족처럼 고상한 것에 목숨 걸고 신선놀음을 즐기는 인간들은 말이다.
그게 바로 아일라가 가진 것도 많으면서 온갖 추문에 시달렸던 이유였다.
하지만 패악이 사라진 지금은 같은 악녀라도 가진 게 많고 본인도 그 가치를 아는 악녀가 될 것이다.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곤란한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제가 큰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들어 드릴 수는 있으니까요.”
물론, 진짜 도움을 청한다고 해도 듣고 흘릴 거지만. 나는 그렇게 훈훈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주위에서 그런 날 두고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킬리안의 말이 생각났다. 아일라를 둘러싼 악명도 결국 ‘관심’이라는 말이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모두가 내게 아닌 척 주목하면서 어딘가 크게 달라진 날 두고 떠들어 대기 바빴다.
“그, 그건 저희 여자들과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어차피 결혼하면 저희 지배권은 남편에게 넘어가니까요.”
하지만 코튼 영애는 어지간히 내게 지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시각각 얼굴색을 바꾸던 그녀는, 종내에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내게 반박했다.
지배권.
사실 가부장제가 만연한 이 시대의 여자 인권이란 그런 거다. 귀족 여성이 정식으로 결혼해서 누군가의 아내가 되면, 아버지에게 있던 보호권과 지배권은 남편에게 넘어간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자유와 권리를 법적으로 박탈당한다는 소리였다.
이 시절부터 꾸준히 전해져 내려온 사상이 있는데, 바로 ‘아내는 순종이 미덕’이라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온 평범한 현대인인 윤하늘도 지겹게 그 소리를 들었다.
참하게 생겼구나. 말대답도 안 하고 고분고분하니 좋은 신붓감이다. 연애할 땐 소멸 직전이었던 자신의 인기가, 결혼 시장에서는 꽤 먹혔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만 나왔다.
“제 약혼자는 머지않아 일리아 백작가를 물려받을 후계자거든요…… 어머, 제가 그만 실례되는 소리를.”
코튼 영애는 과장되게 입을 틀어막으며 사과했다. 아일라가 황태자에게 끊임없이 들이대다가 차였다는 소문을 의식하고 가증스럽게 구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아일라가 끈질기게 군 건 사실이지. 베르너는 샬럿 외의 여자에겐 개미 뒷다리만큼의 관심도 없었고, 아마 여기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 대부분이 그리 알고 있을 것이다.
코튼 영애는 다시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본인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패악을 부리며 그녀의 얼굴에 샴페인을 뿌리는 대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이런 자리에서 부끄럽게도 제 결혼관까지 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 궁금하시다면…….”
결혼.
솔직히 거기까지 생각도 못했다. 지금은 살아남기 급급하니까 도저히 신경 쓸 틈도 없고 말이다.
귀족 영애인 이상 정략혼은 어쩔 수 없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저렇게 재수 없게 구는데 순순히 져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무엇인가.
‘자신감.’
나는 고양이처럼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매를 예쁘게 휘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여기서 무슨 소리를 하든지 간에 저들은 내게 욕을 할 거고 주목할 거다. 그렇다면 개똥철학이라도 당당하게 외치겠다.
“저는 결혼하지 않을 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