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30화 (30/131)

# 30

악녀 메이커 30화

“어머, 저런.”

코튼 영애는 ‘네 성질머리 감당할 상대가 없는 거겠지!’ 하고 비웃고 싶은 얼굴로 안쓰러움을 가득 담아 말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마지막 발악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나는 그녀를 향해 관대하게 웃다가 ‘정식’ 결혼은요, 하고 덧붙여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설마, 정부가 되겠다는 뜻인 건가요?”

그러자 승기를 잡은 얼굴을 하고 있던 코튼 영애가 당혹스럽게 되물었다. 우리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회장도 순식간에 소란에 휩싸였다.

제국에는 ‘코믠 결혼’과 ‘트리뷔 결혼’이라는 두 종류의 결혼이 있었다.

코믠 결혼은 남편이 부인의 지배권을 갖는 정식 결혼이었고, 트리뷔 결혼은 쉽게 말해서 누군가의 정부가 되는 것이었다.

대신 누군가의 정부가 되면 남편에게 지배권을 넘겨주지 않기 때문에, 정식으로 결혼한 것과 달리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트리뷔는 가문끼리 엮인 것도 아니고 그저 사랑으로 만나는 결혼이며 헤어지고 싶을 땐 굳이 이혼할 필요도 없이 떠나면 그만이었다.

비교적 ‘연애’와 비슷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해도 결국 정부는 정부였기에,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정부는 자식을 낳아도 상속권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니 개국 공신이자 대귀족 메르텐시아 가문의 영애가 정부가 되겠다고 말을 하는 건 크게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문만으로 봤을 때는 황후가 되고도 남았으니까.

물론, 난 그런 의미로 한 소리가 아니었다. 차라리 혼자 살면 살았지 미쳤다고 누군가의 정부가 될 리가 있나.

“여, 영애께서는 그 정도까지 황태자 전하를 사랑하셨던 건가요?”

코튼 영애는 ‘나는 지금 진정한 참사랑을 보았네’ 하는 표정을 짓더니 살짝 감명을 받은 기색이었다.

쟤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왜 내가 당연히 황태자의 정부로 들어가길 희망한다고 생각하는 건데.

“오해가 있으시군요.”

나는 사위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부가 되겠다는 말이 아니라, 정부를 두겠다는 말이었어요.”

드물게 있었다.

이 숨 막히는 가부장제에서도 신분 높고 능력 있는 여자가 남자를 정부로 두는 경우가.

책에서 우연히 읽었다. 비록 그 책 저자의 어조는 ‘어딜 감히 여자가’ 하는 식의 빈정거림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책에 적혀 있던 몇몇 여인들의 일화는 어찌나 멋있던지, 순식간에 내 심장을 박살 내 버리고 롤 모델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었는데, 이걸 말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러니까 날 왜 도발해서.

나는 내 폭탄 발언에 완전히 얼음처럼 굳어진 청중들을 돌아보며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지금도 꾸준히 청혼은 들어오고 있지만, 그분들께 죄송하게도 전 구속되는 건 좋아하지 않아서요. 전 언제나 자유롭게 살고 싶거든요.”

코튼 영애는 획기적인 개소리라도 듣는 표정으로 끝까지 경청해 주더니,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하, 재밌는 농담을 하시네요.”

아니지. 한 번 입 밖에 뱉은 이상, 이제 농담일 수가 없게 됐거든?

차라리 잘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자 정부를 두겠다는 선언으로 내가 황태자에게 차여서 폐인이 되었다는 논란을 덮어 버려야지.

나는 그녀가 그냥 농담처럼 웃어넘기려고 하기에 쐐기를 박았다.

“여기까지 말했으니 이 자리를 빌려 더 말씀드리자면, 저는 정략혼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연애는 자유롭게 할 의향이 있으니 용기가 있으시면 정식으로 교제를 신청하시길.”

“…….”

“물론, 선택은 제가 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을 이으며 더 할 말이 있느냐는 듯 빙긋 웃었다.

코튼 영애는 내 말에 기가 질렸는지, ‘그, 그럼 이만.’ 하고 더듬거리더니 꽁지 빠지게 도망을 갔다. 그녀가 같이 몰려다니는 무리와 함께.

‘별것도 아닌 게.’

왠지 내가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어서 피한 것 같지만.

어찌 됐든 간에 계속 뒤에서 깔짝거리는 걸 퇴치했으니 엄청나게 뿌듯했다.

‘이제 괜한 시비를 걸진 않겠지!’

……라고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남자를 정부로 두겠다니 이젠 하다 하다 별소리를 다 듣게 되는군!”

“세상 말세야, 말세.”

“한동안 보이지 않아 평화로웠는데 또 저렇게 물을 흐리니, 언제까지 가만두고 봐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이제는 영애들에게 드레스로 욕을 먹는 대신, 방금 발언으로 나이 지긋하신 분들께 욕을 먹기 시작했다. 이젠 웃음마저 나왔다.

‘허허, 저 꽉 막힌 꼰대들.’

됐다, 됐어. 어차피 저들은 내가 뭔 짓을 해도 욕할 거다.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귀족의 귀감이 된다고 해도 욕할 인간들이니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나는 역시 킬리안이 한 말 중에 틀린 말 하나 없다고 감탄하며 그들을 완벽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발랑 까져도 정도가 있지, 여자가 저렇게 나서면서 창피한 줄도 모르다니. 이래서 가정 교육이…….”

“내 가정 교육에 불만이 있나?”

“허억!”

그때였다.

날 깎아내리려고 혈안이 된 이들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뚱하니 서서 샴페인을 홀짝거리던 나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그쪽을 돌아보고 말았다.

‘헐…….’

메르텐시아 공작, 빈센트 메르텐시아.

허둥대는 귀족들 사이에 섞여 든 그는, 여전히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꼿꼿한 모습이었다.

빈센트는 특유의 표정이 없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말했다.

“흠, 그렇군. 자네가 보기엔 내 가정 교육이 부진해 보인 모양이지?”

“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기척 좀 내고 다니게! 그리고 자네도 그런 뜻이 아닌 거 알고 있지 않나.”

“아니면?”

그는 서릿발 같은 말투로 반문했다. 왠지 죄송하다고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엄청난 카리스마에 저절로 무릎이 갈릴 것만 같다.

여기 있는 나만 해도 그런데, 저 싸늘한 표정과 목소리를 지척에 두고 있는 그들은 어떻겠는가.

가정 교육 운운했던 꼰대, 아니, 나이 지긋하신 귀족분은 이 분위기를 탈피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내 말뜻은 자네가 워낙 자유분방한 숙녀로 키웠다는 그런 말이지. 말괄량이 기질이 없잖아 있지 않나.”

“그래서?”

“그, 그래서 이제 나이도 찼으니 순종하는 법도 배워야 할 때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일세. 모친 없이 사내들 사이에서 부대껴 컸으니 이해는 하지만 말이야. 시집은 보내야 하지 않겠나. 정부를 들이겠다는 기상천외한 말이나 하고…….”

“괜한 오지랖이군.”

“아이고, 살벌해라! 걱정하는 마음에 한 말인데 아주 잡아먹겠군, 잡아먹겠어. 언제는 신경이나 썼다고 갑자기 나타나서 말이야.”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도 서로 허물없는 말투를 사용하는 것 보니, 제법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쪽이 저자세인 것으로 봐선 친한 사이라도 상하 관계는 확실해 보였다.

계속 구시렁대던 꼰대는 공작이 어디 더 짖어 보라는 듯 빤히 쳐다보자, 식은땀을 흘리며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역시 철혈 대신이란 이명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어…….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건 이해 갔다. 공작은 아일라가 눈앞에서 한복을 입고 봉산 탈춤을 춰도 관심도 안 주고 지나칠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벌여 놓은 논란에 그가 직접 관여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아무래도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공작은 더 할 말이 있느냐는 듯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너도나도 시선을 피하며 조용해지고 나서야 꼰대를 향해 싸늘하게 일갈했다.

“걱정이라. 자네 차남이 결혼도 전에 창녀를 임신시켜 정부로 들였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남 걱정할 여유도 있는 모양이야. 대단하군.”

“아, 아직 어려서 철이 덜 들어서 그래. 사내놈이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아카데미에서 수석도 하고 회장도 하고 아주 똘똘한 놈이야.”

꼰대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중 잣대를 보이며 반박했으나 소용은 없었다. 공작이 특유의 상대를 철저하게 깔아 보는 표정으로 그를 완전히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빙산의 일각이라는 걸 내 입으로 말하길 바라는 건 아닐 테고.”

“……자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나.”

“비록 차남이라고 한들 법정에 끌려가면 가문에 큰 오점으로 남을 텐데, 자네가 필사적으로 덮으려고 했던 사건을 정 말하길 바란다면…….”

“그, 그만! 그만!”

대체 그 차남이라는 놈은 무슨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거지.

왠지 얘기를 듣다 보니 흥미진진해서 팝콘이라도 씹어야 할 것 같았지만, 중간에 꼰대가 사색이 되어 공작을 만류하는 바람에 듣지는 못했다.

“내가 잘못했네, 그래. 내가 못할 말을 했어. 자네 막내딸은 정략결혼 시키지 말고, 원하는 대로 남자 정부 여럿 끼고 천년만년 살라고 해.”

아니 여럿 낀다는 말은 안 했는데.

어쨌든, 꼰대는 그렇게 쏘아붙이더니 본전도 찾지 못하고 터덜터덜 멀어져 갔다.

자식 농사 망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일라는 적어도 범죄에는 손을 안 댔다고. 아직은.

뭐, 사용인들을 종으로 부리며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자라 온 귀족이 얼마나 착하겠느냐마는. 다 고만고만하게 도덕심을 상실했겠지.

‘근데 왜 나만 마녀냐.’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저 꼰대 범죄자 아들놈도 마남 해라.

속 시원하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한 기분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까, 깜짝이야.’

당연히 와서 뭐라고 한소리 할 줄 알았다. 그는 아내를 죽게 한 원흉인 아일라를 싫어한다는 설정이었으니까. 대외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편을 들어줬지만, 따로 불러내어 따귀라도 맞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그는 나를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가만히 응시하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게 뭘까.

워낙 표정도 없고 감정 표현도 일절 없는 터라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정부라…….”

혼란스럽고 복잡한 상황을 속으로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없으면 허전한 킬리안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정부가 되는 조건은 뭡니까?”

뜬금없이 돌연 나타나서 하는 말이 저거였다.

나는 그가 기척 없이 쓱 나타났다가 쓱 사라지는 것 또한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고 답할 수 있었다.

“놀리지 마.”

“전 진지합니다만.”

음, 그렇게 물어도 충동적으로 꺼낸 말이라 아직 조건 같은 건 없는데. 이상형이라면 말이 잘 통하고, 날 지지해 주고 응원해 주며 검은 머리에 퇴폐적인 분위기를 가진…….

왠지 한 사람만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 같아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