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악녀 메이커 31화
“그보다, 셉티무스는 어떻게 됐어?”
나는 말을 돌리며 킬리안을 꼼꼼히 살폈다.
대마법사와 단둘이 사라진 것치고는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적어도 피의 혈투를 벌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니 안도했다.
“잘 타일러서 보냈습니다.”
……신용이 안 가.
킬리안은 무해하게 웃어 보였지만, 어쩐지 그의 타이른다는 기준이 남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벗어 두었던 새하얀 장갑을 도로 낀 순간 확신을 느꼈다.
대체 뭔 짓을 했기에 장갑까지 벗은 거냐 물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회장 입구 쪽에서 요란한 뿔피리 소리가 울리더니 문지기가 성악가 발성으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제국의 찬란한 영광되시는 베르너 칼 모하메드 레테 전하와 샬럿 안젤로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드디어 주인공의 등장인가.
나는 두려움을 담아 회장 입구를 들어오는 두 남녀를 응시했다.
오,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무시무시한 흑역사의 향기…….
금발의 화려한 미남은 먼발치에서도 ‘나 남자 주인공이요’ 하고 말하는 듯한 빛나는 외모로 무도회를 평정하러 왔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내가 소설에서 그의 외모, 동작 하나하나를 어떤 식으로 묘사했는지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문인가…….’
내가 백번 양보해서 사오 년 정도 전 소설이었으면 ‘오, 추억이다. 내 글이 살아 움직이다니 신기하네’ 했을 텐데, 10년 전은 ‘아, 제발. 그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줘’ 하는 한탄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단 말이다.
나는 딱 두 번째로 보는 그 얼굴을 보고 반사적으로 표정을 구겼다. 이건 진짜 불가항력이었다.
그렇게 내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문득 베르너와 허공에서 시선이 딱 마주쳤다. 내가 10년 전 심혈을 기울여 창조했던 생명체가 날 쳐다보고 있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아, 싫어한다.’
베르너는 나를 보자마자 못 볼 걸 봤다는 듯 아주 끔찍해 했다.
그가 진절머리를 치며 날 외면하는 것을 보니, 서로 상종하기 싫은 건 쌍방인 듯하여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나는 샬럿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전에 봤을 때보다 한층 더 사랑스러워진 얼굴로 말갛게 웃고 있었다.
웃을 때마다 도드라지는 산호색 볼살이 말랑말랑한 복숭아 같았다. 여전히 세상의 찌든 때 하나 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그녀는 소설에서 묘사한 대로 폴랑의 손길을 거친 장밋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봉긋하게 솟은 치마의 퍼프까지 더하니 정말 겹겹이 쌓인 장미 봉우리를 입은 것 같았다.
주름 잡혀 올라간 스커트 아래로 연한 파스텔 패티 코트가 드러나고, 걸을 때마다 얇은 발목이 언뜻 비치며 유리 구두가 반짝거리고 빛나는.
‘유리 구두라니…… 신데렐라냐.’
아, 이렇게 직접 보니까 새록새록 떠오른다. 생각해 보니 저거 신데렐라 드레스를 모티브로 만들었었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한참 전에 객관성을 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드레스고 인물이고 내가 만들었다고. 그것도 무려 10년 전에.
예쁘다, 예쁘지 않다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아름다울지언정 까마득히 어린 날 내 로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창피하지 않을 수가.
저쪽도 생각 외의 복병이었다.
‘으으…….’
당장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내일은 시야를 가릴 부채라도 들고 와야겠다. 나는 일단 급한 대로 킬리안의 등 뒤로 교묘하게 숨었다.
그러자 내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샬럿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나와 킬리안을 번갈아 응시하더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킬리안이 샬럿과 어제 우연히 만났다고 했던가.’
킬리안은 그야말로 유일한 변수였다.
소설에 등장하지 않았거나, 혹은 내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스쳐 지나간 엑스트라. 하지만, 내가 아일라의 몸 속에 빙의한 후로 소설의 중심에 서서 크게 개입하게 된 인물.
그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아무리 킬리안이 자기중심적인 편이라고 해도 여자 주인공에게 필연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을 텐데.’
그를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이 세계가 그렇게 이루어진 걸. 아무리 능력 좋고 뛰어난 주술사라도 해도 세계의 법칙을 거스를 순 없잖아.
“아시다시피 전 누가 제 운명을 멋대로 좌지우지하는 걸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내 불안함을 감지한 그가 특유의 귀족적인 발음이 묻어나는 우아한 말투로 나를 달랬다. 그놈의 통찰력.
“하지만, 나약하고 어설프며 꼴사납더라도 결국 운명을 스스로 쟁취하는 사람은 싫어하지 않거든요.”
킬리안은 내 손에서 바닥을 보이는 샴페인 잔을 자연스레 가져가 새 잔으로 바꿔 주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가 절 멋대로 휘두르려고 하신다면, 기꺼이 이용당해 드리죠.”
그의 말마따나 나는 나약했고, 때때로 흔들렸으며, 몇 번이고 확신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킬리안은 질리지도 않고 내게 비슷비슷한 말들을 다정하게 속삭여 주었다.
그의 말대로 더는 세계의 법칙을 핑계 삼아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녀로서,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어야만 하니까.
‘킬리안이 날 떠날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게 아니라, 그가 내 곁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이 세계의 주인공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보니 대비가 더욱 극명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샹들리에 밑에서 모두의 찬사와 찬양을 받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금발의 두 연인.
그리고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모두의 비난과 멸시를 받으며 그들을 지켜보는 악녀와 그녀의 수하.
음침하게 어둠 속에 잠겨 음모와 계략을 꾸며야 할 것 같은 이 위치가 마냥 싫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고 재밌는 쪽에 더 가까웠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정해진 이치가 손바닥 뒤집듯 뒤바뀔 수도 있다. 이미 이 이야기는 나로 인해 달라지고 있었으니까.
판은 깔아 두었다.
나는 이 세계에 단단히 뿌리박힌 순리를 뒤흔들 만한 카드를 쥐고서 샴페인을 홀짝였다.
* * *
샬럿은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술렁이는 분위기에 약간이었지만 기분이 얼떨떨했다.
황태자와 함께 등장하자마자 모두가 자신에게 주목하는 건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나 어딘지 어수선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미세한 차이였다.
하지만 늘 숨 쉬듯 자연스레 모두의 관심과 애정을 받아 온 샬럿은, 그 미세한 기류를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오늘따라 공기부터가 미묘하게 달랐다.
‘무슨 일 있나?’
입장한 타이밍이 조금 안 좋았던 걸지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지만, 살다 보면 한 번쯤 그럴 수도 있지. 샬럿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환하게 웃었다.
어차피 곧 대중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릴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어머.”
“어쩜, 사랑스러워라…….”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샬럿의 예상은 적중했다.
가만히 혼자 있어도 모두의 관심을 받는 샬럿인데, 폴랑의 드레스를 입고 황태자인 베르너 옆에 있으니 더더욱 관심이 몰렸다.
하나둘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모이기 시작한 이들의 시선에, 샬럿은 살짝 볼을 붉히며 웃어 보였다.
소란스러웠던 회장은 순식간에 침묵에 잠기고, 귀족들은 그녀를 보고 너도나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넋을 놓고 있던 그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감탄을 뱉었다. 샬럿에게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는 것만큼 익숙한 시선들과 당연한 관심이었다.
샬럿은 사람들이 보내온 찬사에 화답하기 위해 눈가를 둥글게 접고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때, 시야 끝에 불꽃처럼 일렁이는 선명한 붉은빛을 보았다.
‘와…… 예쁘다.’
샬럿은 속으로 순수하게 감탄했다.
살면서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보았다. 활활 타오른다는 말이 어울리는 강렬한 인상의 영애였다.
붉은 머리 녹색 눈. 흔하다고 하면 흔한 조합이었으나, 전혀 흔하지 않은 외모 덕분에 단박에 알아보았다.
‘아일라 메르텐시아.’
과연, 제국 최고의 미녀라는 소문 그대로였다.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은 크고 각도에 따라 다른 빛을 띠는 눈동자는 선명했으며, 코는 오뚝하고 입술은 크고 도톰했다.
저렇게 이목구비 하나하나 선명하고 뚜렷한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조화롭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신의 축복을 받은 미모.
샬럿이 자세히 보아야 예쁜 들꽃 같은 외모라면, 아일라는 스치듯 보아도 멋대로 시선을 휘어잡고 놓아주지 않는 독초 같은 외모였다.
물론, 얼굴만 보았을 때는.
‘향기 없는 꽃…… 이었던가.’
샬럿은 아일라가 사교계에서 암암리에 불리는 이명을 떠올렸다. 아름답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모뿐이라는 걸 빈정대기 위해 붙여진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샬럿은 사교계에서 다른 귀족 영애들이 아일라의 험담을 하던 것을 떠올렸다.
사리분간 못하고 날뛰는 망아지가 따로 없다더니, 반듯하고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은 오히려 우아하고 도도한 쪽에 더 가까웠다.
생각 없이 가벼워 보이지도, 천박해 보이지도 않았다. 동작 하나하나에 절제된 기품이 어려 있어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풍겼다.
듣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향기가 없다고? 그럴 리가.’
양귀비를 닮은 위험한 향이 여기까지 지독할 정도로 풍기는걸. 샬럿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일라의 옷차림 하나만 봐도 그녀만의 아집이 느껴졌다.
너도나도 따라 하는 유행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런 독특한 드레스를 입고 왔다는 건,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는 뜻이겠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굉장히 특이한 드레스지만 그녀에게 잘 어울려. 장식을 최소화하니까 왠지 더 고급스러워 보이고……. 코르셋을 입지 않았네? 키가 크고 몸매도 좋으니까 그래도 예쁘게 소화하는구나.’
샬럿과 정반대였지만, 아일라는 그녀 특유의 매력을 품고 있었다.
특히 귀족들은 평생 누릴 것은 다 누리며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만사 권태를 느끼고 더 큰 자극을 찾아다니다 쉽게 나쁜 길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아일라는 그런 철없는 몇몇 귀족들의 심리를 자극하는 부류였다.
실제로 아닌 척하면서 아일라를 향해 선망의 눈빛을 보내는 이들이 드물게나마 있었다. 모두가 그녀를 험담하고 욕하는 하는 바람에 군중 심리 탓인지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샬럿은 그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며 동시에 직감했다.
자신이 연회장에 입장하기 전까지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 바로 아일라였다는 것을.
‘……누구를 파트너로 데려왔지?’
왠지 초조한 기분이 든 샬럿은, 베르너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으며 아일라의 주위를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