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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32화 (32/131)

# 32

악녀 메이커 32화

그리고 주술로 존재감을 지우고 있던 킬리안을 인식했다.

그와는 안면이 있었고, 또 내심 계속 다시 한번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알아챌 수 있는 일이었다.

‘잠깐…… 아까도 저 남자가 있었던가? 분명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았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샬럿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와의 만남에 빠르게 뛰는 심장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의 연미복 문장에 있던 푸른 꽃의 이름을 떠올렸다.

메르텐시아 바르기니카.

그는 메르텐시아 가문의 집사였던 것이다.

그 주인에 그 집사라고 해야 할까.

대체 어떤 가문에서 저런 개성 강한 집사를 감당할 수 있나 싶었는데, 아일라라면 순식간에 이해가 갔다.

샬럿은 놀란 표정을 지우고 살짝 미소 지었다.

마침 잘됐다. 저 건방진 남자가 자신을 화초라며 낮잡아 봤던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야지.

그리 생각은 했지만 사실 그렇게 거창한 값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그가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다시 봐 주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자신은 그렇게 무시당할 사람이 아니니까. 당신도 곧 달라질걸.

샬럿은 보란 듯이 베르너 쪽으로 더욱 바짝 몸을 붙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자, 어서 나를 봐. 내 옆에 누가 있는지 똑똑히 보라고. 내가 뭘 입고 있고, 사람들이 누구를 향해 환호하고 열광하는지 제대로 잘 봐.’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킬리안이 샬럿 쪽을 응시했다. 자신을 향하는 그의 회색 눈동자에, 일순이지만 볼이 더욱 붉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킬리안은 샬럿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본 것일 뿐인, 영혼 없는 눈빛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 샬럿이 아니라 원숭이가 있었다고 해도 똑같이 쳐다봤으리라.

그 시선조차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샬럿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아일라를 향해 다정한 미소로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일라를 배려하는 듯 느릿하게 움직이는 입 모양만 보더라도 상냥한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그렇게 무례하더니.’

고용주라 그런 건지 깍듯하다. 아일라가 시키지 않아도 그녀의 술잔을 새것으로 바꿔 주는 세심함도 있었다. 시중을 드는 것에 능숙해 보였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해.

샬럿은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스럽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어린아이가 어른에게 처음으로 거부당했을 때 보일 법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샬럿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었으나, 귀족들은 여전히 샬럿의 드레스에 대해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루치아나 의상실에서 맞춘 드레스도 저기에 견주지는 못하겠군요.”

“이 자리의 모두가 내로라하는 의상실에서 의복을 맞췄겠지만, 저 아름다운 드레스를 이길 수는 없을 거예요.”

“대체 저 벨벳보다 더 부드러워 보이는 깃털 같은 원단은 뭐죠? 처음 보는데 해외에서 공수해 온 걸까요?”

“그보다, 대체 어디 의상실에서 맞추신 걸까요? 어떤 디자이너에게?”

물론 일부는 시기와 질투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샬럿의 드레스가 이 무도회에서 가장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답다는 걸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그때, 그 드레스를 유심히 살펴보던 한 영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저 감각적인 디자인과 특유의 곡선을 살린 세련미. 제 눈을 속일 수는 없죠. 장담하건대, 저 드레스는 폴랑의 손길을 거친 게 틀림없어요.”

그 말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디자이너 폴랑은, 레테 제국의 충성을 바친 이래로 계속 황가를 위한 옷만을 제작해 왔으니까.

그의 의상은 황족만 입을 수 있기에 바라만 봐야 할 뿐,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기에 더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모두가 폴랑에게 열광하며 그 가치가 끝도 없이 오르는 것은, 자신은 그가 디자인한 옷을 절대 입지 못할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드레스를 보잘것없는 가난한 자작가의 영애가 입었다고? 아무리 최근에 황태자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해도, 분수에 넘치는 호사였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샬럿에게 유일한 흠이 있다면, 그건 바로 신분과 가난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외모도 행동도 사랑스럽고 시선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해도 거기서 그칠 뿐이었다. 황태자의 변덕, 혹은 하룻밤 불장난, 연애 놀이 정도라는 것이다.

귀족들은 불쾌한 기색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내심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 폴랑도 별것 아니구먼. 제 가치도 모르고 자존심을 팔았어.’

‘설마, 자작 가문의 딸을 황태자비로 들일 것도 아닐 테고. 아무리 사랑받아 봤자 기껏해야 정부일 텐데.’

그때였다.

“내 파트너에게 관심들이 많군.”

베르너의 한마디가 떨어지자, 좌중이 침묵했다.

그는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샬럿의 어깨를 보호하듯이 끌어안았다. 그녀의 체구가 가녀리고 작아, 꼭 품에 안긴 모양새였다.

“그대들의 예상이 맞다. 이 드레스는 폴랑의 디자인이야.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

“하, 하지만 폴랑은 오로지 황족을 위한 의복만을 디자인하기로 명망이 높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제 욕심에 국보의 가치를 떨어트렸다는 뜻이었다. 대놓고 나라 망신이라며 투덜거리는 귀족들을 향해 베르너는 코웃음을 쳤다.

“안젤로 영애는 그것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어. 애초에 디자인에 크게 이바지한 게 그녀였으니까.”

베르너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던 샬럿이 그제야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전하, 여기서 그런 말씀은……!”

“사실을 얘기했을 뿐인데 뭐가 어떻다는 거지? 설마, 이 자리까지 와서 이번 유행을 주도한 것이 그대라는 것을 숨길 생각이었나?”

“유행을 주도했다니요. 저는 그저 치마에 개더 주름을 잡고 부풀리는 것 정도의 아이디어를 냈을 뿐인 걸요. 나머지는 다 실력 좋은 디자이너분들이 알아서 해 주셨고…….”

“훗, 겸손하기도 하지.”

베르너는 소리 내어 훗, 하고 웃으며 이 사실을 증명해 줄 이를 향해 손짓했다.

그동안 실종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지만, 오늘이 아침이 되어서 돌연 모습을 드러낸 폴랑이었다.

그런데 타이밍 좋게 나타나서 모든 공을 샬럿에게 돌려주어야 할 폴랑은, 어딘지 넋을 빼놓고 있었다.

“폴랑.”

베르너가 불렀으나 반응이 없다. 폴랑의 시선은 아일라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아일라가 입은 드레스를, 아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폴랑은 최근 들어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지나치게 부를 과시하는 듯한 의복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귀족들은 남자든 여자든, 위화감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굉장히 사치스럽고 인위적인 미를 선호했다. 도무지 절제를 모르는 그들의 특성을 그대로 녹여낸 것 같았다.

그들이 디자이너에게 바라는 요구는 한결같았다.

더, 더 화려하게.

사람이 옷을 입은 건지 옷이 사람을 입은 건지 모를 정도로 주렁주렁 장식을 매달고도 그 누구보다 더 눈에 띄기를 바랐다.

그로 인해 하루하루 지쳐 가던 폴랑의 앞에 기적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아일라였다.

그녀는 폴랑이 오랜 세월에 걸쳐 황족, 귀족들에게 세뇌당했던 고정 관념의 허를 찌르며 말했다.

―맘대로 반발하라고 해요. 그런데 당신의 눈으로 봤을 땐 어떤데요? 그 어떤 최신 유행이라도 이 옷만큼 제게 어울리지 않을 거잖아요.

처음은 강압에 의한 시작이었으나, 그는 이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그녀가 내민 드레스에 완벽하게 매혹당했다는 것을.

‘그 디자인을 봤다면, 누군들 거부할 수 있겠어.’

여성 드레스의 유행은 시기에 따라 나라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기본적인 형태는 결국 어딜 가나 공통되었다. 허리를 최대한 조이고, 가슴은 강조하며, 치마는 부풀리는.

하지만.

‘저것 봐. 그저 인체가 가지고 있는 선만 잘 살려도 저렇게 아름답잖아. 마치 고대의 여신처럼.’

폴랑은 아일라의 저 드레스라면, 사교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니까, 저기서 더 단순하게 고전적인 자유로움을 더하면…….

“폴랑!”

“……!”

폴랑은 베르너가 기어이 큰소리를 내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며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 제가 그만 실례를.”

“주의하도록 해. 귀가 먹기라도 한 줄 알았군.”

“……정말 송구합니다, 전하.”

간만에 의욕에 활활 불타던 폴랑의 눈빛이 까맣게 죽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는 가면을 쓴 듯 다시 표정을 굳히며 뒤늦게 좌중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하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안젤로 영애께서 많이 관여하고 조언해 주셨죠.”

물론, 샬럿이 유행을 주도한 것은 맞았으나 여느 유행이 그랬듯 기존 드레스의 응용일 뿐이었다.

처음 샬럿이 내민 그림을 보았을 때, 폴랑도 나름 참신하다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아일라가 디자인한 드레스의 초안을 보았을 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던 충격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도 대세에 따라 최대한 화려하게 만든 드레스이거늘, 그가 없는 사이 샬럿이 소피아의 입방정에 넘어가 드레스에 더 주렁주렁 장식을 매달았다.

자기 멋대로 말이다.

‘너무 과해. 재를 뿌린 격이군.’

폴랑은 내심 불편한 심기를 꾹 눌러 삼키며 다시 아일라를 흘끔거렸다.

자신이 황실에 완전히 묶인 몸만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달려가 새로운 사업을 제안했을 것이다. 자신의 열정을 멋대로 자극하고 애태웠으니 책임져 달라고 볼썽사납게 매달리고 싶기도 했다.

그만큼 아일라는 자존심을 팔고 그것이 명예라 자위하며 살아오던 폴랑에게 열정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그럼 지금 우리 모두가 입고 있는 이 새로운 유행의 시초가 안젤로 영애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탁월한 감각이 있으신 줄 제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군요!”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만 안젤로 영애의 재능을 생각하면 확실히 폴랑의 드레스를 입을 자격이 있군요.”

귀족들이 이미 예상된 반응을 보이며 더욱 샬럿 주위를 둘러싸고 모여들었다. 쏟아지는 칭찬에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한 가지, 예상과 다른 것만 제외하면.

샬럿은 모여든 이들을 향해 수줍은 웃음을 지어 보이다가 남모르게 폴랑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는 무슨 연유인지 아까부터 안달이 난 표정으로 아일라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것에 가슴 한구석이 불편했다.

‘대체 왜 메르텐시아 영애를 보고 있어? 설마, 무슨 관계가 있나?’

아까부터 거슬릴 정도로 무언가가 미묘하게 엇나가는 느낌이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은 유행을 선도했다는 명성을 얻었고, 그에 따라 순리처럼 모두의 칭찬과 관심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불편하고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그 원인은 계속 아일라에게 있었다.

그때, 샬럿의 옆에서 칭찬을 쏟아 내던 영애 중 한 명이 아일라에게 뾰족한 시선을 보내며 속삭였다.

“반면에, 근본도 알 수 없는 괴상한 드레스를 입고 온 분도 계시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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