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악녀 메이커 33화
“아주 대단한 분이시죠.”
“유행에 맞춰 한껏 치장해도 비교가 될 텐데, 대체 사교계를 뭐로 알고 계시기에 어쩜 이리 방만하신지.”
“저건 그냥 천 쪼가리 아닌가?”
“코르셋도 하지 않으신 거 같은데, 맨몸과 뭐가 다르죠? 평민도 아니고 내가 다 부끄러워서 참…….”
샬럿에 대한 찬양은 자연스레 아일라에 대한 비판으로 넘어갔다.
그제야 샬럿은 어딘가 얹힌 듯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게 당연한 거잖아.’
왜 오늘따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서 당연한 걸 의심하게 하는지.
샬럿은 오늘이 정말 이상한 날이라 생각하며 언제나처럼 논란에서 한 발짝 물러나 베르너의 등 뒤에 숨었다.
하지만.
“……제 안목에는 충분히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만.”
그 평화도 잠시뿐이었다.
* * *
관중들은 샬럿을 치켜세우고, 나는 깎아내리고, 모두 예정된 전개였다.
“……제 안목에는 충분히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참다못한 폴랑이 끼어드는 것 또한 내 예상 범위 내에 있었다.
‘역시 나서 주는군.’
폴랑은 본인이 최고라는 실력에서 우러나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협박으로 인해 만들게 된 드레스라고 해도, 자신이 디자인한 옷이 비난을 받는데 그의 프라이드상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리가 없었다.
폴랑의 갑작스러운 반박에 잠시 머뭇거리던 영애들이 하나둘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보정 기구도 없고…….”
“보정 기구가 없음에도 저 정도의 라인을 살려낼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닐까요? 그리고 사람은 원래 그냥 있는 그 자체로도 아름다워요.”
“볼품없이 초라하고…….”
“절제된 미라고 하는 것이지요. 최소한의 것으로 최상의 효과를 얻는 것이 모든 디자인의 출발선입니다.”
생각 외로 진지하게 열변을 토하던 폴랑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자조적으로 웃다가 덧붙여 말했다.
“물론, 저조차도 한동안 잊고 살았던 말이지만요. 메르텐시아 영애의 드레스는 제 잊고 있었던 초심을 떠오르게 하는군요. 한때 제 철학이었던 것 말이죠.”
“……그런가요.”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메르텐시아 영애만을 위한 드레스로 보이는군요.”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계적인 디자이너이자 최고의 전문가가 그렇다는데 반박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나를 욕하던 귀족들은 무안함에 낯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트집을 잡았다가는 폴랑의 안목을 무시하는 언사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의복에 한해서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진 폴랑이 선동을 하는데 흔들리지 않기도 힘들 것이다. 유행에 민감한 만큼, 줏대도 없는 귀족들은 내 드레스를 다시 보게 되겠지.
“크흠, 뭐…… 편해 보이긴 하는군요.”
“자유라……. 하긴, 그 단어가 메르텐시아 영애 외에 누구에게 쓰이겠어요? 결혼하지 않고 정부를 들이겠다는 대담한 말도 서슴지 않는데.”
“그래도 좀 대단하긴 했어요. 사실 웬만큼 자존감이 높지 않은 이상 아무나 못하잖아요? 그런 행동들.”
“한동안 잠적하시더니, 예전과 정말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셨다 했어요.”
폴랑이 도화선에 불을 댕기자, 내심 내게 호감을 품고 있는 인물들이 조금씩 용기를 내어 발언하기 시작했다. 아주 극소수였지만, 나는 그들의 얼굴을 유의 깊게 살폈다.
물론, 대다수의 반응은 ‘자유는 무슨 고삐 풀린 망아지겠지’였지만, 이 정도만 해도 크나큰 변화였다.
여기까지는 모든 게 계획대로.
나는 남몰래 씩 웃으며 뿌듯해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폴랑을 황궁에서 데리고 온 보람이 있었다.
“그래서, 메르텐시아 영애는 어느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맞춘 거지?”
그때였다.
나는 누군가의 물음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은발에 가까울 정도로 밝은 금발을 가진 여자는, 또박거리는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내 앞까지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그녀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현명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황녀, 코델리아였다. 소문대로 이지적인 분위기가 시선을 끌었다.
그런데 당신이 왜 나한테 말을 걸어? 나는 당황해서 샬럿과 황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소설대로라면 내가 아닌 샬럿에게 말을 걸어야 마땅했다.
‘아니, 애초에 황녀는 지금보다 한참 나중에 등장할 텐데?’
코델리아는 내가 충동적으로 넣은 인물로, 오빠밖에 없는 샬럿에게 그녀를 아껴 주는 언니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급조한 첫째 황녀였다.
그러니 지금 시점에서는 황녀의 존재 자체를 만들지 않은 시점이라는 거다.
“혹, 내가 곤란한 질문을 한 건가?”
내가 굳어진 채 대답이 없자, 코델리아는 눈썹을 미미하게 찌푸리며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폴랑이 사약이라도 받은 것 같은 엄청난 표정을 했다.
본인의 손길을 거친 드레스가 모욕 받으니,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홧김에 저지른 걸 죽도록 후회하고 있는 거겠지. 내 드레스를 지어 주었다는 건, 황태자의 총애를 받는 샬럿과는 경우가 달랐으니까.
‘최소 사형이지 아무래도.’
폴랑이 내게 제발 구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물론, 나도 실력 좋고 보는 눈 있는 디자이너를 이렇게 저세상으로 보낼 생각은 없었다.
“제가 디자인했어요.”
“전부?”
“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코델리아를 향해 살짝 무릎을 굽혀 약식으로 예의를 차린 뒤에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거의 내가 디자인했고, 폴랑은 전체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어 주기만 했으니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폴랑을 살리려면 이 수밖에 없는걸. 애초에 처음 계약할 때 그가 동의한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폴랑이 날 보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기는 했지만, 나는 뻔뻔한 시선으로 받아쳤다. 뭐, 그럼 사형당할래?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말하는 듯 폴랑이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면, 이름은 뭐지?”
“이름이요?”
“이 드레스의 명칭 말이야.”
“아, 슈미즈 드레스입니다.”
“슈미즈? 잠옷 말인가?”
코델리아가 재밌다는 듯 되물었다. 치장하고 과시하기 위해 입는 드레스 앞에 잘 때 입는 잠옷의 명칭을 붙이는 게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확실히 영애가 입은 드레스는 잠옷처럼 편해 보여. 피곤하면 입고 그대로 잠들어도 될 것처럼 말이야.”
오, 이분 뭘 좀 아네?
나는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굉장히 기뻤다. 내가 이 옷을 열심히 디자인한 의도를 처음으로 알아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폴랑도 나름대로 열심히 호응해 주긴 했지만 고전적이고 세련된 아름다움이니 뭐니 하는 말들뿐이었기에 별로 크게 와닿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반응을 바로 저거였다고.
“맞아요. 이 드레스는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도 예쁘게 입을 수 있는, 그런 실용적인 드레스죠.”
허리에 리본으로 동여맨 천을 풀기만 하면 바로 잠옷으로 변신하고, 다시 묶으면 옷맵시를 살릴 수 있다. 갑자기 집 앞이라고 내려오라는 남자 친구의 깜짝 방문에도 대처할 수 있지!
나는 속으로 마구 수긍하며 살짝 흥분을 섞어 말했다.
“말씀대로 슈미즈가 잘 때 입는 옷이니 만큼 편하다는 점에서 착안했습니다. 사실 코르셋을 입으면 식사도 제대로 하기 힘들고, 심지어 호흡도 곤란해져서 이대로 단명하지 않을까 많이 걱정스러웠거든요.”
사실 코르셋을 오래 착용하면 내장이 위아래로 이동한다는 말을 듣고 더더욱 필사적으로 만든 거지만.
멋진 척 얘기했지만, 코르셋에 대한 공포를 숨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는데, 어쩐지 코델리아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웃긴 거지. 이거 굉장히 무서운 얘기인데…….’
멍하니 생각을 하는데, 여전히 입가에 부드럽게 미소를 머금은 코델리아가 내게 물어 왔다.
“그럼, 영애가 나를 위한 슈미즈 드레스를 하나 지어 줄 수 있나?”
‘……뭐?’
생각지도 못한 의뢰를 받았다.
설마, 슈미즈 드레스가 다른 누구도 아닌 황녀의 환심을 사게 될 줄은.
첫째 황녀 코델리아는 황태자 베르너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황실에서 꽤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소설 속에서 샬럿의 언니 포지션이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코델리아와 대화하는 내내 계속 안절부절못하던 폴랑은, 이제 ‘왜 상황은 점점 시궁창이 되어 가는가’ 하는 아연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고의가 아니었다.’
나는 괴로워하는 폴랑을 향해 속으로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코델리아가 이 슈미즈 드레스에 관심을 보일 만도 했다.
황제의 첫째 딸로 태어나 교육 받아 온 그녀는, 내심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아주 지긋지긋하게 여겼으니까.
소설에서 코델리아는 샬럿을 어화둥둥 보살피면서도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그녀의 삶을 동경하곤 했다. 옆에서 샬럿을 지켜보고, 그녀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며 대리 만족을 느낀 것이다.
왠지, 그런 코델리아의 상황이 전생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워졌다.
얌전한 아기, 착한 어린이, 성실한 학생, 참한 아가씨, 친절한 직원.
나는 부모님 혹은 사회가 바라는 대로 누군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반항하지 않고 기계처럼 고분고분 따랐었지.
애초에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코델리아와 연을 맺으면 내게 크고 작은 도움이 될 테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물론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선뜻 답하자, 폴랑이 제정신이냐고 말하고 싶은 듯 눈을 부릅떴다. 또 불시에 납치를 당할까 불안해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는 그에게 폐를 끼칠 생각이 없었다.
그가 해 주었으면 하는 역할은 끝났으니까. 그의 지위를 이용해 샬럿의 드레스로 향했던 관심을 이쪽에서도 나눠 가졌으니, 폴랑이 해 준 역할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그럼, 그 얘기는 나중에 따로 만나 뵙고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전하께서 편하실 때 언제든 연락 주세요.”
“그러지.”
코델리아는 용건을 마치자, 언제든지 황궁을 드나들 수 있는 황금 패를 내게 건네주고 멋지게 떠나갔다.
레테 제국의 문장이 새겨진 이 황금 패는, 내가 아무리 황궁에서 사고를 쳐도 황녀가 책임지고 보증한단 뜻이었다. 내 소문을 알 텐데도 선뜻 황금 패를 내밀다니, 그녀가 얼마나 대담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는 손안에 든 황금 패를 내려다보며 기분이 고조됨을 느꼈다.
황녀 코델리아와의 인연.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주어졌다. 이 상황만 잘 활용할 수 있다면 그녀가 샬럿에게 빠지기 전에 내 아군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얻지 못할 자유를 동경하기 때문이지.
‘솔직히 샬럿이 아무리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랐다고 해도, 방치되어 온 아일라만큼 자유로웠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