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악녀 메이커 34화
그건 마치 새장 속에서 노래하는 카나리아와, 세상 거친 풍파를 다 겪어 먹이를 뿌리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비둘기 정도의 차이였다.
야생마 같은 거친 매력으로 황녀를 유혹해서 사로잡고야 말겠다.
비장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 저도 영애께 주문을 넣어도 될까요? 물론 여러 일로 바쁘실 테니, 아주 오래 걸려도 상관없어요.”
“앗, 그럼 저도……. 금액은 얼마라도 상관없으니 메르텐시아 영애께 의뢰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돌발 상황은 황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끝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슈미즈 드레스에 은근슬쩍 관심을 보이던 영애 서너 명이 내게 몰려들어 본인들도 부탁할 수 있느냐 묻기 시작한 것이다.
기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한 그런 기분이었다. 난 사실 이쪽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데 내가 뭐라고 싶은 생각도 들고.
사실 내심 슈미즈 드레스를 귀족 영애들이 입어 줬으면 했다. 가벼운 티 파티나 실내에 있을 때만이라도 말이다.
안 그러면 코르셋으로 인해 신체는 구속될지언정, 몸속의 장기들은 속박에서 벗어나 원래 있던 자리를 이탈해 자유분방해질 테니까. 위아래로…….
왠지 생각을 이어 나갈수록 그녀들을 장기 이탈의 위험해서 구원해 줘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그래, 영애 한 명이라도 더 슈미즈 드레스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알아준다면 나는 감사할 따름이다. 부담스러워도 거절할 이유가 없지.
그렇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지금 제가 입은 것 말고도 디자인 몇 개 정도 구상해 뒀으니, 영애들께서 원하는 느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제게도 어울릴까요?”
“네, 물론이죠.”
“하지만, 저는 메르텐시아 영애처럼 몸매가 예쁘지도 않은걸요. 키도 너무 작고…….”
“그게 무슨 상관이죠? 입고 싶으면 입으면 그만이지. 그런 거 신경 쓰면 정작 원하는 건 평생 입지도 못해요.”
내가 좋아하는 게 어울리는 거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툭 하고 뱉었다가 뒤늦게 너무 무심하게 말했나, 하고 후회했다. 내 대답을 들은 영애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헉, 상처받았나.’
너무 말투가 배려 없었지?!
예전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내가 소심하게 속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쯤, 영애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영애, 멋져요…….”
그리고 살짝 몽롱하게 풀린 눈빛과 목소리로 저렇게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가……?’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데, 옆에서 킬리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고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분명 웃음을 눌러 참고 있는 거다.
“……나중에 연락 주세요.”
나는 킬리안의 발을 꾹 밟는 것을 치맛자락으로 교묘하게 가리면서 겉으로는 도도한 미소를 유지했다.
나는 영애들과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은 뒤, 한 명씩 약속을 잡았다.
호구처럼 보일 정도로 과하게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싹수없어 보일 정도로 까칠하지도 않은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관을 완전히 버릴 순 없는 모양이었다.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배려가 배어 있는 탓에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튀어 나갈 때가 있었다.
“제가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디자인으로 색상만 다르게 해서 말이죠? 알겠어요. 다시 제대로 일정이 잡히면 저택으로 파발꾼을 보낼게요.”
“네. 그럼 잘 부탁해요!”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헤헤 웃으며 갈 때부터 불안하다 싶더니, 대화를 끝내고 떠나보낸 영애 한 명이 몇 걸음 채 걷기도 전에 본인의 치맛자락을 밟고 크게 비틀거렸다.
“꺅!”
영애의 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었고, 넘어져서 잔이 깨지기라도 했다간 크게 다칠지도 몰랐다.
순간 내 머릿속은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지배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러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이게 뭔 자세다냐.’
내 반사 신경이 이렇게 뛰어날 줄이야.
무사해서 다행이었지만 생면부지인 사람과 의문의 왈츠를 추게 되다니……. 이왕 붙잡는 거, 좀 평범하게 잡을 수는 없었니, 내 무의식.
“조심해요. 다칠 뻔했잖아.”
나는 민망함에 눈가를 살짝 찌푸리면서 그녀가 바로 설 수 있게 도와주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존댓말과 반말이 막 섞여서 나왔다.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영애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날 거세게 뿌리치고 후다닥 달려갔다.
‘뭐지…….’
나는 조금 섭섭해졌다.
그래도 도와준 건데 그렇게까지 기겁하고 도망갈 건 없잖아. 아까까지만 해도 내게 호감을 보이는 것 같더니 어쩐지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익숙한 반응이기도 했다.
‘뭐, 여전히 악녀라 이건가.’
어쩐지 씁쓸하긴 하지만 크게 보면 좋은 징조였다.
오늘 내 목표는 악녀로서의 면모를 잊지 않은 채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거였으니까. 일단 나를 향한 노골적인 악의가 수그러들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샬럿에게 대놓고 직접 위협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그녀의 위치를 위협할 만한 위험한 인물이 되는 것.
그것이 루프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좋아. 샬럿에게 쏟아지는 관심의 지분도 어느 정도 가져온 것 같고.’
나는 오늘 이룬 성과에 만족했다.
그런데, 이대로 가면 부업으로 드레스 장사할 수도 있겠는데? 이름 좀 날리면 꽤 괜찮은 용돈 벌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뭐, 가만히 있어도 돈이야 넘치긴 하지만 원래 권리를 주장하려면 제 손으로 일궈 내야 하는 거니까. 밥벌레 취급은 면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렇게 힘을 키우면 정말로 정부를 들일 수 있게 될지도?’
홧김에 뱉었던 소린데, 마냥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스스로 번 돈이 많으면 실천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돈은 내가 벌고, 내조해 주는 남편이랑 결혼하는 게 내 꿈이었는데.’
이것저것 살뜰하게 챙겨 주고, 말하기도 전에 배려해 주고, 부탁하면 다 들어주는 사람.
그것도 그냥 오냐오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장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때론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고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는.
그런데,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그야말로 내조의 왕…….’
나는 저절로 킬리안을 향하는 시선을 애써 돌렸다.
아냐. 그만둬. 아무리 그가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해도, 여기서 더 이상 마음 주면 안 돼!
‘하지만…….’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준 것도, 날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며 웃어 준 것도 내 삶 전체를 통틀어 킬리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어차피 일시적인 계약으로 묶인 관계일 뿐이었다.
가끔 그의 외모로 눈 정화를 하는 것 정도야 괜찮았겠지만, 그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과한 따스함에 중독되면 결국 마음까지 의지하고 싶어질 테니까.
저렇게 잘생기고 능력 좋고 괜찮은 남자가 계속 내 곁에 있어 줄 리가 없지. 지금 킬리안은 그저 신을 농락할 목적 하나로 내게 붙어 있는 거다.
‘아무래도 너무 붙어 다녔나…….’
이게 다 그가 눈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계속 옆에 있어서 그런 거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애써 상념을 털어 냈다.
그제야 나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고, 그리고…… 샬럿이 나를 빤히 뚫어지도록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
그리고 나는 조금 놀랐다.
샬럿이 상상도 하지 못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독한 무표정.
‘저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알았나?’
그녀는 손톱을 깨물었다.
까득, 하고.
하지만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샬럿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줍게 미소 지었다. 방금 본 게 착각이었나 생각될 정도로 돌변하는 분위기가 싸했다.
샬럿은 내게 몸짓으로 예를 갖춰 인사했다. 먼 거리에 있었던 터라 안녕하세요, 하고 입 모양으로 벙긋거리며 인사하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만약 그녀와 친근한 사이였으면 달려가서 끌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그래, 뭐, 아무리 밝고 상냥한 캐릭터라고 해도 어떻게 사람이 시종일관 웃을 수 있겠어. 잠시 멍하니 있을 땐 표정이 굳을 수도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표정보다 모래알처럼 버석했던 샬럿의 시선이 왠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 * *
하루가 루프 되는 시각은 당연히 자정이었다.
나는 내 머릿속에 오싹한 악몽으로 각인된 팔링게아의 날을 떠올렸다.
딱 열두 시 정각이 되는 순간,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는 것처럼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내가 난잡하게 늘어놨던 물건들도, 심지어 내가 서 있었던 위치까지도 말이다.
원인을 알지 못한 채 수없이 되돌아가는 하루 속에 홀로 갇혔던 공포는 아직도 생생했다. 만약 킬리안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끔찍한 루프를 다시 마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이젠 수십 번쯤 돌아간다고 해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단 한 명이라도 의지가 되는 사람이 곁에 있어 주니 안심이 된다. 나는 그때와 다르게 여유를 즐기며 자정이 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자정이 가까워지자, 가만히 버티고 서 있기도 지겨운 연회장 밖을 벗어나 테라스로 나왔다. 별로 의미 없는 짓이었지만 시계탑을 바라보며 카운트다운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살짝 방향 감각을 상실한 내가 첫 번째로 택한 테라스는 황실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있었다.
‘시계탑은 이쪽이 아니라 반대쪽이잖아. 잘못 왔…… 어? 샬럿이다.’
등을 돌려 테라스를 빠져나오려고 한 그때 보고야 말았다. 샬럿과 베르너가 황실 정원을 배경으로 달밤에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물론, 은은한 달빛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남녀의 춤은 그림이 되기는 했지만, 멀쩡한 연회장 놔두고 왜 굳이……?
내 10년 전 낭만이 저런 것인가 하고 씁쓸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때맞춰 샬럿이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크으, 옥구슬이 굴러가고 있네.’
킬리안 때도 그렇더니 여기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웃음소리가 맑고 투명했다.
피식, 큭, 훗, 하하, 호호, 깔깔, 까르륵. 대체로 정직한 소리라고 해야 하나, 소리만 들어도 웃음의 이유를 알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까 베르너가 육성으로 훗, 하고 웃었을 때는 소름이 다 돋았지만. 쟤는 피식도 입으로 소리 낼 것 같아.
“뭐 해?”
그때, 날 따라 테라스로 나온 킬리안이 물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굉장히 수상쩍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에 쭈그려 앉아 테라스 난간 사이로 정원 아래를 관찰하고 있던 것이다. 아, 아니 나도 모르게…….
“왠지 들키면 안 될 것 같아서?”
“핑거 푸드 가져올까?”
“구경하고 있던 거 아니거든요? 별로 볼 것도 없는데 그냥 가죠, 뭐. 어차피 말소리도 전혀 안 들리고…….”
언젠가 이어지게 될 운명인 두 남녀가 단둘이 밀회를 즐기는 걸 지켜봐서 뭐한단 말인가. 그저 염장일 뿐 만고 쓸데없었다. 그리고 소설 내용을 떠올려 보면 이 부분에서 딱히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 장면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