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35화 (35/131)

# 35

악녀 메이커 35화

셉티무스가 등장했다.

“헉.”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졌다가 다시 바닥에 쭈그려 앉아 난간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뭐야?!

‘소설에 이런 거 없었잖아!’

지금은 베르너 강화 기간이었다.

역하렘 로맨스 소설에는 중요한 룰이 있는데, 캐릭터 강화 기간에는 한 번에 한 명씩만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반 한꺼번에 여러 명이 무더기로 나오면, 샬럿에게 사랑의 감정을 싹 틔우기도 전에 개판 싸움밖에 안 날 테니까.

물론, 후반부로 접어들면 얘기는 달랐다. 이미 샬럿에게 홀딱 반한 상태니까 어장 속 물고기들이 여러 명 등장했을 때 샬럿에 대한 독점욕이 더 커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기라면 베르너나 셉티무스나 샬럿이 어쩐지 계속 신경이 쓰이는 여자 정도일 텐데. 지금 삼자대면을 해 봤자 무슨 메리트가 있다고…….

“대체 뭐라는 거지?”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귀를 바짝 기울였다. 당연히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고, 어째 많이 안 좋아 보이는 셉티무스의 상태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나는 말없이 자연스레 킬리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잘 타일러서 보냈다면서요?”

“사지 멀쩡하잖아.”

사지만 멀쩡할 뿐이지 심신이 지치고 너덜너덜해 보이는데.

하지만 죽이지 않은 게 어디야 싶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킬리안이 대마법사도 이겨 먹을 최강 먼치킨이라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었다.

‘대체 정체가…….’

셉티무스가 로툴로의 왕이니 뭐니 했던 게 설마 진짜였나? 아니, 그런데 주술사가 어떻게 왕을? 왕족이었어? 애초에 로툴로는 어디 있는 나라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대화가 절정에 치달았는지, 베르너가 샬럿의 앞을 가로막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셉티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유들유들하게 받아치는 듯하더니 그대로 떠났다……?

“엥, 가 버렸네.”

내가 상황을 조금도 파악하지 못해 황당함을 금치 못하자, 내 곁에서 그들을 같이 지켜봐 주었던 킬리안이 짤막하게 해석을 해 주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새로운 피앙세를 찾아 떠나겠다는데?”

“누가요? 셉티무스가요?”

“응.”

뭐 이런 막장 전개가. 아니, 그보다 킬리안은 저쪽 대화가 들렸던 거였어?

소설에서 셉티무스는 남자 주인공인 베르너가 최종적으로 샬럿을 차지하기 전까지 계속 끈질기게 샬럿의 어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물고기였다.

그는 훗날, ‘날 선택하지 않아도 돼. 대신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는 내가 가장 먼저 널 찾아갈 테니까…….’ 하는 심금을 울리는 고백까지 남기며 평생의 지고지순한 짝사랑을 예고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 물고기가 감정이 깊어지기도 전에 알아서 어장 속을 튀어나왔다고? 나는 그렇게까지 소설을 틀어 버리는 짓은 안 했는데?! 애초에 셉티무스와는 말 한 번도 안 섞었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킬리안의 명화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셉티무스가 갑자기 저럴 원흉은 여기 하나밖에 없잖아.

“세상의 멸망이라니 그런 협박을 한 거예요? 며, 멸망시킬 수 있어요?”

“그럴 리가.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 멸망시켰겠지.”

진작 멸망시켰을 부분입니까…….

킬리안이 주장하기를 셉티무스에게 별말은 하지 않았으며, 그저 안부 인사 좀 해 줬을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그 말을 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찜찜해도 내게는 방법이 없었다. 생면부지인 셉티무스를 붙잡고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계속 여기 있어도 괜찮겠어?”

킬리안이 품속에서 꺼낸 회중시계를 내기 보여 주었다.

자정까지 정말 거의 남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의심을 접고 반대쪽 테라스로 다시 위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 * *

나는 시계탑을 마주 보며 말했다.

“8분 남았네요.”

아직 가을임에도 말할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찬 공기에 내가 으슬으슬 떨자, 킬리안은 망설임 없이 본인의 코트를 벗어 주었다.

“에이, 됐어요.”

약간의 술기운 덕분에 살짝 몸에 열이 올라서 조금 쌀쌀한 정도지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나는 손사래 치며 거절했지만, 그는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의아해했다.

“왜?”

“킬리안도 춥잖아요.”

“내가?”

그는 눈을 깜빡이며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아, 저 표정 본 적 있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습관 때문에 킬리안을 걱정해 줄 때마다 그는 저런 떫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굉장히 낯설고 생소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만큼 인망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걱정이 필요도 없을 만큼 강하다는 뜻인 건지. 아무래도 후자겠지.

“빙하 속에 파묻혀도 추위를 느낄 것 같지 않은데. 거기까진 직접 겪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군.”

“…….”

그건 감각이 없는 수준 아닌가.

“나는 아가씨께 집사의 본분을 다했을 뿐인데 뭐가 이상하지? 그렇게 챙겨 줬는데 아직도 익숙해지지 못하다니, 너도 참 너로군. 그냥 순순히 몸을 맡겨.”

그리고 멋대로 어깨에 코트를 둘러 주었다.

정말이지, 누가 주인이고 누가 집사인지.

나는 주인의 의사를 완벽하게 무시하는 불량한 집사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줄줄 흘러내리는 그의 큰 코트에 팔을 끼워 넣었다.

“그러고 보니 급료는 받아요?”

그가 나한테 할애해 주는 시간과 정성과 노력으로 봤을 때, 우리 가문 사용인 중 가장 높은 급료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의 신분부터가 위조라서 노파심에 물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킬리안은 ‘그런 걸 왜 받아?’ 하는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별로 받을 필요 없다만.”

“아니, 무상으로 일한다고요?”

“내겐 돈이 딱히 가치가 없는데.”

“……대체 킬리안은 어디서 도 닦다가 오신 거예요? 주술로 돈을 만들어 낼 수 있기라도 한 건가?”

“만들어 내진 않지만, 벌어들이긴 쉬우니 숲에 썩어 넘치도록 많지.”

그는 여상스럽게 말하더니, 아이들이 돌 대신 황금을 가지고 놀 정도라고 덧붙여 말했다.

아니, 뭐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거기는 대체 어디에 있는 유토피아인 거야?

“숲에서 살았어요?”

“응.”

하긴, 그가 하늘에서 갑자기 뚝 하고 떨어진 것도 아닐 테니까. 분명 나를 만나기 전에 살던 곳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게 마왕 성 같은 곳이 아니라 숲일 줄은 정말 몰랐는데.

‘숲이라…….’

어쩐지 아무런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바람처럼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사람일 것 같긴 했다.

나는 아이들이 황금을 가지고 뛰어노는 지상 낙원 같은 숲속 풍경이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뛰노는 근처에 주술사 킬리안의 모습도 함께 세워 보았다.

그저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이렇게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아니, 킬리안에게 에덴동산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가.

‘내가 쓴 소설인데, 이 남자에 한해서는 정말 알 수 없는 것뿐이네.’

킬리안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다.

나는 대체 어디서 뭐 하다 온 사람이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그러고 보니 같이 지낸 시간에 비해 정작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됐어, 자세히 알아서 뭐할 거야?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인데…….’

나는 애써 미련을 꾹 삼킨 채 다시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정각까지 1분을 남기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돈을 안 받아요. 킬리안이 저한테 호구라고 할 처지가 아니지 않아요?”

“네 일은 내게도 이득이니 기꺼이 했을 뿐이다. 이해관계가 서로 맞으니, 대가를 받을 필요는 없어.”

킬리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지만 나는 왠지 불편해졌다. 아무래도 그와 거리를 둘 필요성을 느낀 터라 더더욱 그랬다.

고용주와 고용인처럼 선을 딱 긋는 관계가 필요했다. 지금처럼 서로 뭐라 정의 내리기 모호한 관계가 아닌,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관계.

모든 일이 끝나면 서로 빚진 것 없이 등 돌릴 수 있을 만큼 완벽하게 계산적인 관계가 되고 싶었다. 이 부분에 한해서는 아무리 겁쟁이라고 욕해도 양보할 수가 없다.

나는 첫 만남부터 그를 기만했다.

말끝마다 신을 혐오하는 발언을 하는 킬리안에게 내가 이 세계를 만든 작가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올 리가 없었다. 아무리 먼 미래에 우리의 사이가 막역해진다고 해도 말이다.

거짓 위에 세워진 관계가 얼마나 오래갈까. 그리고 또 얼마나 쉽게 무너질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리고 그런 아슬아슬한 계약 관계를 오래 유지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당신은 이름조차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 엑스트라다. 그렇게 말하게 된다면 킬리안의 반응이야 불 보듯 뻔했다.

신의 의도를 망치고 싶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준 사람이었는걸? 직접 날 일으켜 세워 준 그 다정한 손으로 다시 나를 철저하게 무너트릴 것이다.

나는 그런 비참한 미래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킬리안한테 열정 페이 시킬 생각 전혀 없거든요?”

“열정 페이?”

“대가 없이 열정을 바치는 거요.”

생각해 보니 애초에 그와 한 건 계약인데, 왜 대가를 받아가지 않는단 말인가. 처음에 그를 보고 ‘악마 같으니 영혼이라도 달라고 할 것 같다’ 하고 겁먹었던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였다.

“서로 아무리 이해관계가 맞는다고 해도, 제 쪽이 받아 가는 게 더 많잖아요. 킬리안이 손해라고요.”

“내가 손해 보는 게 싫다?”

킬리안은 내 말을 정리해 주며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까맣게 잠긴 밤하늘 아래에 서 있으니까 그의 눈이 유독 형형하게 빛났다.

나는 어둠을 뚫고 빛나는 그의 은빛 눈동자에 속도 꿰뚫어 보일까, 괜히 똑딱거리는 시계 초침만 집요하게 응시했다.

“……네.”

자정까지 10초 남았다.

10초 후, 모든 게 결정 날 것이다.

덜컥 자정이 눈앞에 닥치니, 갑자기 긍정 아래에 애써 묻어 두었던 불안이 밀려왔다.

만약 루프가 다시 일어나면, 나는 지금까지의 계획을 다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시도하고, 시도하고, 여러 번 또 다른 시도를 하다가 어쩌면 결국 소설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적인 결론에 다다를지도 몰랐다.

끝까지 발버둥 쳐도 결국 비극이 나의 운명이라면, 내게 남을 건 모든 것을 체념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가정해 보는 것만으로도 울컥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정 그걸 원한다면.”

킬리안이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너무 소리가 작기도 했고, 잠시 바짝 긴장해서 그와의 대화도 잊은 채 초침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잠시만요. 저 시계 좀…….”

5, 4, 3…….

똑딱똑딱.

시계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신경을 긁어 댔다. 나는 숨조차 멈추고 초침이 가리키는 숫자를 따라갔다.

2, 1…….

그런데 자정을 내 눈으로 직접 맞이하기도 전에, 킬리안에 의해 고개가 돌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