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악녀 메이커 36화
내 볼을 부드럽게 감싸 쥔 손길은 익숙했다. 그래서 순간 방심했는데, 얼굴에 직접 맞닿는 그의 숨결은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알싸한 풀 냄새가…….
얼굴이 너무 가까운데…… 하는 얼빠진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곧 내 정신을 빼놓는 것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어둠 아래에서도 새하얗게 빛나는 피부와, 나른하게 풀어진 눈꺼풀. 길고 촘촘한 검은 속눈썹과 그 속을 가득 채우는 맹수 같은 형형한 눈동자가.
열기를 품은 감촉이 깃털처럼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마에서 콧잔등까지 차례로 가볍게 스치는 듯하더니, 마지막엔 입술에서 느릿하게 겹쳐졌다.
아.
그대로 사고가 정지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시각에 생각지도 못한 짓을 당했다.
일순 킬리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대로 집어삼켜지는 줄 알았다.
거의 심해처럼 짙어진 그의 시선 끝에 스치는 격렬한 감정을 또렷하게 보았으니까. 마치, 사냥감이 방심한 순간을 기다렸다가 낚아챈 짐승처럼.
나는 헛숨을 들이켜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킬리안이 다가올 때만큼이나 쉽게 물러나며 말했다.
“받아 갔어.”
선정적인 얼굴을 하고서 담백하게 떨어진 그가 거리를 벌리며 말했다. 화도 내지 못할 정도로 달콤한 미소에, 나는 바보같이 연신 입술만 달싹였다.
“바, 받아……? 아니 왜 입…….”
“대가.”
킬리안은 혀로 붉은 입술을 훑으며 그것을 단순히 정의 내렸다.
이런 게 대가면, 내가 앞서 했던 발악들이 다 소용없지 않아? 벗어나려다가 더 수렁에 잠기는 꼴이잖아.
똑딱똑딱 거리는 초침 소리는, 이미 시계 소리인지 내 심장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아주 망했다.
안 그래도 망한 인생, 총체적으로 더 망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없던 일로 하죠.”
내가 냉정함을 되찾고 침착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내 필사적인 발악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하루가 돌아가지 않았잖아.”
“…….”
“저런, 루프가 일어났으면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라도 있었을 텐데.”
“……윽.”
그의 말마따나 자정은 이미 훨씬 전에 지나 있었다.
아직도 입술에 닿았던 몰캉거리는 감촉이 지나치게 생경한데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이미 다음 날로 넘어갔기에 이 입맞춤을 없던 일로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짜 악마 맞잖아…….
영혼을 빼앗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내놓으라는 건가. 방금 악마 같은 주술사에게 심장을 뽑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 * *
입이 방정이라는 말이 있다.
킬리안은 내가 그와 선을 긋기 위해 했던 말의 허점을 입맛대로 파고들었다. 틈만 나면 내게 ‘대가’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괜히 덜컥 겁을 먹은 것에 비하면 싱거울 정도로 별것 아닌 것들을 요구했다.
예를 들면 나를 무릎 위에 앉힌다거나, 가볍게 끌어안고 이마나 볼에 입을 맞춘다거나 하는 식의 접촉들이 그가 요구해 온 대가였다.
사실 내가 애정 결핍이 좀 있는 편이라, 누가 날 만지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오히려 타인의 온기에 굶주려 있었고, 태연한 척 속으로는 애정을 갈구하고는 했다.
게다가 킬리안처럼 완벽한 사람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스스로도 조금 위험하다 느낄 만큼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는데.
킬리안의 품에 안기면 온몸을 맡기고 그의 품에 기대 기분 좋게 골골거리다가 뒤늦게 정신을 되찾을 때가 많았다.
혹시 킬리안이 날 좋아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닌데…….
‘……어째 길들이고 있는 것 같지.’
내가 그와의 접촉에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길들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전부터 괜히 만지작거리는 걸 좋아하는 것 같더니, 이건 마치 애완동물을 쓰다듬고 같이 부대끼고 싶어 하는 그런 느낌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킬리안의 의도는 정확히 읽을 수 없었고, 나는 점점 그의 체온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면 춥고 썰렁하게 느낄 정도였다.
‘인생 망했네…….’
한때 킬리안을 나 같은 호구라고 착각했던 내가 머저리지.
그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것이 가치 없었을 뿐이었던 거지, 그는 절대 손해 보고 살 사람이 아니었다. 제게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뭐, 솔직히 내가 내 무덤을 판 꼴이지. 가만히 있던 사람을 먼저 자극한 게 난데 누굴 탓하겠어.’
그래서 나는 은근히 무시했다.
이미 내 삶에 완전히 녹아들어 버린 킬리안을 대놓고 피해 다닐 수 없어서, 아주 은근히.
단답형으로 대답해서 대화를 빨리 끊어 버린다거나, 그가 대가를 요구할 때 빼고는 거리를 유지한다거나, 무표정을 고수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이대로 킬리안에게 완전히 길들어져서 나만 안달 나는 애완견이 되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그렇게 혼자 필사적으로 발악하고 지내던 무렵,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들이 동시에 나를 찾아 댔다.
첫 번째는 편지를 통해서였다.
나는 아일라 메르텐시아의 이름으로 도착한 두 장의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하나는 소피아에게서, 또 하나는 폴랑에게서 온 것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일단 먼저 소피아의 편지를 뜯어보았다.
[저는 아가씨의 뜻을 따르겠어요. 뭐든 시키는 대로 따를 테니 이 소피아를 믿고 맡겨만 주세요.
p.s. 이 편지는 추적이 붙지 못하도록 암흑가를 통해서 전하는 거니까 심려치 않으셔도 좋습니다.]
……생각보다 철두철미하잖아?
암흑가까지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보통 간이 큰 게 아니었다. 하긴, 그러니까 남들은 겁에 질려 찍소리도 못하는 아일라에게 능청스럽게 굴며 등쳐 먹을 생각을 했던 거겠지.
나는 쓰고 버릴 패 정도로 여겼던 소피아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며 일단 이 건은 재고해 두기로 했다. 그렇다고 덥석 믿고 맡기기엔 아직 그녀를 쉽게 믿을 순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만일 진심이라면 그녀의 판단력은 조금 놀라웠다. 처세술의 달인, 줄타기의 달인이 결국 최종적으로 선택한 게 나라니.
‘원래는 나를 배신해야 하는데.’
나는 얼떨떨하면서도 소피아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내심 뿌듯하게 여기며 폴랑에게서 온 편지를 마저 펼쳐 보았다.
[제발 절 납치해 주십시오. 내일 수확제 마지막 연회가 기회입니다.]
이틀 사이에 몹쓸 병에 걸리기라도 한 걸까……. 넷째 날 무도회에서 마주쳤을 때까지만 해도 제정신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쯧쯧, 혀를 차며 그의 편지를 옆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킬리안이 폴랑의 편지를 다시 내 손에 쥐여 주면서 타이르듯 말했다.
“끝까지 읽지 않는 건 나쁜 버릇이야. 쓴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야지.”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으로 쓴 글이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는 사람처럼 괴로워하며 다음 부분을 읽었다.
횡설수설. 정말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문장 구성이었지만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랬다.
[황녀 전하께 직접 바칠 만한 드레스를 메르텐시아 영애 혼자의 힘만으로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 제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실 겁니다. 그러니 절 납치해서 드레스를 만들게 해 주십시오.
이번에도 모든 공을 영애에게 돌려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도움을 드릴 수 있게만 해 주십시오.]
끝까지 읽어 봤지만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본인이 이용당한 것을 알았으면 보통 화를 내거나 상종도 하지 말아야지, 제발 자신을 또 이용해 달라고 매달리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새로운 종류의 마조히스트인가?
나는 말없이 폴랑의 편지를 벽난로에 집어 던져 불쏘시개로 썼다. 킬리안은 내가 남의 성의를 활활 불태워도 끝까지 읽기만 하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모양인지 잘했다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는, 은근슬쩍 그 손길을 피했다.
* * *
두 번째는 메르텐시아 공작이었다.
그는 첫째 날 무도회에서 날 우연히 도와준 이후로도 계속 돌 보듯 무시하더니, 돌연 나를 불러냈다.
나는 설마 그때 하지 못했던 잔소리를 지금에서야 할 생각인가, 하고 잔뜩 긴장하고 그를 찾아갔다. 아무리 그래도 시간차 공격은 너무한 것 아니냐고 속으로 투덜대면서 말이다.
메르텐시아 공작은 저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우아하게 찻잔을 기울였다. 내가 아무리 킬리안에게 열심히 자세 교정을 받는다고 한들, 공작의 기품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나는 불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어째, 전에도 똑같은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작위를 받을 생각이 있나?”
“……네?”
정말 맥락이 없으시군요! 뜬금없기로는 이길 자가 없는 사람이네!
대체 어떤 사고의 흐름을 겪으면 그런 결론을 낼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킬리안이 신의 큰 뜻을 깨닫고 믿음 사랑 소망을 실천하겠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해졌다.
‘그 말을 꺼내게 된 중간 과정을 먼저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올 뻔한 말을 애써 삼켰다. 아마 나는 지금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킨타이어 백작위 계승권자이니, 흥미가 있느냐는 말이었다.”
킨타이어.
예전에 킬리안이 메르텐시아 가문에 대해 아주 간략히 설명해 주었을 때 언뜻 들은 기억이 있었다.
레테 제국에서는 세력이 큰 가문의 경우, 여러 작위를 동시에 보유할 수 있었다.
메르텐시아 가문의 경우, 메르텐시아 공작위 외에도 벨루아 후작위, 킨타이어 백작위, 폴리낙 백작위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때 아일라의 숙부가 물려받았던 ‘킨타이어’ 백작위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석이었다. 킨타이어 백작 일가족 전원이 불행한 사고에 휘말려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유례가 없던 일이라 가타부타 말이 많았지만, 결국 작위를 넘겨받은 건 현 메르텐시아 공작 빈센트였다.
소설에서 아일라가 작위를 수여 받았다는 내용은 없으니, 아마 원래대로였다면 내 오라비 되는 아슬란이 공작위도 백작위도 전부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는 제1계승권자였으니까.
……그래 봤자 소설에서는 그가 물려받기도 전에 가문이 멸문하니까, 작위 같은 건 아무래도 소용없었겠지만.
아무튼, 빈센트가 하는 말은 아일라가 제2계승권자라는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금 당황스럽네요. 아버지께서 왜 갑자기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후계자 수업 같은 것도 전혀 받지 않았기도 하고…….”
그리고 여태까지 날 소 닭 보듯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갑자기 관심 있는 척 굴면 내가 의심을 하겠어, 안 하겠어. 이건 무슨 새로운 함정인가 하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고.
“정부를 들이겠다고 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