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37화 (37/131)

# 37

악녀 메이커 37화

“……네?”

“아무런 작위도 없이 정부를 둘 수는 없어. 특히 여성이라면 더더욱 사회에서 지탄 받겠지. 그러니까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도록 힘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공작은 상식 밖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꺼냈다.

……이야, 그때 그가 날 변호해 주는 모습을 보고 꼰대 같지는 않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개방적일 줄은 몰랐는걸?

당장 정략결혼 해서 가문에 힘을 보태라고 윽박지르긴커녕, 날 지지해 주다니 아주 그냥 신세대야, 신세대.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더더욱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데 이분, 자식들을 도구 이상으로 보지 않는 분 아니셨나요? 사랑하는 아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이용 가치로 따지시는 분 아니셨나?’

캐릭터 붕괴가 일어나려고 하잖아.

하지만 내 옆에 선 킬리안은 딱히 놀라지도 않은 기색이었다. 오히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태연했다.

대체 뭔데. 둘이서 나만 따돌리지 말고, 나도 좀 이해시켜 봐.

아니면 혹시 변한 내게서 무언가 이용할 만한 가치를 찾았다거나?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이런 태세 전환은 말도 안 된다.

나는 살짝 비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제가 필요해지신 건가요?”

“아니.”

“…….”

그렇게 칼처럼 딱 잘라서 말할 건 없잖아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어서 베이는 줄 알았네.

“그럼 왜죠?”

“알 거 없다.”

“…….”

거 말투 참 쌀쌀맞네.

나는 말없이 킬리안을 향해 손짓했다. 그에 그가 내 곁에 다가오자 말없이 눈빛을 보냈다. 그는 거의 독심술과 다름없는 통찰력인지 뭔지가 있으니, 내 마음을 알아서 잘 읽어 줬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내 의중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킬리안이 공작과 시선을 마주쳤다.

“빈센트.”

순식간에 공작의 눈동자가 혼탁하게 풀어졌다.

아무래도 킬리안의 능력은 이렇게 사용하는 게 가장 깔끔하고 뒤탈이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의 숨기고 있는 속마음을 토해 내게 할 때.

“네 소박한 소원은 전에도 들은 바가 있다만, 지금도 다를 게 없나?”

“……그래.”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두 사람만의 세계를 공유하지 말고, 나도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줘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두 눈을 부릅뜨고 킬리안에게 계속 눈치를 주자, 그는 피식 웃으면서 또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가.”

‘……치, 치사해.’

이번에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가 대가라는 말을 꺼냈을 땐, 원하는 대로 해 줘야 그도 내가 바라는 걸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얌전히 몸을 맡겼다. 머리 쓰다듬는 거야 뭐.

‘내 몸에 꿀이라도 발라 놨나.’

대가를 아주 잘 이용 중인 킬리안은, 내 머리를 만족스러울 때까지 쓰다듬고 나서야 무거운 입을 열었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그러자 공작이 느릿하게 답했다.

“필요할 것 같았으니까.”

“누구에게?”

“저 아이에게…….”

“그동안 내버려 뒀으면서 왜 갑자기 신경 쓰는 건지 모르겠다는군.”

“……내버려 둔 게 아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풀어 준 거지.”

“그걸 보통 방치라고 하지.”

방치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공작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바라는 것은 전부 해 줬고, 가문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게 나름대로 노력했어. 원하는 대로 인생을 마음껏 살도록.”

“흠. 하지만 본인은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던걸. 서로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있나?”

“……없어.”

“평범한 인간은 말하지 않으면 그 속을 알지 못하지. 부모가 그런 식으로 대하면 자식으로서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보통은.”

“……그런가?”

“그래. 직접 말한 것도 아닌데, 바라는 게 뭔지 어떻게 알지?”

“자식 마음을 모르는 부모가 있나.”

“있더군. 지금 내 눈앞에.”

“아니다.”

“맞아.”

그런데 이 대화의 흐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저 양반 설마…….

‘아일라를 미워한 게 아니라, 그냥 자식에게 애정 표현을 할 줄 모르는 무뚝뚝한 아버지, 아니 그냥 바보였다는 전개였던 거야……?’

나는 냉기가 흐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킬리안과 덜떨어지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공작을 황당하게 응시했다.

아니, 그게 어딜 봐서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게 둔 거야? 내가 직접 당해 봐서 아는데, 그건 철저한 무시였다고.

하지만 공작이 나름대로 아일라에게 애정이 있는 것을 전제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자니 갑자기 뒷골이 당겨 왔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소설에서도 공작이 아일라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고만 묘사했지, 구체적으로 공작의 입장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일라를 낳다가 그녀의 어머니가 죽어서 공작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도, 공작에게 직접 들은 게 아닌 아일라의 생각일 뿐이었고…….

‘……그런데, 착각할 만하잖아.’

아일라의 생각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저택의 사용인들도 그랬고, 처음 무도회에서 만났던 그 꼰대도 ‘언제부터 관심이 있었다고 딸에게 신경을 쓰느냐?’ 하는 식으로 말을 했었다.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제가 바라는 게 뭔데 해 주셨다는 건가요? 금시초문인데요.”

그러자, 공작은 내 쪽을 돌아보더니 태연한 얼굴로 선뜻 대답했다.

“황태자와의 약혼.”

“뭐, 뭐라고!”

“네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었지.”

……부탁?

나는 갑자기 아찔해지는 머리를 짚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아, 맞아. 그러고 보니 소설에 그런 장면이 있었다. 아일라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태자와의 약혼을 성립시키려고 수작을 부리는 게 있었는데, 그 시기에 내가 방구석 폐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어서 없던 일로 된 모양이었다.

소설에서는 아마 샬럿 때문에 없던 일이 되었었지? 그래서 아일라가 더 열 받아서 연회장에서 날뛰었던 거고.

“꽤 괜찮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황태자가 미리 무슨 수를 쓴 건지 폐하께서 망설이시더군. 그러던 와중에 네가 갑자기 방에 틀어박히는 바람에 흐지부지됐지만 말이다.”

공작은 그래도 ‘이제 네가 더는 황태자에게 마음이 없다니, 다행인 일이다.’라며 찬바람이 쌩쌩 부는 싸늘한 말투로 다정하게 말했다.

그게 대체 무슨 부조화냐 의아해하겠지만, 목소리와 내용물이 따로 놀고 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도 제 자식이라고 생각해 주기는 했던 모양이네. 딸 바보는커녕 사랑하는 축에도 끼지 못하는 최소한의 관심인 것 같기는 하지만.’

어딜 가든 자신은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아일라는, 어릴 때부터 착실히 삐뚤어져서 결국 폭주하고 가문을 다 말아먹는다.

만약 공작이 그녀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라도 걸어 줬다면 아일라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알 길은 없었다. 어차피 소설 속이었으니까.

어쨌든, 공작은 그냥 제 딸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게 풀어 주고, 원하는 걸 다 들어주기만 하면 부모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겨 온 듯했다.

황태자와의 약혼이 없던 일이 된 지금 시점에서 내가 더는 황태자를 사랑하지 않으니, 이제는 작위를 물려줌으로써 내 새로운 꿈을 이뤄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내가 정부를 들인다고 한 발언 자체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야……?’

그러고 보니, 방구석 폐인이 된 나를 방 밖으로 끌어냈을 때도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갖추라고 닦달하면서도 정작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

어쩌면 그의 목적은 내가 폐인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었던 게 아닐까?

그때. 딱, 하고 킬리안이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그에 능력에서 풀려난 공작은, 잠시 상황 파악을 하기 힘든 듯 눈가를 찌푸리더니 곧 본인이 늘어놓은 말을 떠올렸는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생각이 있으면 말하도록. 그때 다시 자세히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그리고 마치 도망이라도 가는 것처럼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나는 우아한 걸음으로 집무실 밖을 벗어나고 있지만, 어딘지 허둥지둥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는 공작의 뒷모습을 황망히 응시했다.

어디가. 여기가 당신 집무실인데.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작의 보좌관이, 당황스럽게 ‘공작님!’ 하고 외치며 그의 뒤를 쫓아갔다.

‘작위라…….’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대로 작위를 물려받으면 정부를 들일 수 있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힘을 키우는 데는 더 수월하겠지?

아무래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회가 찾아오려는 모양이었다.

* * *

도깨비한테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공작과의 두 번째 만남을 거쳐, 세 번째로 날 찾아온 건 아슬란이었다.

그동안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어버렸던 호적상 아버지 아들 되는 사람이 내 앞에 얼쩡대고 있었다.

“뭐예요?”

나도 모르게 시비조의 말투가 툭 하고 튀어나와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슬란 저놈이 아까부터 내가 타고 가야 할 마차 앞을 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데 길막이야.

타고 갈 마차를 착각했나 싶어서 그의 오른쪽으로 비켜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놈이 오른쪽으로 따라왔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랬더니 놈이 또 내 앞을 막았다.

“에스코트하지.”

그러고는 다짜고짜 한 말이 저거였다.

아니, 뭐래.

나는 너무 황당해서 뭐라고 대꾸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동안 서로 현실 남매처럼 개돼지 보듯 무시하고 살았잖아. 그런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오면 내가 ‘그래요, 오라버니!’ 할 줄 알았나.

“전 이미 파트너가 있는데요.”

나는 평소와 같은 연미복 차림의 킬리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딱히 꾸미지 않았음에도 단정한 옷차림 하나만으로도 화려하게 빛이 났다.

아슬란의 시선이 잠시 킬리안에게 향했다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

“에스코트하마.”

“…….”

내가 방금 사람이 아니라 벽에다 대고 말을 했나. 나는 벽창호의 화신 같은 놈을 앞두고 잠시 침묵했다. 아니, 에스코트고 나발이고…….

‘대체 왜 나한테 와서 이런담.’

나는 아슬란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는 메르텐시아 가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장남답게 어디 가서 절대 빠지지 않을 미모의 소유자였다.

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이지. 공작보다 공작 부인을 빼다 박아서 그런지, 잘생겼다는 말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더 어울릴 법한 청초한 외모였지만.

검보다 펜, 펜보다 꽃이 더 그림이 되는 아슬란은, 그래도 큰 키와 체격 덕분에 연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제국에서 가장 세력이 큰 메르텐시아 공작가문의 후계자인 데다가 현재는 나라의 관리로 일하고 있고.

성격에 좀 심하게 결함이 있긴 하지만, 그걸 감수하면 어느 가문의 영애든 쌍수 들고 환영받을 만한 조건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동생에게 와서 파트너를 부탁할 정도로 여자들에게 인기 없을 양반이 아니라는 소리다. 오히려 인기가 폭발했으면 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