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악녀 메이커 38화
실제로 수확제 무도회에서도 우연히 그를 마주칠 때마다 수많은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영애들은 아슬란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치고받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치열하게 눈치 싸움을 하고 있었더랬지.
“입구까지만 같이 가면 된다.”
아슬란은 여전히 비스크 인형처럼 예쁘장하고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닌 척해도 곤란해하고 있는 기색인 게 뻔히 보여서 무슨 일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무슨 일 있나요?”
친동생과 파트너로서 함께 무도회에 가겠다니. 친남매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을 자처할 정도라면, 대체 저놈에게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에…….
“네가 알 건 없어.”
“그래도 뭔 사정인지 알아야…….”
“내가 알아서 해.”
빠직.
나는 이마에 힘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아슬란을 옆으로 밀어내고 홀로 마차에 올라탔다.
저런 놈인 거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걱정할 뻔했는데 역시 실망하게 두지 않는구나. 고맙다, 이 성격 파탄자야.
하지만, 내가 좌석에 엉덩이를 내리기도 전에 킬리안에 의해 다시 끌려 나오고 말았다.
나는 마차 문을 붙잡고 버텨 보려 했지만, 결국 무지막지한 킬리안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질질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 왜!”
킬리안이 씩씩거리는 내게 진정하라는 듯 어깨를 토닥여 준 뒤, 옷매무새를 다시 정돈해 주며 대답했다.
“오늘은 도련님과 함께 가시죠. 무도회 첫날과 마지막 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해야 한다는 걸 아가씨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메르텐시아 가문의 후계자가 불참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
맞는 말이라 더 짜증이 났다.
어쨌든 아슬란이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건, 결국 파트너를 못 구했다는 소리니까 혼자서는 회장에 못 들어가겠지.
“……후, 알았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아슬란과 같이 마차에 올라타는 수밖에 없었다. 킬리안이 내 귓가에 ‘친해지길 바라’ 같은 말을 속삭이긴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전에 킬리안이 스쳐 가듯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을 사랑해 줄 사람을 찾아가야지.
킬리안은 그 상대를 내 가족, 아일라의 아버지 빈센트와 아슬란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내가 봤을 때 둘 다 글러 먹은 인간들이다.
그래도 빈센트는 최근 좀 달리 보이기 시작하긴 했지만, 오라버니라 부르기도 싫은 아슬란 저놈이 문제였다.
무슨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알 것 없어.’, ‘내가 알아서 해.’ 하는 질풍노도의 사춘기 소년 같은 대답만 들려주는 놈과 어떻게 친해져.
“저는 오늘 함께 가지 않을 테니, 두 분이서 같이 다녀오시죠. 도련님께서 오늘 하루 아가씨를 잘 에스코트해 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알겠다.”
“엑, 싫……!”
어. 라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마차의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거의 그와 동시에 마차가 출발했다. 그렇게 나는 저택에서 마주치기 불편한 인사 2호와 함께 마차에서 숨 막히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
“…….”
좋아. 책이나 읽자.
나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어, 늘 마차에 보관해 두는 링테 작가 소설을 좌석 밑에서 꺼냈다.
“……!”
“……?”
그러자 내가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슬란이, 잠시 몸을 움찔 떤 것도 같았다. 다시 그를 올려다봤을 땐 전과 다름없는 인형 같은 무표정이라 착각이겠거니 했지만.
그런데 계속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도저히 무시하려고 해도 신경 쓰여서 그럴 수가 없었다.
“뭐예요?”
내가 묻자, 그는 한동안 답이 없다가 뒤늦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재미있어?”
“재미있으니까 읽죠.”
“…….”
그걸로 대화는 또 단절되었다.
나는 내게서 시선이 거둬졌다는 것에 만족하며 독서에 열중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이라 토할 것 같긴 했지만, 링테 작가라면 인내할 수 있지. 나는 간간이 창밖을 응시하는 것으로 멀미를 극복해내며 열심히 책을 읽었다.
후……. 이번에 골라 온 책은 후회 남주라서 도저히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네……. 그렇게 내가 한참 속으로 남자 주인공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울상을 짓고 있을 때, 또다시 시선이 느껴졌다.
‘책 읽는 게 그렇게 신기해?’
그러고 보니 그는 내가 읽는 책마다 수준 떨어진다고 비난을 하던 놈이라는 걸 떠올렸다. 특히 내가 링테 작가 한정판을 들고 가면서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칠 때는 떫은 감이라도 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그러니까, 책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읽고 있는 링테 작가님 소설이 거슬린다 이거지?
나는 내 영역을 공격받은 개처럼 으르렁거릴 뻔하다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존중입니다. 취향해 주시죠.”
“뭐?”
“취향이니까 존중해 달라고요.”
내 말에 잠시 대답 없던 그가, 설핏 인상을 쓰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그딴 쓰레기를.”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꾹 눌러 참고 있었는데, 저놈이 기어이 그 말을 뱉었다. 다 참아도 내 존잘님을 모욕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마차 안에서 엄청난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가, 낮은 마차 천장에 머리 한 번 박고 그대로 다시 주저앉았다.
“아야…….”
나는 욱신거리는 정수리를 문지르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흥분할수록 냉철한 이성으로 대해야 하는데, 너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아슬란은 내 꼴사나운 모습에 비웃음을 터트릴 법도 한데, 여전히 인형 같은 무표정으로 날 지그시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데 여기저기 방황하는 시선이 어쩐지 묘하게 쩔쩔매는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어느 부분이 어떻게 쓰레긴데요?”
나는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읽어 보시긴 하셨어요?”
“뭐…….”
“그냥 로맨스 소설일 뿐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무서운 연출력과 섬세한 감정선, 매끄럽고 설레는 대사와 인물들의 매력까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소설이라고요.”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그 정도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읽기는 읽어 본 모양이네. 하지만 취향이 아니면 아닌 거지, 굳이 팬 앞에서 쓰레기니 뭐니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냥 평소처럼 무시하면 되지.
“천재! 천재 중의 천재! 그것도 글뿐만 아니라 작곡도 하시고 가끔 삽화도 그리시고 얼마나 다재다능하신데요? 심지어 다 잘해! 인간이 아니라 악마에게 받은 재능이라고요! 가둬 놓고 삼시 세끼 영양식만 먹이면서 작품 활동만 하게 하고 싶은……!”
크흠, 그 얘기는 됐고.
그 와중에도 범죄자 같은 소리를 했다는 자각은 있어서,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링테 작가님이 얼마나 천재인지 여기서 더 말해 봤자 귓등으로도 안 들으실 것 같으니까 말씀드리는 건데, 그냥 내가 좋아서 좋은 걸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거예요.”
“…….”
“그냥 계속 본인 하고 싶은 거 하세요. 남이 뭘 하든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말고. 적어도 전 그쪽…… 아니, 오라버니가 뭘 좋아하든 신경 안 써요.”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그렇게까지 내 일에 간섭하는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괜한 오지랖을 부리며 내 취미 생활을 뜯어고치려고 하면 진짜 물어뜯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아슬란은 고개를 튼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설마 비웃는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의 목덜미가 살짝 붉어져 있는 것이 보였으니까.
‘……부끄러워하고 있어?’
대체 어느 부분에서 어떤 이유로 얼굴을 붉히는 거야.
심지어 손가락 사이로 언뜻 드러난 눈빛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맥락이 없었다. 역시 부전자전이라고 해야 하나.
나중에 킬리안에게 부탁하면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있겠지만, 솔직히 왜 저러는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아슬란을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하면서, 다시 소설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수확제는 무도회는 엿새 동안 열리고, 귀족들은 적어도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을 포함한 세 번은 참석해야 한다. 오늘이 바로 그 무도회 마지막 날이었으니 첫째 날처럼 모든 귀족들이 다 모이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무도회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아슬란이 억지로 나를 파트너로 데려온 저의를 알 수 있었다.
회장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영애들이 엄청난 기세로 몰려든 것이었다. 마치 사탕에 개미가 꼬이는 것처럼 바글바글 엉겨 붙어, 오히려 곁에 서 있던 내가 기겁할 정도였다.
“오늘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아슬란 님. 한 번만 제 쪽을 쳐다봐 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아슬란은 그 영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엄청난 철벽이었다. 그랬더니 그 영애는 ‘그런 차가운 옆모습마저도 멋져!’ 하고 정신 나간 소리를 했다.
“어제도 그제도 다른 영애를 파트너로 데려오셔 놓고는 오늘도 제 차례가 아닌 건가요? 마지막 무도회인데 너무하셔요, 아슬란 님~”
“어머, 메르텐시아 영애시잖아? 파트너가 없는 동생을 회장까지 에스코트해 주시다니, 상냥한 오라버니이시군요? 부러워라~”
그 반대거든. 파트너가 없는 오라버니를 회장까지 에스코트해 준 상냥한 동생이거든. 왜 당연히 내 쪽이 파트너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왠지 반박하기도 귀찮았다.
어차피 내가 뭐라고 하든 그들은 본인들 좋을 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삐딱하게 서서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낸 영애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저렇게 파드득 떠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몰려든 영애들의 추근거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은근슬쩍 교태를 부리며 달라붙는 영애도 있었는데, 아슬란은 아주 능숙하게 그 손길을 피했다.
“이제 진짜 파트너를 고르셔야죠.”
“당연히 저를 골라 주시겠죠?”
“무슨 소리들을 하시는 거예요? 당연히 저 아니겠어요?”
“그 목걸이, 켄벨 영식께 받으신 거라면서요? 파트너는 이미 정해지신 거 아니었나요? 저기 켄벨 영식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어, 어머. 약혼한 사이도 아니고 그게 무슨 상관이죠? 춤 한 번 추겠다는 건데,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요?”
“문제죠. 신의를 저버리시다니!”
“목걸이에 신의라니, 이젠 별 트집을 다 잡으시네요. 아무리 절 깎아내리시려고 해도, 아슬란 님과 첫 왈츠는 제가 추게 될 거예요!”
……카사노바?
처음에는 의자왕인 건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정작 당하는 본인이 조금이라도 영애들과 닿기만 하면 싸늘하게 식어 버린 눈빛을 했으니까.
그렇다고 차마 뿌리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건지 몸짓만으로 피하는데, 과연 회피력이 만렙이었다.
‘이래서 날 파트너로 데려온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