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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39화 (3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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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메이커 39화

진작 말했으면 흔쾌히 도와줬을 텐데 왜 사춘기 아들 같은 발언을 하면서 튕긴 건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도 곤란해 보이는데, 하여튼 솔직하지 못한 것도 집안 내력인가.

나는 대체 왜 아슬란의 인기가 이 지경이 된 건지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가 인기가 많을 조건이긴 하지만 영애들이 이렇게나 자존심을 버려 가면서까지 유혹하고 구차하게 매달릴 정도인 걸까? 심지어 치근대며 달라붙는 모습에서 광기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혹시 이거…….’

샬럿이 황태자를 비롯한 외모, 실력, 권력이 출중한 상위권 남자들을 다 어장 속으로 끌어들이는 바람에, 유일하게 남은 아슬란에게 인기가 다 몰린 거 아니야? 그는 샬럿의 어장 속에 없었으니 말이다.

확실히 샬럿 어장 속 남자들을 모두 제외하고 나면 가장 조건이 좋은 게 바로 아슬란이었다. 그마저 놓치게 되면 그녀들 기준으로 괜찮은 남자가 없는 거였다.

‘그럴듯하네.’

나는 그가 시베리아 벌판처럼 냉기를 풀풀 풍기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대로 빠져나가야 할지 끼어들어야 할지 판단력이 서지 않는 탓이었다. 서로 전혀 간섭할 사이도 아닌데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고…….

‘어?’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어떤 영애가 조그만 크리스털 병에 담긴 무언가를 술잔에 떨어트리는 것을. 그리고 병을 등 뒤에 감추고 망설임 없이 아슬란을 향해서 다가왔다.

‘이런 미친? 그건 너무 나갔잖아!’

소설의 힘인지 뭔지 영애가 고개를 푹 숙이기만 했는데도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저게 뭐야! 무슨 코난 범인도 아니고!

그 영애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미소가 음침했다. 뭔가 일을 저질러도 단단히 저지를 것 같았다. 내 소설 엑스트라가 이렇게 무서울 일인가?

그러고 보니 있었다. 드레스 속에 약 같은 걸 숨겨 와서 황태자의 술잔에 타는 엑스트라가 있기는 있었지. 혹시 그것도 너였니……?

어쩐지 눈빛에서 광기마저 느껴진다 했더니, 정말 물불 가리지 않네.

‘아일라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결국 나는 끼어들었다. 도저히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오라버니는 제가 오늘 하루 독점하기로 했거든요.”

나는 정말 아쉽다는 듯 말하면서 아슬란의 팔짱을 꼈다. 착한 동생 둬서 다행인 줄 알아라. 내가 악녀의 명성을 철저히 이용해 줄 테니까.

내가 갑작스레 신체 접촉을 하자 그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눈치는 빠른 모양인지 다행히 내가 하는 대로 얌전히 있었다.

평소처럼 정색하면서 막말할까 봐 좀 걱정했네. 나는 그 기세를 몰아 시야 가림용으로 가져온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오라버니도 참 너무하시네요. 왜 제게 먼저 이렇게 아름다운 영애들을 소개해 주시지 않았죠?”

나는 내 시선이 닿을 때마다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영애들 한 명 한 명을 눈으로 천천히 훑었다.

그리고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어떤 영애를 만나게 되시든 제게 먼저 소개해 달라고요. 우리 메르텐시아 가문의 명성에 걸맞은 영애인지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겠다고 그리 누누이 일러 드렸는데, 또 잊어버리셨죠?”

그런데 이건 뭐…….

나는 그렇게 말끝을 늘이며 나보다 작은 영애들을 철저히 내려다보았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우리 오라버니에게 개수작을 부려? 하는 시선으로 말이다.

그리고 멈칫거리는 그녀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피식하고 웃었다.

‘와, 내가 생각해도 재수 없다.’

내 비웃음에 영애들의 표정이 잠시 꿈틀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재수 없게 굴어도 두려움이 먼저인지, 하나같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슬란과 결혼하면 이렇게 무시무시한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단다. 그러니 일찌감치 그냥 포기하렴.’

그런데 이쯤 되면 물러설 줄 알았던 영애들은 생각보다 강적인 모양인지 움찔거릴 뿐 아무도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설마, 여기서 더?

아니, 내가 꼭 이렇게까지 아픈 곳을 후벼 파야 하는 건가? 서로 상처밖에 남지 않을 텐데 왜 포기하지를 못하니…….

……어쩔 수 없나.

이왕 도와주는 거, 나는 아주 철저하게 악역을 자처하기로 했다.

나는 내게 팔뚝을 내주고서 멀뚱멀뚱 서 있는 아슬란을 향해서 물었다.

“그래서, 오라버니는 어떤 분을 제게 소개해 주실 거죠? 기대되네요.”

“아무도…….”

“어머, 제가 그분께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서요? 그럴 리 없잖아요. 그냥 가볍게 차 한잔 마시려고 하는 거니까 마음 편히 말씀해 주세요.”

나는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단다, 하는 다분히 의도적인 질문을 던졌다.

다행히 아슬란은 그냥 공작가 후계자가 된 것은 아닌지, 눈치가 생각보다 빨랐다. 그는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쐐기를 박았다.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판단했다.”

“그럼 아무 사이도 아니신 건데 이렇게까지 상대해 주시는 건가요? 아직도 이렇게 마음이 약하셔서 제가 하나하나 챙겨 드려야 한다니깐.”

뭐든 하다 보면 느는 법이다.

처음에 국어책과 다름없던 악녀 연기도 이젠 꽤 능숙하게 대사들이 툭툭 튀어나오잖아. 킬리안이 지금의 날 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였다.

악녀 연기에 심취한 나는, 한술 더 떠 깔깔 웃음을 터트리며 영애들에게 말없이 은근한 시선을 던졌다.

‘너희는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계속 여기에 남아 있을 생각이니? 안쓰럽게’라고 말하는 듯 측은지심이 담긴 눈빛. 이건 아무리 철면피라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사실 본인들이라고 해서 모를 리가 있겠는가. 아슬란이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괜히 못 먹는 떡 찔러나 보는 거지.

“싫다는데 집요하게 매달리는 건, 때론 범죄가 될 수도 있답니다.”

내 말에 영애들은 ‘그게 네가 할 말이냐?’ 하는 기가 막힌 얼굴을 했지만 나는 뻔뻔할 수 있었다. 어차피 황태자를 쫓아다닌 건 진짜 아일라였지, 내가 아니었는걸?

내가 당당하게 응수하자, 대부분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그만 물러서려고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딱 한 명, 약을 탄 술잔을 들고 있는 영애의 기색이 영 좋지 못했다. 술잔에 담긴 포도주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길에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쟤 좀 위험한데…….’

범죄라는 말에 제 발이 저려 오히려 분노에 타오르고 있는 건가?

그에 황당하긴 했으나, 가끔 사고의 전개가 상식을 훨씬 웃도는 사람도 있는 법. 아무래도 그녀는 조만간 뭔가 저지를 것 같았다.

나는 아슬란의 팔짱을 놓고 잠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뭐, 뭐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다가올 줄은 몰랐는지, 영애는 움찔 떨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등 뒤로 감춘 것을 숨기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더 빨랐으니까.

“영애.”

나는 영애의 등 뒤로 팔을 쭉 뻗어 그녀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러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파드득 떨었다.

“아, 아니에요. 이, 이, 이건……!”

“쉬이, 괜찮으니까 진정해요. 소란 피울 것 없잖아요?”

이런 자세를 취하다 보니 서로 끌어안는 것처럼 바짝 밀착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귓가에 조곤조곤 상냥한 말투로 속삭이자 영애는 사시나무 떨듯 덜덜거리기 시작했다.

“영애는 아직 아무런 짓도 저지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

아무리 그녀가 날고 기어 봤자 아일라의 악명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악녀의 오빠에게 수작을 부리려다가 걸렸으니 이젠 죽겠구나 싶겠지.

나는 겁을 먹고 애처로울 정도로 파들파들 떠는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떼어 내고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아까까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던 얼굴이 드러났다.

스쳐 지나가면 인상에 남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인상이었지만, 황금빛 노을을 닮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뭐야. 지금 보니 눈을 덮는 앞머리에 가려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거였군.

순간, 나도 모르게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했더니 이렇게 예쁜 눈동자를 숨기고 있었네.”

“……네?”

그리고 하자마자 후회했다.

앗, 망할. 말하고 보니 개수작이잖아.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도 아니고 이건 무슨 쌍팔년도 작업 멘트야.

내 무의식이 멋대로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하지만 한 번 말을 뱉은 이상, 여기서 갑자기 말을 돌리면 이전보다 더 이상한 분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냥 미친 척하고 저질러?’

어쩔 수 없지. 이왕 이렇게 됐으니 뻔뻔하게 응대하기도 했다.

“예뻐, 충분히. 가리지 마요.”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칭찬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윤하늘이었던 시절에 밥 먹듯이 하던 것이었으니까 악녀 연기보다 쉽지.

“이대로 감옥에서 썩기엔 아까운 눈인걸? 제 안목은 높으니까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을 더 아끼도록 하세요. 영애는 사랑받을 만하니까.”

으윽, 내가 한 말이지만 겁나 느끼해. 하지만 여기서 자신의 한 말에 몸을 비틀며 괴로워할 순 없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오만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반대쪽 손에 들린 술잔을 뺏어 들었다.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로 할게요.”

좀 더 반항할 줄 알았는데 영애는 생각보다 순순히 손에 힘을 풀었다.

내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넋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하긴, 내가 좀 시공간을 뒤트는 오글거림이긴 했지.

‘어, 잠깐.’

오글거리는 게 생각보다 공격력이 높았다. 설마 이래서 소설 속 인물들이 너도나도 세기말 대사를 하는 거였어? 상대를 무력하게 만들려고?

……뭐야, 설득력 있잖아.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나는, 손쉽게 가져온 술잔을 살짝 들어 보이며 찡긋 윙크까지 해 봤다. 그러자 영애가 숨 쉬는 것도 잊고 호흡을 멈췄다.

‘상상 이상의 파괴력…….’

그녀가 살짝 숨을 헐떡거리며 수치심에 얼굴까지 붉히기에, 오그라든 주먹으로 한 대 맞을까 봐 괜히 겁먹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럼 오라버니와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영애들. 즐거웠어요.”

그리고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다음에는 꼭 저를 잊지 말아 주세요! 아뇨 저를 잊지 말아 주세요! 아뇨 저를……!’ 하고 애절하게 붙잡고 늘어지는 영애들을 떨쳐 내고 겨우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사람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오자마자 아슬란의 팔짱을 놓고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아슬란 님?”

내가 말끝을 올리며 빈정거리자, 아슬란의 얼굴에 드물게 표정이 나타났다.

그는 살포시 눈썹을 찌푸리며 내 시선을 피하더니 웅얼거리듯 변명했다.

“……멋대로 부르는 거다.”

“뭐, 그럴 거 같긴 했어요.”

저 철벽남이 그렇게 부르라고 시켰을 리가 없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한 뒤에 그럼 이만, 하고 물러나려고 했다. 아슬란이 갑자기 내 어깨를 턱― 하고 붙잡지만 않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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