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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40화 (40/131)

# 40

악녀 메이커 40화

“뭐죠?”

그는 본인이 붙잡아 놓고서도 화들짝 놀라 손을 제 품에 끌어안았다.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는 것도 잠시, 다시 무표정하게 돌아와 진홍색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무리 성격이 파탄 났어도 인형 같은 얼굴로 저러니까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망할 얼빠 같으니.

“말씀하세요.”

착한 나는 그의 잘빠진 얼굴을 감상하며 차분히 기다려 주기로 했다.

“……다.”

“네? 못 들었는데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되물었다. 무슨 아기가 옹알이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입술은 여전히 달싹거리고 있었다. 오물오물. 오물오물.

‘예쁘긴 더럽게 예쁘네.’

그런데 아슬란이 사람 속 터지게 그러고 있어도 짜증이 전혀 안 나는 나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함부로 막말을 툭툭 뱉을 땐 진짜 한 대 쥐어 패고 싶었는데,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얌전히 있으니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밖에 눈에 안 들어왔다.

‘하긴, 사람은 미워하되 얼굴은 미워하지 말란 말도 있지.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아슬란은 각오를 다진 듯 소심하게 내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이건 또 무슨 귀여운 짓이야 하고 내가 속으로 생각하도 있을 때,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고…….”

뿌우우우―

“제국의 찬란한 영광되시는 베르너 칼 모하메드 레테 전하와 샬럿 안젤로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뿔피리 소리와 문지기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주인공들 납셨다는 소리였다.

어휴, 시끄러워.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아슬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네? 죄송해요. 또 못 들었어요.”

“…….”

아슬란은 내 옷자락을 놓고 침묵했다. 아무래도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두 번 못 들었을 뿐인데 왜 그렇게 포기가 빨라?

‘뭐, 캐물을 생각도 없지만.’

가만 보면 그도 말수가 참 적은 편인 것 같다. 그래도 공작의 후계자인지라 사교성이 아예 없진 않던데, 딱히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메르텐시아 공작처럼 마음에도 없는 말은 잘하면서 정작 필요한 말은 못하는 타입인가?

나는 아슬란을 빤히 보다가, 이내 신경을 끄고 주인공들을 돌아보았다.

베르너는 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뭐라고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가면 같은 미소가 아닌 것을 보니, 상당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진짜 버티기 힘들었는데, 저 얼굴도 계속 보니 적응이 되는 것 같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동시에 베르너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난 연회 내내 나만 보면 벌레라도 본 듯이 경멸하더니 오늘은 어쩐지 미소 짓고 있었다. 물론, 거만하기 짝이 없고 입매가 비틀린 비웃음이었다.

“……그대들이 자리를 밝혀 주어 기쁘군.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공표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음…….

왠지 저 대사,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데. 나는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생각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한데 뭔가 스멀스멀 불길함이 밀려왔다.

사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황태자가 하고 싶다는 말이 있다는데 당연히 모두가 주목하겠지.

베르너는 회장의 중심에 서서 귀족들을 쭉 둘러보다가 갑자기 시계를 꺼냈다.

음? 시계?

“아홉 시 정각까지 앞으로 10초.”

그러더니 다시 나를 보고 웃었다.

‘뭘 의기양양해하고 있어?’

미친 건가? 하고 내가 중얼거리고 있자니, 그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샬럿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는―

“지금 여기에, 내 심장을 빼앗아 간 사람이 있다. 제국력 642년 루노스의 달 20일, 오후 아홉 시 내가 그녀에게 심장을 바치기로 한 시간.”

―세기말 고백을 시작했다.

“샬럿 안젤로, 오늘부터 그녀를 내 영원한 심장으로 공표하는 바이다.”

“……!!”

터져 나올 뻔한 비명은 가까스로 참았으나, 얼굴이 무참하게 찌그러지는 것까지 참을 길이 없다. 나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부채를 펼쳐 필사적으로 내 얼굴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저 공포의 주둥이는 도저히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심장은 하나뿐이야. 그대들이 뭐라고 하든 내 심장이 멎는 그 순간까지, 아니 다음 생에서도 절대 그녀를 품에서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 그만.

“영혼을 다 바쳐서.”

야 이, 미친놈아! 어디 가서 내 소설 남자 주인공이라는 말하지 마라! 너 때문에 동네 창피해서 진짜! 아주 그냥 현수막까지 걸지그래?!

와, 지금의 나의 오글거림은 황태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10년 전 나는 대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닌 걸까? 어떤 사고 회로를 거쳤기에 저딴 세기말 공개 고백을 떠올린 걸까. 왜 저게 멋있어 보였지?

왜 샬럿은 그에게 욕을 하며 따귀를 때리지 않고 몸 둘 바를 모르며 기뻐하는가. 왜 다들 술렁거리면서도 은근히 부럽다는 기색을 내비치는 건가. 상황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썼으니까 그렇지, 으으…….’

자업자득이 괴롭다.

어쩐지 싸하더라니, 오늘 이 고백은 소설에 등장하는 부분이었다. 심지어 아일라가 나오기는 하는데 그냥 부들부들 떨다가 도망치는 부분이라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그냥 내 무의식이 기억에서 필사적으로 지우려고 했던 것 같다.

“만약 감히 방해하거나 내 심장을 건드리는 자가 있으면…….”

베르너의 새파랗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나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이 바닥에서 발·도·못·붙·이·게 해 줄 수 있어.”

그의 대사에는 점이 있었는데, 점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랬다.

‘황태자 암살하고 싶다…….’

죄목은 살아 숨 쉬는 수치 죄.

지금 내가 작가가 아니라는 게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원래 있던 세계라면 펜과 종이만 있어도 없던 사람으로 만들 수 있거늘.

저놈을 지금 죽이지 못하면 내가 수치스러워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가 날 수치사로 죽이려고 하는 걸 제외하고는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으니, 괜히 섣불리 나섰다간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애초에 남자 주인공을 죽이고 싶다고 해서 죽일 수 있는지 모르겠어. 악녀가 악녀답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루프를 일으킬 지경인데, 남자 주인공을 죽이면 세계가 가만히 있겠어?’

그런데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해봐야 알았다.

베르너를 죽이면 훗날의 가장 큰 원흉을 제거하는 것 아닌가? 킬리안에게 부탁하면 아마 흔적도 없이 제거할 수도 있지.

‘아냐, 명색이 남자 주인공인데 그렇게 쉽게 죽어 줄 리가 없지.’

나는 자아 분열을 일으키는 것처럼 같은 고뇌를 반복했다. 세기말 고백이 충격은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던 과격한 충동이 불쑥불쑥 이는 것 보니…….

그런데 지금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만약 루프가 일어나면 저 세기말 고백을 또 들어야 한다는 거였다.

‘저걸 또 들으라고……?’

나는 못한다. 안 하련다.

창백하게 질린 나는 이번만큼은 절대 루프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어,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아일라가 정확히 어떻게 했더라? 베르너의 선전 포고를 듣고 그대로 등을 돌려 연회장 밖으로 달려 나갔던가? 그리고 속으로 ‘가만두지 않겠어!’ 하면서 독자들에게 범행을 예고했었지.

회장에 남겨진 샬럿은 모두의 환호와 관심 속에서 축하를 받았다.

몇몇 귀족들은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그래 백합꽃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내심 생각하게 되고.

그런데.

‘생각해야 하…… 는데?’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래 작가인 내가 <백합 아가씨> 소설에 나타나고자 했던 의도는 이랬다.

‘비록 자작가의 딸이지만 사랑스러운 영애, 샬럿. 감히 누가 그녀를 거부할 수 있을까! 두 연인의 찬란한 미래와 제국의 번영에 축배를!’

분명 이런 느낌으로 묘사했을 텐데, 생각보다 귀족들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별로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어째 나를 흘끔거리는 귀족도 몇몇 있는 것이…….

‘……날 동정하고 있어? 엥? 아닌데, 한 명도 빠짐없이 다들 꼴좋다고 날 보고 비웃어야 하는데.’

혹시 지난 연회 때 샬럿에게 전부 쏠려야 했던 관심이 내게도 일부 쏟아져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때 이후로 샬럿은 백합꽃이라고 불리며 사교계의 중심에 우뚝 서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황녀가 코델리아가 내 드레스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날 동정하는 건 비단 몇몇 귀족들뿐만이 아니었다. 문득 샬럿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가련하게 눈썹을 늘어트리며 나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눈물마저 글썽거린다. 내게 해맑게 인사했던 저번과는 확연하게 다른 태도였다. 아일라가 베르너에게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는 말을 이제야 들은 모양이었다.

‘샬럿의 착한 오지랖이 이렇게 아니꼬웠던 적은 처음이다…….’

천년의 사랑도 싸늘하게 식을 것 같은 고백을 듣고, 내가 상처받았을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 좀 알려 줘.

베르너고 샬럿이고 둘이 좋아 죽으면 서로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하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까지 날 의식해서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한 명은 선전 포고하고, 한 명은 동정하고. 동정할 거면 돈으로 주든가.

‘그러니까, 여기선 그냥 도망가면 되지?’

이 끔찍한 곳에서 곧바로 벗어날 수 있다니, 그간 겪은 루프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조건이었다.

망설임은 사치였다.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대로 물러나기엔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왜 저딴 세기말 고백을 하는 놈에게 차여야 하는 거지? 왜 단어 사이에 점을 붙여 강조하는 놈에게서 도망쳐야 하는 거냐고?

‘제대로 도망가기만 하면 다른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않나? 악녀라는 것만 유지하면 되는 거잖아?’

이미 내가 지난 루프 때 구축해 놓은 내 모습과 소설 속 아일라와 달랐다. 게다가 나를 동정하는 귀족들도 생겼을 정도로 흐름이 달라졌는데 똑같이 행동하는 것도 이상했다.

자, 생각해 보자.

소설에서 아일라의 역할이란?

첫째, 악녀.

둘째, 샬럿과 베르너를 이어 준다.

내 추측이지만, 이 두 가지만 지키면 아마도 루프는 일어나지 않는다.

베르너를 사랑해서 어떻게든 그와 잘되고 싶어 안달복달하며 매달리는 것도, 결국 다 부수적인 거다. 그건 어차피 두 주인공을 이어 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으니까.

‘해볼까? 저질러 버려?’

내가 무도회 첫날에 차마 하지 못했던, 그 지극히 악녀다운 만행을?! 그리고 소설과 달리, 지금 내게는 황녀님의 무적의 황금 패가 있었다!

나는 코델리아 쪽으로 홱 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이미 훨씬 전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시선이 허공에 딱 하고 맞물렸다.

코델리아는 내 맹렬한 기세를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말없이 웃었다.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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