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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41화 (41/131)

# 41

악녀 메이커 41화

좋아, 허락받았으니 망설이지 않는다.

나는 대장부의 기백으로 성큼성큼 샬럿과 베르너에게 향했다. 내 씩씩한 걸음에 귀족들이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갈라졌다.

다른 사람 앞에선 여전히 소심증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베르너 앞에서는 철저히 악녀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건 이미 연기가 아니거든.

제국의 찬란한 영광되시는 어쩌고…… 하는 인사는 생략했다. 어차피 그런 인사치레는 저쪽에서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뭐, 애초에 내 존재 자체를 바라지 않는 것 같지만.

“전하, 제가 지난번엔 미처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 같아 무례를 무릅쓰고 불쑥 찾아왔습니다.”

나는 대놓고 나를 경계하는 베르너를 향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러자 베르너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눈웃음을 코웃음으로 받아치다니, 라임 쩌는데?

“그대가 무례라니, 못 보던 사이 웃기는 표현도 쓸 줄 알게 되었군. 언제는 무례가 아닌 적이 있었나?”

그러자 베르너는 샬럿을 제 등 뒤로 숨기면서 말했다. 얼마나 새파랗게 달아오른 눈으로 쏘아보는지 레이저 빔이라도 나오는 줄 알았다.

“과연, 전하십니다. 그동안 열심히 사교술을 연마한 끝에 상황에 어울리는 적절한 농담도 할 줄 알게 되었거든요. 제 소소한 노력을 알아봐 주시다니 정말 기쁩니다.”

내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자, 베르너의 표정이 황당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왜 농담까지 꺼내서 분위기를 환기해야만 했는지 과장되게 한탄을 했다.

“아니, 이렇게 좋은 소식을 전하시면서 너무 날이 서신 것 같아서요.”

“뭐?”

“그렇잖아요?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하신다니, 세상에 정말 살벌하셔라. 제가 무얼 했다고…….”

나는 눈을 새초롬하게 뜨면서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그리고 샬럿 쪽을 흘낏 응시하자, 그녀는 겁을 먹은 기색으로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베르너는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허튼짓할 생각하지 마라.”

“예? 제가요? 무슨 짓을?”

나는 순진무구한 샬럿을 흉내 내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가증스럽게 어깨를 축 내리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베르너 입장에서는 내가 갑자기 피해자처럼 나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

“꺼져.”

뭐? 꺼져? 이 자식이 막 나가네.

그냥 좀 쳐다봤을 뿐인데, 그는 걸음을 옮겨 샬럿을 내 쪽에서 아예 보이지도 않게끔 숨기고 있었다.

네 사랑스러운 연인도 제 의사가 있을 텐데 과보호도 그 정도면 의처증이거든? 물론, 내가 갑자기 나타나 겁을 좀 주긴 했지만 너무한 것 아니니. 예상했던 것과 한 치도 다름없는 반응이라 사람 뿌듯해지게.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 그대의 악랄함은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는데 어디서 발뺌할 셈이지?”

“제가 한때 전하께 홀딱 반해서 물불 가리지 않기는 했었죠. 인정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하의 눈에 들기 위한 노력이었지, 누군가에게 딱히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잖아요?”

지금까지 아일라가 한 짓 중에 가장 심했던 건, 약혼한다고 설치다가 실패한 것 정도인데 말이야.

물론, <백합 아가씨> 속 아일라 본인은 실제로 샬럿을 해치기 위해 날뛰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소설에서는 그러다가 들통 나서 베르너에게 제거당하는 바람에 내가 이 고생을 하는 것 아니야.

저 자식은 진짜 아일라를 이 땅에서 발도 못 붙이게 했다. 저승 땅으로 아주 보내 버렸지. 심심하지 말라고 가족들까지 몽땅 포함해서.

하지만 앞으로 내가 있는 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악행들이기에 난 찔릴 게 없었다.

“뭐, 좋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바라신다면 이 마녀는 그만 사라져 드리지요. 그런데 제가 그냥은 갈 수가 없어요, 전하. 안타깝게도…….”

나는 정말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린 뒤에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셨거든요. 이유 없이 날 싫어하면, 그럴 만한 이유를 만들어 줘라.”

“……이유 없이? 하,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러는 것 같아? 메르텐시아 영애,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

“어머나, 제게는 터무니없는걸요? 저는 아무런 짓도 하지도 않았는데, 세상에 이리 억울할 수가 있나. 억울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기정사실로 만들어 주고 싶지를 않나.”

나는 나긋한 킬리안의 말투를 흉내 내며 흥얼거리듯 말한 뒤에 부채로 쥐고 있던 술잔을 톡톡 쳤다.

부채 끝에 달려 있던 깃털이 내 손짓을 따라 유연하게 살랑거렸다. 베르너의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내가 쥔 술잔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하께서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는 듯한데…… 왜 제가 당연히 안젤로 영애에게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거라 여기시는 건지?”

정작 나를 찬 건 네놈인데.

나는 삐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표독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쥐고 있던 술잔을 베르너의 얼굴을 향해 조준했다. 샬럿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며 보호하느라 정작 본인은 무방비했다.

촤악―

“허어어억!”

“헉……!”

“…….”

“…….”

주변에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연회는 정적으로 가득 차고 악기를 다루던 연주가들도 경악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베르너의 곁을 지키고 있던 호위 기사 레녹스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검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고, 샬럿은 그대로 돌처럼 경직되었다.

똑. 똑.

포도주가 황태자의 머리카락과 턱을 타고 떨어지는 소리만이 연회장에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얼굴에 술 뿌리기, 캬아.

‘이게 바로 악녀의 정석이지.’

혼자 뿌듯하게 웃고 있는데, 생각해 보니 저거 약 탄 술이었다. 앗, 이런. 아무 생각 없이 들고 왔네. 아무리 같잖은 놈이라도 황태자인데 먹으면 큰일 나는 거 아니야?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

내가 정적을 깨고 걱정스럽게 덧붙이자, 베르너는 별 정신 나간 여자를 다 본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입가에 닿은 술을 퉤퉤 뱉었다.

야, 인마. 더럽게…….

하긴 악녀가 얼굴에 냅다 뿌린 뭔지도 모를 술을 왜 먹겠어. 다행히도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지?”

그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을 한 글자씩 짓씹어 뱉듯이 말했다.

만약 이 상황에서 샬럿에게 술을 뿌렸으면 눈이 뒤집혀서 덤벼들었을 텐데, 당하는 게 자신이라 그런지 대응이 침착했다.

원래 저런 놈이었다. 샬럿에 한해서만 이성을 잃는 놈. 그래서 내가 너를 응징한 거란다. 깔깔.

옷소매로 얼굴을 훔치고 있는 모습이 참 처량 맞아 보였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샬럿이 그의 옆에서 쩔쩔매며 손수건으로 베르너의 얼굴을 닦아 주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르너는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그 작은 손을 떼어 낸 뒤, 샬럿을 다시 자신의 등 뒤에 감추며 말했다.

“됐다. 난 괜찮으니 그대는 숨어 있어. 레녹스, 샬럿을 지켜라.”

얼씨구? 기사한테까지 시켜?

누가 보면 내가 손 안 대고 샬럿을 해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자인 줄 알겠다. 정작 내 신체 능력은 베르너나 레녹스 같은 괴물들과 달리, 평범한 일반인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내게 위협받은 일도 없는 샬럿을 어떻게든 보호하고자 아등바등하는 베르너를 대놓고 비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모르시다니…….”

나는 내 피조물이 생각보다 더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 같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친히 말로 설명해 주기로 했다.

“제가 화가 난 상대는요.”

나는 부채로 정확하게 내 앞에 서 있는 베르너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하이십니다.”

“……뭐?”

베르너는 내 말을 단박에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아니, 이래도 몰라?

소설에서는 분명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천재 중의 천재라고 설정했을 텐데, 대체 왜 이렇게 못 알아들어?

나는 아이에게 설명하듯 또박또박 힘주어 다시 말했다.

“제가, 실망한 건, 전하시라고요.”

너, 너, 너라고. 이 화상아.

“전 안젤로 영애에게 아무런 악감정도 없는걸요? 그녀에겐 전하를 사랑하고 사랑받은 잘못밖에 없는데, 왜 제가 안젤로 영애에게 수작을 부릴 거라고 멋대로 이야기를 전개하시는 거예요?”

그래, 너는 마음껏 네 상상 속의 위협에서 샬럿을 지켜라. 나는 샬럿을 감싸느라 무방비해진 네놈을 뚜까 패 버릴 거거든.

물론, 상대가 황태자이니 어디까지나 정도껏 나대야겠지만, 가문의 이름도 있겠다, 황녀 언니의 든든한 지원도 있겠다, 이 정도는 수습할 수 있었다.

“소녀의 작은 심술, 전하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라 믿어요. 실연을 당해 눈에 뵈는 게 없는데, 저렇게 가녀린 영애를 해칠 거라는 모함까지 하시다니. 저는 안젤로 영애를 보고 사랑스럽다는 생각밖에 한 적이 없는데 이렇게 적으로 만드시는군요.”

나는 아까까지 부렸던 온갖 가증을 다 떨쳐 내고 표정을 싸하게 굳혔다.

그리고 고저 없는 무뚝뚝한 말투로 말하다가, 마치 상처를 입어 더는 말을 이어 나갈 수 없는 것처럼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전하께 남아 있던 미련까지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기분이네요.”

여기서 눈물이라도 터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연기력은 내게 없었기에 그대로 등을 돌렸다.

“이제 더 이상 방해하지도, 전하의 심장을 건드리지도 않겠습니다. 이걸로 끝이에요.”

그리고 목이 멘 것처럼 한 박자 쉰 뒤에 무덤덤하게 덧붙여 말했다.

“……그럼 두 개의 심장과 영원히, 다음 생에서도 행복하시기를.”

나는 막판에 황태자만 완전히 나쁜 놈을 만들어 놓고서 그대로 유유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 누구도 나를 붙잡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 * *

‘후…… 속 시원하네!’

물론, 공적인 자리라 모든 것을 마음껏 쏟아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당장 암살 의뢰를 넣고 싶었던 무시무시한 살기는 가셨으니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루프가 일어나면 다음번엔 그냥 베르너 놈의 따귀를 날려 버려야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킬리안에게 부탁하면 차지게 따귀 때리는 법 정도야 가르쳐 주겠지. 그는 뭐든지 다 할 줄 아는 아주 유능한 집사니까.

‘내가 모두의 앞에서 샬럿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베르너 네놈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말은 한 적 없단다.’

애초에 소설에서 아일라를 죽인 건 베르너였다. 내 적의가 향할 상대가 아주 명확한데, 왜 관련도 없는 샬럿을 건드리겠어?

뭐, 물론 샬럿의 주인공 자리를 뺏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조금이나마 간접적으로 건드릴 수밖에 없긴 할 테지만, 그건 내 생존이 달린 문제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샬럿이 내게 직접 뭔가를 한 것도 아니고, 그녀에게 직접 위해를 가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가 내게 악의를 품는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선의에 가득 찬 천사표 여자 주인공이 그럴 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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