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악녀 메이커 42화
어차피 지금 연회장으로 돌아가도 꼴사나워질 뿐일 테니까 그냥 돌아가는 편이 좋겠지. 일단 먼저 저택에 돌아가서 아슬란 타고 오라고 다시 마차를 보내야겠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누가 날 붙잡지만 않았어도.
“허억…… 헉…… 여, 영애 왜 이렇게 걸음이 빠르십니까…….”
뛰어왔는지 폴랑이 숨을 헐떡이면서 내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호통을 치기에는 어째 너무 절박해 보였다.
“……뭐죠?”
당황한 탓에 생각보다 더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그는 내 치맛자락을 더 꽉 움켜쥐었다. 숨을 고르는 사이 내가 떠나기라도 할까 봐 사전에 차단하는 움직임이었다.
“허억, 헉…… 저를 납치해 주세요.”
아직도 그 소리냐.
거친 숨소리와 뒤섞이니 더 더럽게 들려왔다.
나는 쥐고 있던 부채로 그의 손을 탁 쳐서 억지로 떼어 냈다. 복도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이상한 오해를 받을 뻔했잖아.
“일단, 이리 와요.”
나는 일단 그를 근처의 테라스로 끌고 나갔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었다. 만의 하나라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테라스의 커튼을 빠르게 쳐 낸 뒤에 한숨 섞인 말을 뱉었다.
“폴랑, 혹시 분위기 파악 못한다는 소리 자주 듣지 않아요?”
지금 내가 연회장에서 무슨 깽판을 치고 온 것인지 못 본 것도 아닐 테고.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이 잘도 나온다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마구 고개를 저으면서 단호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아뇨, 지금이야말로 모두에게 보여 줄 때입니다, 영애의 가치를!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전하의 마음을 돌리시는 겁니다! 절 납치해서!”
“관심 없어요.”
“……네?”
내가 예상 밖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폴랑은 기세를 잃고 잠시 주춤했다. 그는 나름 황태자를 들먹이며 쥐고 흔들면 내가 흔쾌히 응할 줄 알았던 모양인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그건 오히려 지뢰라고. 의욕이 바닥을 찍게 만든단 말이야.
“차이면 그걸로 끝이에요. 티끌만큼의 미련도 없습니다. 세상에 남자는 많고, 저는 이렇게 완벽한데 왜 싫다는 사람을 쫓아다니겠어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진짜로 내가 완벽하다고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사실 이런 말을 당당히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차마 말 못할 비하인드가 있었다.
본의 아니게 킬리안에게 매번 자존감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깎아내리며 자존감 도둑질을 하는 게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다. 과거에는 여유는커녕 연신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눈치만 보기 바빴으니까.
그냥 습관이었다.
난 특별할 게 없어. 이 정도는 누구나 하지. 대체 남보다 잘하는 게 뭐야? 쓰레기.
딱히 의식하지 않아도 나 자신을 향해 툭툭 쉽게 튀어나오는 말들.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도 아니었는데, 그럴 때마다 킬리안은 그 말 속에 숨겨진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귀신같이 알아내 다독여 주고는 했다.
그렇게 그의 조건 없는 지지와 격려를 계속 받다 보니, 이제는 점점 자신을 비하하기 힘들어졌다.
그의 지지와 격려에 뜻깊은 감명을 받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창피해 죽을 것 같아서.
그것도 그럴 게, 킬리안이 ‘네가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귀엽기는’ 하고 칭찬을 조르는 아이 쳐다보듯이 본단 말이야.
그 뒤로 나는 킬리안 앞에서 자기 비하 같은 의미 없는 짓은 그만두고, 그냥 뻔뻔해지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 자체는 딱히 변한 게 없는데 주둥이만 자기애가 넘치게 되었다고나 할까. 전염성 강한 남자 같으니.
‘그야말로 킬리안 효과…….’
어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계속 자신을 세뇌하다 보면 언젠가 정말 완벽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폴랑은 본래 소설 속 아일라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많이 변하셨네요.”
“보통이죠.”
그럼 할 얘기는 끝난 거죠?
나는 그대로 폴랑을 등지고 테라스 밖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또 애절한 음성이 나를 붙잡았다.
“메르텐시아 영애, 제발 부탁합니다. 영애 때문에 제 생활이 엉망진창이 되었으니까 책임져 주세요!”
“폴랑, 제가 새로운 취향에 눈뜨게 해 드렸다면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책임져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말뜻이 아니란 거 아시지 않습니까아!”
아. 몰라, 인마.
너야말로 한 번 쓰고 버릴 패였단 말이야. 구질구질하게 왜 이래?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제국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디자인을 계속해 나가면 될 것이지.
“여, 영애께서는 제가 필요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런데 그는 갑자기 충격을 받은 듯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제발 그건 아니라고 말해 주길 바라는 듯했다. 나는 그의 간절함이 보기 힘들 정도로 짠해져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딱히…….”
“제가 얼마나 쓸모가 많은데요?!”
“물론 쓸모야 많겠지만, 그만큼 제약이 많잖아요? 그런 위험 부담까지 끌어안을 생각은 없어요.”
폴랑은 당장 날 붙잡을 생각에 눈이 멀어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위험 부담…… 그렇군요.”
이번에는 대체 얼마나 극단적으로 생각이 치닫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째 불길함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폴랑은 그 말을 입에 담고야 말았다.
“제가 모든 것을 다 포기하면 되는 겁니까? 그러면 받아 주실 건가요?”
……제정신인가. 여태까지 쌓은 부와 명예, 명성을 버리고 내게 오겠다고?
대체 내 드레스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기에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건지 이쯤 되면 궁금할 정도였다.
나는 부담감 때문에 사정없이 그를 밀어내는 것을 그만두고 한번 진지하게 물어봤다.
“진정으로 제 드레스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여기시는 건가요?”
“물론, 그 정도는 아니죠.”
“…….”
내가 그대로 미련 없이 등을 돌리자, 폴랑은 그대로 바닥을 뒹굴 기세로 내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옷 늘어집니다. 놓으세요.”
“제발 끝까지 좀 들어 보십시오! 제 말은, 영애의 한계가 고작 거기까지일 것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한계?”
나는 걸음을 우뚝 멈추고 슬쩍 고개만 돌려서 되물었다. 폴랑은 구명줄이라도 붙잡은 것처럼 마구 고개를 끄덕이면서 필사적으로 말했다.
“저는 제 실력 하나만을 믿고 지금껏 버텨 온 게 아닙니다.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기회를 절대 붙잡고 놓치지 않았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요.”
“내가 그 기회다?”
“네, 그렇습니다.”
“어딜 보고?”
솔직히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 내 어디가 그렇게 대단해 보여서?
그러자 폴랑이 서슴없이 말했다.
“어딜 봐도요. 영애 같은 분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강한 확신을 느꼈습니다, 저는.”
왠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마치, 내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걸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나는 겉으로는 도도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폴랑의 직감은 정확했다.
전에 나름대로 개량한 슈미즈 드레스 외에도 내가 과거를 살면서 관심 있게 보았던 수많은 형태의 드레스들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드레스뿐만이 아니었다.
그 밖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과거 세계의 지식은 오로지 작가인 나만 알고 있었고, 그건 어떻게 이용되든 분명 가치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거기가 끝은 아니실 겁니다. 뭐든 상관없으니 마음껏 펼치십시오. 무엇을 상상하시든 저는 그것을 직접 실현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게 엄청난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인데 나중에 실망하게 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나도 여전히 나 자신을 완벽하게 믿지 못하는데, 네가 어떻게 믿겠다는 건지.
“그래서 그쪽이 얻는 게 있어요?”
내 밑에서 일하면 돈도 명예도 황실 직속 디자이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텐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묻자, 폴랑은 하하, 하고 얼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보다 더 얼빠진 소리를 했다.
“뭐…… 꿈과 열정?”
“…….”
왜 이놈이고 저놈이고 내게 열정 페이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시대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싶다.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 그런 게 만인의 꿈 아니겠습니까?”
아니 거기까지 생각했던 거야?
전에는 고분고분해서 몰랐는데 나보다 더한 놈이었다. 자존감과 자기애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로군.
너무 거창한 그의 미래 계획에 해 줄 말이 없어 빤히 쳐다보자, 폴랑은 꿈을 꾸는 소년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알겠어요, 일단은.”
내가 마지못해 허락하며 그를 부채로 툭툭 밀어내자, 그는 알아서 벌떡 일어나 눈빛을 반짝였다.
“그렇다고 진짜 다 포기하고 오진 마시고요. 이번에 의뢰를 받은 드레스의 작업만 함께하도록 하죠. 뭐, 일손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니 저로서도 나쁜 제안은 아니기도 하고.”
“앞으로도 계속 저와 일하시게 될 텐데요? 동업자 같은 느낌으로 어떻습니까. 계약서를 쓸까요?”
뭘 멋대로 사업을 진행하려고 하고 있어? 나는 의욕에 넘쳐서 미래 계획까지 세우는 그를 일단 진정시키기로 했다.
“섣부른 생각은 하지 마시고.”
나는 부채로 그의 입을 턱, 하고 막았으면서 말했다. 왜 계속 부채를 사용하느냐고 물으면 직접 손대기 싫어서 이러는 게 맞다고 대답하겠다. 참 유용하네, 이거. 앞으로 계속 들고 다녀야겠어.
나는 아까부터 그가 계속 듣고 싶어 했던 말을 순순히 들려주었다.
“해 드릴게요, 납치.”
“…….”
“밤중에 제 집사가 찾아갈 테니, 탑에서 얌전히 기다리세요, 공주님?”
기뻐 날뛸 줄 알았는데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혹시 새삼 겁먹은 건가 싶어서 내가 친히 마녀라는 악명까지 이용해서 농담을 쳐 줬는데도 여전히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었다.
‘뭐야, 사람 민망하게.’
어쨌든, 문어 빨판보다 더 끈질기게 달라붙던 놈이 순순히 물러나 준다니 나야 좋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번에는 진짜 등을 돌려 테라스 밖을 벗어났다.
* * *
홀로 유유히 밤공기를 즐기며 마차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메르텐시아 문장이 새겨진 검푸른 마차 앞에서 이리저리 정신 사납게 몸을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슬란?”
멀리서 보기에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기에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자 아슬란은 홱 하고 나를 돌아보더니 다급한 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와중에도 특유의 무표정인 것이 어쩐지 우스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