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악녀 메이커 43화
“……네가.”
내가?
그리고 그대로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야, 하던 말은 끝까지 해라. 느낌상 별말도 아닌 것 같은데 중간에 뚝 끊으면 괜히 궁금해지잖아.
“……대충 수습은 해 뒀다.”
뭐를? 목적어를 제대로 말해!
일부러 이러는 건가 싶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슬란의 언어 표현은 대체로 다 이런 식이었다.
대뜸 뜬금없는 말을 하기도 하고, 주어 목적어 서술어 무엇 하나를 똑 떼서 말하기도 해서 내 쪽에서 알아서 해석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슬란이 개떡같이 말해도 무슨 말인지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연회장에서 깽판을 쳐 놓고 온 뒷수습을 말하는 거였다.
아무리 공작 영애라고 해도 황태자의 얼굴에 술을 뿌렸으니 보통의 경우에는 책임을 면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나는 황녀 언니를 믿고 저지른 거였는데.’
황녀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아슬란이 괜히 힘들게 수습해 줄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았으니 그로서는 당연한 대처를 취한 것이겠지.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사과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슬란이 갑자기 대뜸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 빨랐다.
“어디 있었던 거지?”
뭐야, 설마 나 기다렸나?
“누구와 잠시 대화 좀 나눴어요.”
“누구?”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그렇군.”
폴랑의 일을 밝힐 수가 없어서 칼 같이 선을 그었다. 그러자 사생활까지 간섭할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아는지 아슬란은 순순히 물러섰다.
“…….”
“…….”
그리고 예정된 정적.
“여기서 뭐 하고 계셨어요?”
나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사실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내가 연회 밖을 나왔다고 해서 그까지 덩달아 나올 필요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여기서 꽤 기다린 눈치인데, 내가 사고 친 것을 수습하고 여기까지 와서 기다리려면 아마 꽤 헐레벌떡 달려와야 했던 것 아닌가?
“……괜찮은 건가?”
아슬란이 내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또 아슬란어(語)를 사용했다.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는 그의 기색으로 눈치껏 알아들었다. 지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공개 실연당해서 상처받고 도망친 걸로 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얼굴에 술을 뿌리며 몇 마디 해주긴 했지만 내가 세기말 고백을 하는 놈에게 차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세상 살기 너무 고단하다.
나는 아슬란에게 대체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민했다. 솔직하게 황태자를 견딜 항마력이 없으니 제발 숨도 쉬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자칫 루프에 영향이 가지 않을까?
내가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때, 아슬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왠지 평소보다 낮고 화를 눌러 참는 듯한 음성이었다.
“로맨스 소설에서도 그런 고백은 안 나온다. 나라면 죽어도 안 써.”
“…….”
“세상에 그런 소설이 있으면 불쏘시개로 써 버리는 것도 아깝겠군.”
“…….”
그런 소설을 제가 썼답니다.
대체 갑자기 왜 또 저런 아슬란어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갈비뼈를 묵직하게 때리고 있었다. 그, 그만. 팩트 폭력을 멈춰 주세요…….
내가 쓴 글을 스스로 욕하는 건 괜찮았지만, 남에게 욕을 듣는 건 맞는 소리인데도 많이 아팠다.
나는 아까보다 한층 더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것을 느끼며 되물었다.
“갑자기 웬 소설 얘기예요? 아슬란이 소설을 쓴다는 말은 또 뭐고요?”
내 물음에 아슬란은 묘하게 기분 나빠 보이던 기색을 지우고 내 시선을 비스듬하게 피하며 대꾸했다.
“……만약의 얘기였어. 네가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것 같기에.”
그렇다고 해도 ‘로맨스 소설에서도 그런 고백은 안 나온다.’고 한 발언은 좀 수상한데. 많이 읽어 보지 않은 이상, 할 수 없는 말이지 않나?
“로맨스 소설, 좋아해요?”
“그럴 리가 없잖아.”
아슬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래는 기분 나빠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사람이 갑자기 그러니까 더 의심스러웠다. 가만 보니까 진짜 거짓말 못한다. 겉으로 다 티가 나.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왜 오늘따라 어리숙해 보이지. 아니면 내가 예민한 곳을 건드린 건가?’
아슬란은 자신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는 자각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나는 또 그대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혹시나 하고 물었다.
“혹시, 저 위로해 주는 거예요?”
“…….”
대답이 없다. 시체인가 보다.
“맞나 보네?”
“…….”
나는 두 눈 말똥말똥 뜨고서 시체인 척 구는 그를 보다가, 결국 웃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뭐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슬란이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는 건 아주 잘 알겠다. 내가 그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괜히 시비를 걸기에 인성을 국밥처럼 말아 먹은 줄 알았더니.
‘그냥 솔직하지 못한 거구나?’
하긴, 공작 작위를 물려받을 후계자가 그런 취미를 가지고 있으면 대외적인 이미지에 흠이 가고 뒤에서 비웃으며 물고 뜯을지도 몰랐다.
남들이 멋대로 수군대는 것 때문에 숨기는 게 버릇이 되었을지도. 일부 귀족들처럼 사창가에 가서 여자 끼고 노는 것보다 훨씬 건전한 취미인데 말이야.
“연회장에서 더 할 일 있어요?”
나는 아슬란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물었다. 왠지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가 옷자락 붙잡은 내 손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일단 참석은 했으니까.”
“흠.”
그럼, 같이 돌아갈래요?
나는 마차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실연당해서 위로해 줄 사람 필요해요. 같이 얘기나 좀 나눠요.”
“……술이라도 같이 마시자고?”
“하하, 아뇨.”
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아슬란에게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여 말했다.
“제 컬렉션들 보여 드릴게요.”
* * *
내 곁에 숨은 덕후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 그게 내 피를 나눈 형제라니!
이것 참, 취미를 함께 공유할 수밖에 없네. 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황태자의 세기말 고백과 선전 포고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놈 때문에 오염된 고막과 정신이 상쾌하게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저택으로 돌아와 당황한 듯 눈만 연신 끔뻑이는 아슬란을 이끌었다. 연회장까지 그에게 에스코트를 받았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킬리안은 이른 시간에 저택에 같이 돌아온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예상 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정황인지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파악하고선 물었다.
“술과 안주를 내올까요?”
“와, 눈치 좀 봐.”
귀신이냐고.
새삼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심지어 킬리안은 내게 ‘착하다’ 하고 말하는 듯한 칭찬의 의미가 담긴 미소도 보냈다. 내가 무도회장으로 향하기 전보다는 아슬란과 사이가 가까워졌다는 걸 눈치껏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술과 안주…….’
안주라는 말에 갑자기 허기가 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무도회에 대비하느라 잠깐 식단을 조절하고 있었는데…….
오늘 다녀온 게 마지막 무도회였으니까, 이젠 야식 먹어도 괜찮겠지? 나는 잠시 허공 위를 둥둥 떠도는 음식들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뭐든 원하시는 대로 드십시오. 그동안 잘해 오셨으니 드리는 상입니다.”
상으로 야식을 원 없이 먹게 해 주겠다니 최고였다. 역시 내 집사는 뭔가를 좀 아는군.
“그럼 사양하지 않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킬리안은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 짓더니 그대로 주방으로 향했다. 이미 그는 내 입맛을 속속들이 꿰고 있으니 어떤 음식을 가져와도 최고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곧바로 내 컬렉션들이 전시된 방으로 향했다. 아슬란은 처음엔 몇 번 소심하게 반항하는 듯했으나, 정작 로맨스 소설들로 가득 채워진 내 방을 보자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거의 링테 작가 소설이긴 하지만, 그 외 작가들 한정판도 많아요. 원하시면 뭐든 빌려드릴 수 있고요.”
그 이유는 독서용, 소장용, 포교용으로 3세트 주문했기 때문이지. 친구가 없어서 포교용은 영원히 사용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지금이라도 쓸모가 생겨서 다행이다, 흑흑.
아슬란의 일반인 코스프레를 깨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본인의 정체성을 필사적으로 숨기는 덕후들이라도, 같은 덕후의 곁이라면 방비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법.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여러 책을 둘러보고 있었다. 저러고 있으니까 마냥 인형 같았던 얼굴에 그나마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감상하며 킬리안이 가져온 음식들을 먹었다.
그래도 아직 경계가 심한 것 같으니, 서로의 취향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늘어놓는 건 힘들겠지?
‘그나저나, 링테 작가 소설만은 진짜 거들떠보지도 않네.’
아슬란은 링테 작가 것만 표지조차 제대로 살피지 않고 완전히 외면하고 있었다.
왜지?
로맨스 소설을 아예 싫어한다면 모를까, 링테 작가는 취향을 떠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상당한 실력가인데 말이다. 내 작가님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솔직히 취향이 아니더라도 읽는 순간 멱살 잡고 끌려가는 듯한 필력이 링테 작가의 장점이었다.
취향이니 존중해 주겠지만, 정말 특이하군,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어? 잠깐만.’
나는 그의 행동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멈칫했다. 그리고 그 모순에 관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링테 작가 소설인지 제대로 살피지 않고도 아는 거예요?”
“…….”
책등에 제목이 새겨져 있긴 하지만, 작가 필명까지 새겨진 건 아닌데 대체 어떻게 알았느냐는 거다.
심지어 제목도 아니고 책 표지 색과 재질만 쓱 살피고 지나치는 것 같은데, 어떻게 그게 링테 작가 책인지 알 수가 있지? 다 다른 로맨스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책 디자인도 비슷한 편이고, 웬만한 하드 독자가 아니고서야.
‘로맨스 소설 좋아하는 거 다 들통난 마당에 굳이 링테 작가 소설만 싫어한다고 저렇게 행동으로 티 나게 항의하는 것도 이상하고…….’
“혹시…….”
내가 손가락으로 턱을 쓸며 심각하게 중얼거리자, 아슬란은 덩달아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목울대를 울렸다.
나는 긴장한 그를 향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링테 작가와 친분 있어요?”
나름 내 추리에 자신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숨을 들이쉬었다가 한숨을 쉬듯 내쉰 뒤, 잠시 생각을 고르듯 망설이는가 싶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에요?”
“아니, 맞아. 친구…… 비슷한.”
헐, 미친 정말 친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