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악녀 메이커 44화
그냥 아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친구라니! 나는 꽥 소리 지르며 흥분할 뻔하다가 심장 위 옷자락을 움켜쥐며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손끝을 덜덜 떨면서 아슬란을 향해 뻗었다. 링테 작가 친구라는 이유로 이미 그의 과거의 죄를 전부 용서하고 모든 것을 포용해 줄 수 있었다.
“그, 그, 그분은 잘 계십니까.”
“응, 뭐…….”
그는 내 손길을 슬슬 피하며 대꾸했다. 나를 대놓고 외면하는 시선에 애가 닳았다.
아, 오라버니. 제발 간단하게라도 좋으니까 그분 근황에 관해서 좀 얘기해 주세요. 마지막 작품 나온 뒤 벌써 3년째 소식이 없단 말이야. 내가 3개월 내로 차기작 소식 없으면 진지하게 납치까지 생각해 봤는데…….
“건강하시고요? 아프신 덴 없죠?”
“……응.”
“그런데 왜 잠적하셨죠? 왜?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으셨나요?”
“아, 아무래도 본업이 아니니까.”
“엥, 본업이 아니라고요? 그럼 설마 취미라는 거예요? 그 실력으로?”
링테 당신은 프로보다 더 프로 같은 실력으로 취미라니, 대체 어디까지 완벽해서 날 놀라게 할 셈이지?
“헉,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의 친구라면 귀족이겠네요. 하긴, 그건 귀족의 생활상을 전부 꿰고 있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내용이었어…….”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홀로 감탄하며 놀라워했다.
잠깐, 그런데 귀족이라면 함부로 막 납치했다가는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아쉬워라……. 아무래도 범죄자의 길은 접을 수밖에 없는 듯했다.
내가 시무룩한 얼굴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을 때, 아슬란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주저하다가 겨우 링테 작가에 관한 말을 꺼냈다.
“글을 쓰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곧 작위를 물려받아야 하니까.”
그래? 작위를 물려받아도 남는 시간에 틈틈이 글을 쓰고 출판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긴, 작위를 물려받으면 영지를 다스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지도……. 괜히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지.
“마음 같아선 제가 먹여 살려 드릴 테니, 작위 같은 건 물려받지 말고 글만 써 주시면 된다고 생떼를 부리고 싶지만…… 그분 사정도 제대로 모르는데 제가 그럴 수야 없겠죠.”
내 욕심 때문에 작가님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분도 나름대로 많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겠지. 왠지 섭섭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근황을 들은 것만으로도 어디야.
나는 아슬란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꼭 붙잡으며 애인을 떠나보내듯 아련한 음성으로 말했다.
링테 작가님이 누구인지는 그냥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글 접으실지도 모른다고 하시는데 알아 봤자 괜히 미련만 생기니까, 흑흑.
새벽 두 시의 전남친처럼 구질구질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작가님한테 멋진 독자로 남고 싶단 말이야.
“작가님에게 멋진 작품들 많이 써 주셔서 감사하고, 제가 언제나 응원한다고 전해 주세요. 어떤 길을 걸으셔도 그게 꽃길이시길 바랄게요.”
그는 내가 붙잡은 손을 빼내고 싶었던 건지, 내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손가락을 연신 꼼지락거렸다.
“그래도 좋아하시는 일이라고 하셨으니까, 작가님이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언제든 돌아오셔도 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슬란은 이어지는 내 말에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그러고는 깜짝 놀란 토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떨궜다. 흐트러지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귓등이 붉었다.
“……고마워.”
“아뇨, 작가님한테 전해달라고요.”
대체 왜 그가 고마워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 * *
베르너는 최근 들어 연이어 같은 꿈을 꿨다.
눈을 뜨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찝찝한 꿈이었다. 오직 귓가에는 꿈에 나타난 여자의 피 끓는 절규만이 생생한, 그런 꿈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흐릿해서 인식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여자의 얼굴이 날이 지날수록 점점 더 생생하게 보였다.
핏물보다 더 붉은 머리카락이, 핏줄이 터져 흉하던 녹색 눈동자가, 피딱지와 멍으로 본래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었던 이목구비가.
처참한 몰골을 하고서 저주를 내리는 끔찍한 여자를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그런 꿈을…….
―그래야 이렇게 죽어간 저를 조금이라도 기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꿈은 하루하루 더 선명해져만 갔다.
여자의 입은 죽어 가면서도 끝까지 멈추지 않고 나불댔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엉망이 된 몰골과 갈라진 목소리로 사랑한다,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다, 깔깔 웃으며 저주를 퍼부어 댔다.
“하, 빌어먹을!”
베르너는 욕설을 읊조리며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담당 시녀가 또 악몽을 꾸셨냐고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으나, 그는 건성으로 손을 휘저어 그녀를 쫓아냈다.
“대체 이 꿈을 언제까지…….”
끔찍한 고문이라도 받은 듯한 몰골이었지만 꿈속의 여자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유구한 역사와 막대한 부, 기세등등한 세력을 자랑하는 공작 가문을 앞세워 끈질기게 구애하는 골 빈 여자.
필요했기에 조금 가식적으로 대해 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홀딱 반해 멋대로 자신을 쫓아다니는 줏대 없는 여자.
‘……아일라 메르텐시아.’
대체 왜 하필이면 그 여자가, 하고 자문해 봐야 나오는 답은 없다. 하지만 이 정도의 끈질김이라면 한 번쯤 심각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었다.
베르너는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레테 제국의 주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 만들어진 베르너의 성격은 친절하고 자애로웠다. 또한, 외모는 제국에서 통용되는 미남의 기준을 판에 대고 찍은 듯 조각 같았다.
당연히 베르너는 어릴 때부터 모든 이들의 관심과 구애를 한 몸에 받아 왔다.
귀족들은 결혼 시장에서 그를 선점하기 위해 눈이 멀어 있었다. 무작정 몸으로 밀어붙이는 건 기본이었다. 그를 유혹하든, 약을 타든, 방법과 형태는 가지각색이었으나, 베르너가 고작 열 살의 어린 나이 때부터 매일같이 꾸준히 겪은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어진 귀족들의 작태는, 그가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시기가 되기도 전에 질리게 하기 충분했다.
베르너의 이성에 대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경멸로 바뀌었고, 그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여자라면 치를 떨며 아주 이골이 나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아일라는 ‘가문의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황태자비의 재목은커녕, 하필 가문의 세력 때문에 막 대할 수도 없어서 골치 아픈’ 정도로 기억될 뿐이었다.
아, 또 하나. 죽마고우이자 선의의 경쟁자였던 아슬란의 친동생이라는 것 정도?
‘마녀’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의 보통이 아닌 성격도, 관심을 받으려고 저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바닥을 치는 평가도, 시선을 끌어당기는 외모도 인상적이기는 했다. 하지만, 호기심이 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 무렵의 베르너는 이성에 관심이 없었기에, 아일라를 기억에 담아 둘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문을 등에 업고 그 정도의 존재감으로라도 기억된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녀를 혐오한다거나, 끔찍하게 여긴다 하는 부정적인 감정 소모마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 딱 그 정도의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으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마도 서서히 샬럿에게 시선이 가고 호기심을 품은 이후부터인 듯하다.
처음에는 무슨 꿈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아 찝찝할 뿐이었는데, 수확제 날이 가까워질수록 마치 직접 겪은 과거의 일인 양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예지몽…….’
……인 건가.
약 보름 전, 주말마다 신전에서 열리는 새벽 의식에 참석했을 때 직접 대신관을 알현한 적이 있었다.
베르너가 대신관에게 몇 달이고 계속되는 꿈에 대해 언급을 했을 때, 그는 ‘오, 모든 것은 레제르브 님의 뜻일 겁니다.’ 하고 지극히 신관다운 대답을 들려주었다.
베르너는 태어날 때부터 완벽했다.
아니, 그의 완벽을 위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는 신의 절대적인 편애를 받고 있었다.
황제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황후였다. 외조부는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라 불리는 코델리아 황녀의 절대적인 지지까지 받았다.
재무 대신이자 귀족파의 대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메르텐시아 공작도 그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곧 공작위를 물려받을 아슬란 또한 그의 죽마고우였고.
인생의 굴곡이란 전혀 없었다.
실패도 없었다.
한 번 보면 잊은 적이 없고, 가진 것을 손에서 놓쳐 본 적도 없다. 가지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한 적이 없었다. 뭐든 시작하면 그의 의도대로 굴러갔다. 이대로 물 흐르듯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순리대로 제국의 주인이 되어 있겠지.
그런 베르너에게 진정 이 꿈이 신의 뜻이라면, 그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쩌면 정말 예지몽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부터였다.
베르너가 ‘아일라’라는 존재의 위험성을 염두에 두기 시작한 건.
꿈의 내용만으로 자세한 사정까지 알 수 없지만, 아일라는 샬럿에게 크나큰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자신의 눈이 뒤집혀 아일라를 제 손으로 직접 처리할 정도로, 그의 큰 지지 세력 중 하나인 가문을 황제가 되기도 전에 제 손으로 직접 무너트릴 정도의 위험을 짊어지면서까지.
그리고 끊임없이 베르너에게 구애하던 아일라의 발길이 갑자기 뚝 끊어진 것 또한 그 의심에 불을 지폈다. 황태자가 관심을 가지는 여자가 있다는 말만 들어도 득달같이 달려드는 성질머리를 가진 여인이 아닌가.
필시, 무언가 꾸미고 있는 거다.
‘사랑, 네까짓 게 감히 날 사랑한다고 내 영원을 맹세한 심장을 건드리려고 하다니…….’
혹여 그 마녀가 샬럿에게 마수를 뻗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폈다.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하지만, 단단히 벼르고 기다려도 아일라 쪽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
‘답지 않군.’
아일라가 얼마나 멍청하고 생각이 없는지는 몇 번 말만 섞어 봐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일단 예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경망한 언행이 그랬고, 말이 길어지거나 복잡한 얘기를 꺼내면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눈빛을 보내는 게 그랬다.
말은 생각을 걸치지 않고, 행동은 더더욱 그랬다. 그때그때의 충동과 욕구에 좌지우지되는 1차원적인 짐승 같은 여자. 향기가 없는 꽃.
대외적으로 알려진 평가였으나, 베르너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소문은 본디 부풀려지고 왜곡되기 마련인데 이보다 더 객관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