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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45화 (45/131)

# 45

악녀 메이커 45화

그런데 그런 아일라가 거의 두 달 가까이 잠적해 나타나지 않자, 베르너는 ‘정말 아픈가? ……죽었나?’ 하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에게는 이렇게 긴 시간 공들여 계략을 꾸밀 머리조차 없었으니까.

소문으로 듣자 하니 저택 안, 그것도 제 방 안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하지 않고 책만 읽는다 하던데.

‘책?’

아일라, 책. 책, 아일라.

이렇게 연관성이 없을 수가 있나.

‘책은 무슨, 태어나 글 한 줄이나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인데…… 헛소문이겠지.’

베르너는 정색하며 단언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르너가 그녀를 매몰차게 거절했기 때문에 폐인이 되었다는 추측까지 기정사실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물론, 베르너는 그 소식을 듣고 코웃음을 쳤을 뿐이었다. 어디 그 여자가 거절했다는 이유로 기가 죽을 여자던가. 거절이라면 돌려서도 직설적으로도 이미 수없이 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치 벽에 대고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아무래도 그 집안 내력인 듯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군. 일단 저택 밖으로 끌어내야 할 텐데, 황궁으로 직접 소환하는 수밖에 없나? ……아니지, 따로 불러내면 또 쓸데없는 오해를 할 게 뻔해.’

지긋지긋한 여자.

이렇게 사람의 신경을 갉작거리며 거슬리게 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베르너는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걸림돌로 아일라를 꼽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베르너는 잊을 만하면 꾸는 같은 꿈 때문에 이를 갈며 아일라와의 재회를 고대했다. 다시 만나게 되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건지 밑바닥까지 털어 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확제 무도회가 다가왔다. 신분 고하의 관계없이 초대장을 받으면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것이 수확제 무도회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오늘은 나오겠지.’

그리고 베르너는 이를 갈며 벼르고 있던 아일라의 비싼 얼굴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제가 디자인했어요.”

그런데, 아일라는 사람이 뒤바뀌기라도 한 듯이 달라져 있었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던 기품이 어렴풋이 생겨났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도 않았으며, 누가 자신을 비난해도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걸친 채 관찰하듯 살필 뿐이었다.

깽판을 치지도, 심지어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화려하고 정교한 인형 같은 얼굴로 입만 열면 그야말로 재앙이었던 이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고작 그것뿐이었는데 아일라를 중심으로 사건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본인이 디자인했다고 주장하는 조잡한 드레스 하나로 순식간에 세계적인 디자이너 폴랑의 두둔을 받고 황녀 코델리아의 환심을 샀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입고 싶으면 입으면 그만이지. 그런 거 신경 쓰면 정작 원하는 건 평생 입지도 못해요.”

아니, 이런 면을 보면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닌가.

배려 없이 툭툭 뱉는 말버릇은 여전한 듯한데, 그게 오히려 상대의 호감만 샀다. 자신에게 관대한 만큼 남에게도 관대하기 때문이리라.

베르너는 귀족들을 상대하면서 아닌 척 그쪽에 관심을 기울였다.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시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던 아일라의 모습에서 어느 정도 이전의 면모를 찾아낼 수 있었다.

‘듣자 하니 남자를 정부로 들이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까지 했다는 모양인데…… 그럴 능력이나 있나? 생각 없이 말하는 건 여전하군.’

지독히 이기적이고, 자기 멋대로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고,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움…….

‘그래, 아무리 노력해 봤자 사람이 완전히 달라질 수는 없지.’

그런데 베르너는 변한 그녀의 모습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인지 부조화가 일어났다.

‘하, 저런 복종할 줄도 모르고 자기주장 강한 드센 여자를 누가.’

아무리 변했다고 한들, 저렇게 통제하기 힘든 성격이라면 황태자비의 재목이 되지 못한다.

베르너는 그에게 순종하고 평생 자신을 은인으로 여길 만큼 뒷배가 없는 비를 원했다. 그는 부인을 원하는 거지, 세력을 키워 훗날 그의 정적이 될 수도 있는 후환을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왜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 거지?’

입장할 때 우연히 눈을 마주친 것 외에, 아일라는 베르너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는 의아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걸로도 모자라, 밤마다 꿈에 나타나 당신을 사랑해서 샬럿을 죽이려고 했다는 헛소리나 하는 여자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당황하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니 결론은 금세 나왔다.

‘관심을 받고 싶은 모양이군.’

가끔 그런 영애들도 있었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치근덕대다가, 갑자기 그를 외면하고 보란 듯이 다른 영식을 끼고 등장한다. 질투를 유발하려는 흔한 수법이었다.

물론, 베르너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수법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베르너는 오히려 귀찮은 게 떨어져서 홀가분하다며 그 영식과 영애의 결혼을 직접 추진해 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그걸 몇 번 반복해 주니 그 뒤로 베르너의 앞에서 질투 유발 작전을 사용하는 영애들은 싹 사라졌었다.

‘쯧, 내가 눈길이라도 줄 줄 아는 모양이지? 같이 어울릴 만한 친구도 없으니 소식이 늦는군.’

아일라의 옆에는 시종처럼 졸졸 붙어 다니는 인상이 흐릿한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길가의 돌멩이만큼이나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의도가 너무 투명해서 뻔히 읽혔다. 베르너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의복을 봐서는 가문의 집사인 모양인데, 질투 유발을 위해 동원할 남자가 그렇게 없었나 애잔할 정도였다. 하긴 그 성질머리에…….

“베르너?”

그때, 베르너의 팔뚝에 매달리다시피 기대 있던 샬럿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가 계속 집중을 하지 못하고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는 게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아…… 미안하군.”

베르너는 순순히 사과했다.

실제로 미안하기 때문이었다. 쓸데없는 것에 정신에 팔려 있느라 샬럿에게 조금도 신경 써 주지 못했다.

“미안하긴요, 피곤하신 거라면 잠시 휴게실로 자리를 옮길까요?”

“고맙지만 괜찮아. 그냥 잠시 신경에 거슬리는 게 있었을 뿐이니까.”

샬럿은 그가 완벽하게 꿈에 그리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사처럼 착하고 상냥하고, 지켜 주고 싶을 만큼 가녀리고, 삶의 활력을 불어올 정도로 사랑스럽고 뭐든 그의 뜻이라면 별 이견 없이 고분고분 따르며, 자신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불러오는 그런 여성이었다.

무엇보다 순수했다.

티 없이 맑고 깨끗해서 더러운 것 무엇 하나 보여 주지 않고 품 안에서 안온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물론, 베르너의 눈에만 사랑스럽게 보이는 게 아닌지 그녀를 호시탐탐 노리는 남자들이 주변에 많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날고 기는 연적이라도 모든 조건을 따져 봤을 때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건 사실이었다.

지위도, 외모도, 힘도.

완벽함을 이길 자가 어디 있겠나.

샬럿은 모든 사람의 옷깃만 스쳐도 인연으로 만들었으나, 거의 잔챙이들이었고 베르너가 연적으로 생각하는 남자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제국 3대 공작 가문 중 유일하게 중립을 지키고 있는 트란디아 공작, 최연소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자 그의 호위기사인 레녹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법부의 총책임자이자 대마법사인 셉티무스…….

하지만, 샬럿을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 셉티무스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알아서 빠져 주었다. 그럼 나머지는 더더욱 볼 것도 없었다. 가끔 전전긍긍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샬럿이 자신의 손에 떨어지게 될 거라 확신했다.

그는 샬럿이 훗날 황태자비가 될 미래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를 대비해 미리 사교계에 눈도장을 찍고, 그녀를 중심에 세워 줄 생각이었다. 샬럿도 별말 하지 않았지만 내심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아일라가 예상외의 복병이 되어 온전히 샬럿에게 향했어야 할 관심을 가져갔다. 베르너는 눈가를 가늘게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설마, 샬럿의 자리를 뺏기 위해 머리를 쓰기 시작한 건가?’

그 아일라가? 내 비가 되기 위해?

믿을 수가 없었지만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일라는 전과 달라졌다.

굳이 그걸 설명하자면 겉으로는 긍정적이나, 샬럿이나 베르너에게는 위협적인 쪽으로.

아무래도 그가 매일 밤 시달렸던 꿈은 정말로 예지몽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일라가 언젠가 사랑에 눈이 멀어 정말 샬럿을 죽이려고 들게 될지도 모르겠군.

일이 커지기 전에 한발 앞서 알게 되다니, 역시 신은 그의 편이었다.

베르너는 모든 귀족이 다 모이는 마지막 연회에서 샬럿에게 직접 고백을 하면서 아일라에게 간접적으로 약간의 위협을 가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리고 무엇보다 전하께서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는 듯한데…… 왜 제가 당연히 안젤로 영애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거라 여기시는 건지?”

아일라가 결국 본인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행패를 부릴 것까지는 예상했다. 오히려 그 모습이 베르너에게는 정겹게 느껴질 정도이니, 이제야 제 모습으로 돌아왔구나 싶어 ‘그럼 그렇지’ 했다.

아일라가 뿌린 술을 얼굴에 정통으로 뒤집어쓴 게 베르너 본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내게…… 술을 뿌린 건가? 샬럿도 아니고 내게……? 지겹도록 사랑한다고 지껄였으면서 이게 무슨…….’

베르너는 지금껏 수없이 많은 구애를 받아 왔다. 그리고 하나같이 거절해 왔으나 그에게 직접 분노를 터트리는 이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누가 감히 황태자에게 거절 받았다고 화를 내겠는가. 매몰찬 것을 넘어 상대를 모욕해도 영애들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냥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서로를 철천지원수 보듯 치고받고 싸웠다.

베르너는 알코올 때문에 화끈거리는 피부와 코를 찌르는 냄새에도 움직이지 못했다. 너무 충격을 받으면 굳어져서 말문이 막힌다는데, 그게 바로 지금 자신의 꼴이었다.

감히 황태자의 얼굴에 술을 뿌리다니, 이건 신선함을 넘어 경악이었다. 그녀가 진작 미친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까지 미친 줄은 몰랐다. 관심받기 위해 발악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도를 넘었다.

모두의 앞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한 베르너는, 속으로 지금껏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격렬한 분노를 불태웠다.

지금 당장 저 날뛰는 망아지 같은 여자를 제 발밑에 굴복시키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번만큼은 아일라를 따로 불러내서 고분고분 굴지 않으면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친히 시간을 할애하여 설명해 줄 생각이었다.

“제가 화가 난 상대는요.”

그러려고 했다.

“전하이십니다.”

……분명, 그러려고 했는데.

“제가, 실망한 건, 전하시라고요.”

베르너는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아일라가 예상은커녕 상상하지도 못한 말을 뱉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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