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악녀 메이커 46화
‘내게 화가 났다고? 실망했다고?’
그의 친부, 친모인 황제, 황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가정 교사도 감히 그런 말은 꺼내지 못했다. 모두가 전하의 뜻이라면 기꺼이, 라고 했다.
‘어느 안전이라고 내게 이러는 거지? 설마, 이런 식으로 경우 없이 굴면서 내게 관심을 바라나?’
기억에 남기 위해 이런 발악을 하는 거라면 반쯤은 성공했다고 해 줄 수 있었다. 이 치욕은 평생 잊지 못할 테니까. 입버릇처럼 걸림돌이라 했더니 이렇게 제대로 거슬리는 걸림돌이 되어 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주제에 이런 식으로 굴어 봤자 사랑은커녕 자신의 발목만 잡는 길이 될 것이다.
누가 잘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 이리 막무가내로 군단 말인가. 베르너는 아일라의 미련함은 정말 여전하구나 싶어 혀를 찼다.
그런데 그녀는 두 번째로 그의 예상을 정확하게 빗나간 말을 꺼냈다.
“이제 더 이상 방해하지도, 전하의 심장을 건드리지도 않겠습니다. 이걸로 끝이에요. ……그럼 두 개의 심장과 영원히, 다음 생에서도 행복하시기를.”
아무런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건조한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연회장 밖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뭐, 이걸로 끝?
분명 내 삶, 영혼, 송두리째 다 바쳐 전하만을 사랑했다고 말했다. 하도 들어 그의 머릿속에 각인될 때까지 매일 밤 나타나 속삭였잖아.
그런데 어떻게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샬럿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꿈속에 멋대로 나타나 뱉은 절규가 귓가에 이리도 생생하거늘.
베르너는 갑자기 머저리가 된 것처럼 멀어지는 아일라의 뒤꽁무니만 쫓았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랬다.
모든 일은 베르너의 의도 아래에 있었다. 세계는 그를 위해 정성 들여 만들어진 커다란 체스 판이었다.
그런데, 말 하나가 멋대로 날뛴다.
“……감히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태어나 처음이다.”
완벽한 세계, 완벽한 인생.
빈틈없이 완벽하게 맞물려 있었던 것들이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 * *
[악녀 아일라, 그녀는 공개 실연과 선전 포고에 크나큰 상처를 입고 광란의 질주 끝에 여자 주인공 샬럿에게 피의 복수를 예고한다.]
이 장면.
이게 무려―
[남자 주인공 베르너의 세기말 고백을 듣고 충격을 받은 악녀 아일라, 그녀는 그만 화를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에 포도주 세례를 하고 마는데.]
―이 장면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루프가 일어나지 않았다.
무사히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뜬 나는, 기쁜 것도 잠시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수확제 무도회 첫날에 무사히 다음 날로 넘어갔을 때부터 의구심을 품기는 했는데.
있잖아. 혹시, 혹시 말이야.
“루프가, 어쩌면 훨씬 전에 사라졌을 수도 있지 않…… 나?”
나는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며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그냥 아등바등 헛짓한 거 아니야?
팔링게아의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루프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그만큼 악녀 역할을 잘 수행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 보니 루프 자체가 사라졌을 수도 있잖아?
애초에 악녀 역할을 해야 루프가 멈출 거라는 것도, 악녀가 등장하는 부분에만 루프가 일어날 거라는 것도 순전히 내 추측에 불과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불안에 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루프가 사라진 거라면 뛸 듯이 기뻐해야 하는 게 옳지만, 뭔가 하던 일이 공중 분해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영 개운치 않고 찝찝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때, 킬리안은 매일 아침 그랬듯이 트레이에 얼리 모닝 티를 담아 내 무릎 위에 올려 주며 말했다.
“기침하시자마자 그런 기운 빠지는 소리를 하시고. 공교롭게도 아직 루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가씨.”
“그걸 어떻게 알아요?”
“레제르브의 기운이 아직도 노골적으로 느껴지고 있으니까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시간을 다룰 수 있는 건 오로지 신뿐입니다.”
그런 신의 기운이 아직도 거둬지지 않았으니, 루프가 건재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아니지, 왜 안심해?’
루프가 아직도 앞길이 창창한 내 금수저의 라이프를 멋대로 가로막고 있다는데 한탄하지는 못할망정.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듯하여 내 양 뺨을 가볍게 찰싹찰싹 내리쳤다. 그리고 잠을 깨우기 위해 진하게 탄 듯 보이는 얼 그레이를 홀짝였다.
수확제 무도회가 막을 내리고 여유를 되찾은 나는, 다음 루프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게 내년 봄이었다.
슬슬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앞으로 무려 계절 하나를 건너뛰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아일라의 비중이 생각보다 높은 건 아니었다. 하긴, 소설의 감초 역할인 악녀가 자주 나오는 것도 긴장감이 떨어질 테니까.
‘이제 뭐 하지.’
갑자기 한가해지자 그동안 고생한 것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격렬하게 망부석이 되어 있고 싶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서재로 향해 그동안 밀린 소설책을 펼쳐 들었다. 당연히 시간이 남는다면 돈 많은 백수의 삶을 살아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글자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것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불과 며칠 전, 무도회를 다녀오기 전의 나였다면 망설임 없이 그 시간 동안 뒹굴 거리면서 링테 작가의 소설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텐데.
―저는 아가씨의 뜻을 따르겠어요. 뭐든 시키는 대로 따를 테니, 이 소피아를 믿고 맡겨만 주세요.
‘음.’
―분명 거기가 끝은 아니실 겁니다. 뭐든 상관없으니 마음껏 펼치십시오. 무엇을 상상하시든 저는 그것을 직접 실현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으음…….’
―작위를 받을 생각이 있나?
‘으으으으음……!’
계속 쓸데없는 상념이 끼어들어서, 결국 책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이상하다, 진짜.”
빈대처럼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내 평생의 꿈이었다. 심지어 처음으로 누리게 되었던 금수저 라이프는 원치 않은 루프로 인해 고작 한 달, 방학보다 짧은 찰나가 끝이었다.
그러니 그때의 설움을 보상하려면 기회가 찾아온 지금, 당연히 게으르게 늘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다른 이유로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부정맥이…… 안 좋은가?”
나는 아직도 돈 많은 백수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되지도 않는 발악을 했다.
하지만 곁에서 그런 나를 별말 없이 지켜보던 킬리안이 살짝 상기된 내 얼굴을 살피곤 물었다.
“설레는 생각했어?”
“…….”
“책이 잘 안 읽히는 모양이지?”
“……그, 그만.”
내 소시민의 영혼이 나름대로 반항했으나, 그때의 설렘은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았다.
킬리안이 내게 잊고 있었던 꿈에 관하여 물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한때 디자이너가 꿈이긴 했노라 답했다.
사실 그조차도 내게는 과분한 꿈이었는데, 이곳에서 꿈 비슷한 것을 이루게 되었다.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내 드레스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생겼다. 내가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될 거라는 허황된 바람을 넣는 최고의 디자이너까지 나타났다.
아무리 쳇바퀴 돌며 끊임없이 삽질해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던 지난 삶과 달랐다.
이 세계는 뭐든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다. 아주 쉽게 기회가 찾아왔고 노력하면 정당한, 어쩌면 그 이상의 대가를 받았다.
나를 끝도 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요인이 사라지자 드러나는 건, 바닥까지 파묻혀 있던 의욕이었다.
‘늘어져 있을 시간도 아까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랜 고심 끝에 메르텐시아 공작을 찾아가서 말했다.
“아버지, 킨타이어 백작위를 물려받고 싶어요.”
사실 어디로 보나 내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왕 판타지 세계에 온 거, 백작 정도는 해 봐야지’ 하는 가벼운 생각부터, 내 힘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제법 진지한 각오까지 통틀어서 말이다.
욕심이 생겼다.
내가 과연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하지 못했을 생각이었다.
공작은 조금 놀란 듯했지만 그가 직접 제안한 만큼 흔쾌히 허락했고, 나는 공작의 딸에서 백작의 후계자로 순식간에 지위가 격상되었다.
그 뒤로부터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원래 후계자 수업은 어릴 때부터 차근히 단계를 밟아야 하는 거였는데, 다 커서 한꺼번에 배우려니 아주 고역이었다.
아슬란으로 예를 들어 보자.
그는 걸음마를 떼고 난 뒤 황궁으로 보내져 황태자의 놀이 상대 겸 시종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후 가문으로 돌아와 가정 교사 밑에서 검술, 승마, 역사, 문학, 사교, 춤, 예술 등의 교양을 배웠으며, 머리가 크자 자연스럽게 정치, 외교, 복지 등등의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3년간 모든 과정을 수료하고 재작년에 차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여기서 왜 차석이냐 하면, 수석은 남자 주인공 베르너의 고정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나이였던 아슬란은, 불행히도 지정된 차석을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다.
‘엑스트라의 설움이라고나 할까.’
각설하고, 나는 아슬란이 차근차근 밟아 왔던 저 과정을 단번에 습득해야만 했다.
덕분에 무도회를 대비하기 위해 벼락치기로 교양을 공부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양의 과제가 몰아닥쳤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후계자 교육도 전부 다 킬리안이 담당하기로 했다는 거였다. 심지어 그의 실력이 떨어지면 몰라, 하나같이 30년 경력처럼 출중했다.
이쯤 되면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정체가 뭡니까?”
“주술사.”
내가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하지만 친절한 나는 질문을 바꿔서 다시 물었다.
“귀족이었어요?”
사실 여기서 그가 황족이나 왕족이었다고 해도 나는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수긍했을 것이다. 악마였다고 해도 믿을 지경인데, 뭐.
킬리안은 잠시 턱을 쓸며 까마득한 과거를 더듬는 듯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말을 뱉었다.
“출신을 묻는 거라면 노예였지.”
“……노예요?”
누가, 당신이?
고귀한 신분이 아닌 이상 나올 수 없는 귀족적인 억양이나 몸짓은 둘째 치더라도, 모두의 위에서 군림하고 철저히 내려다보는 듯한 언동은 절대 노예가 가질 수 없는 거였다.
타고나길 지배자인데, 무슨…….
“차라리 제가 노예 출신이었다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겠는데요.”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출신 N포 세대 노예 1호 윤하늘이라고 합니다.
왠지 그 부분은 생각이 깊어질수록 괜히 서글퍼지니까 그만두기로 했다.
킬리안은 자학 개그에 스스로 상처받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물어 왔다.
“내게 그걸 묻는 걸 보니, 이제 날 피하는 건 포기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