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47화 (47/131)

# 47

악녀 메이커 47화

그러고 보니 킬리안과 선을 긋기 위해 그의 개인적인 사정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어디서 왔는지, 뭐 하던 사람인지.

그의 비밀을 하나씩 알아갈수록 점점 더 빠져나가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자승자박이 취미세요?’

나는 내 안이함을 욕하며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내가 은근히 피하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것도 이제는 입 아픈 일이었다. 킬리안의 눈치가 원래 귀신인데, 거기다가 심지어 티 나게 행동했으니 모를 리가 있나.

“날 계속 피할 거라고?”

사서 고생하는 취미가 있는 줄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하고 킬리안이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날 파고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에는 말이다.

킬리안과의 접촉을 가능한 한 피해 보려고 해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검술, 승마와 같은 몸으로 배워야 하는 여러 수업으로 예를 들 수 있겠지만, 그에게 춤을 배우는 시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다.

“이리 와.”

킬리안은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바짝 털을 세우는 내게 손을 까딱거렸다.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어떻게 춤을 추려고 그래?”

“그냥 말로 해 줘요.”

“말로 어떻게 춤을 배워? 가뜩이나 왈츠를 군무처럼 뻣뻣하게 추면서.”

내가 의미 없는 반항을 하자, 그가 눈을 나른하게 반쯤 감으며 다시 손가락을 까딱했다. 괜히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오라는 뜻이었다.

“너무 기준이 높으시네요. 저 정도면 평균은 하는 거라고 보는데요.”

“카드리유는 그럴 듯했어. 배운 기간에 비해 잘 춘다고 생각했지. 곡이 왈츠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무도회에서 왈츠를 추다가 킬리안의 발을 수차례 밟은 전적이 있기에,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그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상대가 킬리안이라 다행이었지 평범한 영식이었다면 지금쯤 다리를 절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평범한 영식이었으면 발을 밟았을 리도 없었겠지만.’

별로 상대를 의식할 필요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킬리안과 왈츠를 출 때는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표정은 어떻게 지어야 할지, 심지어 숨소리마저 의식하게 된다.

차라리 아예 끌어안든가, 아니면 멀찍이 떨어지든가. 그 닿을 듯 말 듯한 애매한 거리에서 바짝 밀착해야 한다는 게 너무 부담스럽다.

나는 쭈뼛거리며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는 샹들리에 밑 중앙 홀 쪽으로 날 이끌었다.

잔잔한 음악은 전부터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에게 배운 그대로 한 손을 맞잡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내 허리 언저리에 그의 손길이 닿았다. 순간 움찔 떨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서로의 숨결마저 닿을 거리였다.

나는 그를 마주 보며 괜히 숨소리가 들릴까 숨을 참고, 입술 새로 내뱉는 뻘쭘한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반듯하게 각이 잡혀 다려진 새하얀 셔츠가 시야에 들어왔다. 답답해 보일 정도로 목 끝까지 채워 올린 단추도 바로 내 눈높이에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들자, 그의 귓바퀴에 금욕적인 옷차림과는 전혀 상반되는 장신구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또 귀 뚫었어요?”

피어싱 하나가 어제보다 늘어 있는 게 보였다. 그것도 굉장히 성의 없이 비스듬하게 뚫려 있었다.

킬리안은 나를 능숙하게 리드하며 별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더 필요한 것 같아서.”

그는 최근 들어 마력을 억제하는 장신구를 하나씩 늘리는 중이었다.

전에 몸에 새겼던 주술 ‘마력을 먹는 뱀’의 효과가 미미한 탓이었다.

뱀은 원래 마력을 한계까지 빨아들이고 더 나아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킬리안의 몸에 새겨진 뱀은 오히려 그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힘을 잃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궁여지책으로 고대 마물에게 사용되었던 구속구를 아티펙트로 개조했다. 마물도 빌빌 기게 한다는 무지막지한 걸 장신구처럼 주렁주렁 달고도 멀쩡히 잘 다니는 걸 보면 역시 괴물 같은 남자였다.

처음에는 반지, 팔찌 등을 하더니 머리에 가까울수록 효과가 더욱 뚜렷하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귓가에 피어싱을 뚫었다.

심지어 눈썹에도 은색 피어싱이 위아래로 있었다. 이러다가 혀랑 입술에도 달겠네. 괜히 내가 다 아픈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점점 늘어나요?”

“지난번에 나랑 살짝 닿은 영애 한 명이 어떻게 됐는지 너도 봤잖아.”

“아…….”

솔직히 그걸 ‘닿았다’고 하기도 힘들었다. 그냥 스쳐 지나가다가 그와 툭, 하고 가볍게 부딪혔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황궁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마차에 치였다. 그것도 얼마나 운이 없었는지 그녀를 마중 온 본인 가문의 마차에 치인 것이다.

우연히 그 장면을 보고 얼마나 식겁했던지. 다행히 전해 듣기로 타박상으로 끝난 모양이었지만.

“내가 마력을 최대한 억제해서 그나마 거기서 그쳤던 거다. 만약 아무런 구속도 없이 맨몸으로 닿았으면, 그녀는 죽고도 남았을걸.”

“……그게 킬리안 때문이라고요?”

“말했잖아. 모든 주술사는 인간의 행복을 빨아먹는 괴물들이라고.”

곁에 주술사가 있기만 해도 주변 사람들이 불행해진다.

그에게 말로는 여러 번 듣기는 했지만, 별로 실감 나지 않았다. 내게는 어차피 전혀 통하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실제로 목격하고 나니 생각보다 문제는 심각해 보였다. 그냥 닿기만 해도 상대방이 죽을 수도 있다니, 그래서야 평생 누구랑도 제대로 어울려 본 적 없을 것 아닌가.

‘같은 주술사 아니고서야 누구 곁에도 다가가지 못했겠네. 후드를 써도, 뱀을 새겨도 구속구를 달아도 완전하게 막을 수는 없는 것 같던데.’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도 오래 노출되면 근처의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밖에 없겠지.

그가 숲에서 산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력 때문에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녔던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킬리안이 왜 날 그렇게 끌어안고 만지고 쪽쪽 입을 맞췄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그게 가능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던 거다.

‘그리고 내가 대가를 운운하기 전까지는 정말 나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 해 주기도 했고…….’

워낙 사람 대하는 게 능숙해 보여서 그런 상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매사에 자신감도 넘치고 오만하기도 하고 완전무결해 보여서, 대수롭지 않게 여길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나는 그대로 움직임을 뚝 하고 멈췄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성의 없이 뚫어서 비뚤어지게 박힌 그의 피어싱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발돋움을 하자, 킬리안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여 주었다.

“안 아팠어요?”

“아파해야 하는 건가? 전부터 생각했지만 이상한 걸 궁금해하는군.”

“속상해서 그렇죠.”

“속이 상해?”

왜지? 하고 묻는 듯 그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그걸 몰라서 묻나.

“뚫을 거면 잘 좀 뚫지 이게 뭐야. 자국도 비뚤어져서 났을 거 아니에요.”

이 미모는 세계 문화유산처럼 흉터 없이 길이길이 남겨야 하거늘, 내 얼굴이 아닌 관계로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애초에 본인이 좋아서 장식용으로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국?”

킬리안은 그렇게 되묻더니 귓바퀴에 달려 있던 피어싱 하나를 빼냈다.

그러자 서서히 새 살이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뚫린 흔적이 말끔히 사라졌다. 절대 인간의 회복력이 아니었다.

“……주술사는 다 그래요?”

“아니, 나만.”

그는 그렇게 대꾸하더니, 다시 무식하게 귀걸이 침으로 귀를 뚫으려고 했다. 아파! 보는 내가 더 아파!

“자, 잠깐! 멈춰 봐요!”

그러자 킬리안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대로 하는 행동을 멈추고 나를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하녀를 불러 바늘을 가져오게 시켰다.

“제가 해 드릴게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지만, 적어도 킬리안 본인이 하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순순히 내가 이끄는 대로 움직여 주는 그를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하녀가 소독해서 가져온 바늘 중 가장 얇은 것을 꺼내 들었다.

“하, 할게요.”

킬리안은 어울리지 않게 얌전히 앉아서 눈만 깜빡이다가, 벌벌 떨리는 내 손을 보며 말했다.

“일단 진정해.”

“아플 것 같아서…….”

“검으로 꿰뚫는 게 아니잖아. 심장을 찌르는 것도 아닌데 아플 리가.”

나름 긴장한 나를 달래려고 하는 말 같은데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더 겁이 나고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체해서 손 딴 거 말고는 사람의 신체를 훼손해 본 적 없단 말이야.

“힘들면 내가 할게.”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킬리안은 저 뭉뚝한 귀걸이 침으로 쑤셔 넣듯 귀를 뚫어 버릴 거다. 대체 통각이라는 걸 상실했나, 왜 저렇게 고통에 둔감한 거야.

나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위치를 정확히 잡고 바늘로 빠르게 찔렀다. 그리고 구멍이 막히기 전에 얼른 피어싱을 집어넣었다.

“후…….”

다행히 막무가내로 뚫었던 전보다는 모양이 예쁘게 잡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소독은 안 해도 돼요?”

“응.”

“아무래도 덧나…… 지는 않을 것 같네요.”

나는 그제야 킬리안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슬슬 뒤로 뺐다.

혹시 괜히 귀에 흠집이라도 낼까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최근 그를 은근히 피해 다녔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방심했다. 설마, 귀마저 잘생겼을 줄이야.

하지만 킬리안이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는 게 더 빨랐다. 어라? 하는 사이에 중심을 잃고 그의 무릎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앗, 놔요!”

버둥거려 봤으나, 그가 내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고 있어서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내 의미 없는 반항은 길지 않았다. 그의 품이 너무 따뜻하고 포근했기 때문에…….

‘……정말이지 줏대 없네.’

하지만 온기가 좋은 걸 어쩌라고.

차라리 계속 몰랐으면 모를까, 그의 품속이 이렇게 좋다는 걸 맛 들리고 나니 거부할 수가 없어졌다.

갑자기 남자 주인공의 단골 세기말 대사가 떠올랐다. 입으로는 거부해도 네 몸은 이렇게 솔직한데?

그런데 내 몸이 이렇게까지 욕망에 충실할 줄은 몰랐지. 생각보다 로맨스 소설이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냥 킬리안이라는 남자 자체가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인 거라고.

내가 순식간에 저항을 포기하고 몸을 늘어트리자, 킬리안이 귓가에 대고 간지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는 내가 격하게 반항하는 것치고는 포기가 빠를 때마다 이렇게 재미있어하고는 했다.

“유혹에 약하네.”

“거울을 보고 오세요.”

사실 그에게 이렇게 빠져든 건 비단 얼굴 때문만이 아니었지만, 괜히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들킬까 봐 그렇게 둘러댔다.

그러자 그가 답했다.

“보통 기겁하고 피하던데.”

그거야 그쪽이 주술사니까 그렇겠지. 정체를 모르는 한 지상에 남신이 내려왔다고 벌떼처럼 달려들걸.

그때, 킬리안이 덧붙여 말했다.

“아니면 내가 피하거나.”

“…….”

“괜한 살인은 하고 싶지 않으니, 근처에 다가가지도 않을 때가 많았지.”

……이 주술사가 진짜 사람 마음 약해지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