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악녀 메이커 48화
그의 품속을 벗어날 생각은 진작에 식었지만, 괜한 동정심이 일어 가만히 있기 힘들어졌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그의 품속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킬리안이 기다렸다는 듯 내가 더욱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몸을 움직여 주었다. ……왠지 속은 것 같은데.
“이젠 포기하는 건가?”
뭘 이제 포기하는 건지 생략되어 있었으나 이 상황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제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모든 게 그의 의도대로 되고 말았다.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피차 사람의 온기가 고픈 사람끼리 상부상조하자고. 왠지 내 앞날이 눈꺼풀 뒷면처럼 깜깜한 것 같았지만 그를 밀어내지 못한 내 탓이었다.
“그나저나.”
그는 춤을 추느라 흐트러진 내 붉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다음 계시가 봄이라고?”
계시. 루프를 말하는 거였다.
“네, 맞아요.”
나는 미묘하게 표정을 굳히며 답했다. 일단 그렇긴 한데, 내가 소설 내용을 틀어 버리는 바람에 온전히 그날 루프가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수확제 무도회’라고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있었던 지난번의 루프와 달리, 내년 봄이라는 것 외에는 정확한 날짜를 알 수가 없었다는 거였다.
누구와 만나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아일라가 독단으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거였으니까.
“전에 받았던 예지, 그러니까 계시는 눈앞에 펼쳐지는 듯 뚜렷했는데 이번 계시는 안개에 쓰인 듯이 흐릿했거든요. 주변 풍경이 꽃 피는 봄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킬리안에게는 대충 이렇게 둘러댔다. 그에게 직접 레제르브는 불친절한 신이고, 신의 계시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이미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도 쉽게 넘어가 주었다.
사실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가만히 루프가 시작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였다. 애초에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킬리안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땋아 내려 주면서 물었다.
“봄이 오기 전에, 루프가 일어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선수를 치면?”
“엥?”
“그럼 어떻게 되는데?”
“어…….”
……그러게?
킬리안의 한마디가 ‘<백합 아가씨> 소설에서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정확히 따라야 한다’라는 내 고정 관념을 단박에 깨 버렸다.
내년 봄.
루프가 그때 일어날 테니까 당연히 그때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차피 아일라가 독단으로 움직이는 에피소드였다. 굳이 그 시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미래에 벌어져야 할 일을 과거에서 먼저 수습해 버리면?’
루프라는 것 자체가 일어날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혹시 루프가 사라지게 되는 것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소설 내용을 꼬아 버리는 지름길 같지만, 루프에서 벗어나게 될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너무 루프에 구애돼서 아일라가 등장하는 장면 외의 에피소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샬럿의 자리를 빼앗아 오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그런 자리에 찾아서 끼어들어야 하는데.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원작에 끼어들 수 있잖아!”
“원작?”
앗, 이런 방정맞은 주둥아리.
이런 당연한 사실도 몰랐던 나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저도 모르게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단어가 불쑥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곳이 책 속 세계라는 것을 스스로 시인할 뻔한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원작이란 본디의 작품. 신의 사랑을 받는 샬럿이 신의 작품이라고 했을 때, 샬럿의 일에 끼어들면 어떠냐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의 계시가 없을 때 샬럿의 일이요.”
나는 굉장히 어색한 말투로 어떻게 잘 둘러대었다.
킬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미심쩍다는 눈빛을 보냈으나, 아무리 그가 통찰력이란 게 있어도 이 세계가 책 속 세계라는 건 읽어 내지 못한 듯했다.
“그럼…… 지금 갈까요?”
나는 킬리안이 흠,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나른하게 기울이는 사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그는 내 머리카락 끝에 리본을 묶어 준 뒤 답했다.
“그래.”
아니, 내 머리를 어느새…….
쭉 당겨서 확인하니 내가 직접 한 것보다 훨씬 깔끔하고 촘촘하게 땋아져 있었다.
이럴 수가, 심지어 머리 만지는 것도 나보다 잘하다니. 이 정도면 못하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하지 않나?
왠지 자괴감이 들어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문득 떠올랐다. 내가 가볍게 외출할 때는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한쪽으로 땋아 내리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을.
……어라? 그러고 보니 킬리안이 언제부터 내 머리를 땋고 있었지?
“그럼 갈까.”
그는 나를 번쩍 들어 옆에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스스럼없이 덥석 잡았다가 움찔하며 손을 뺐고, 이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붙잡기 위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찰나 동안 수많은 고뇌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왠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그를 내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의 기로라고.
일단 급한 불도 껐고, 내 삶도 어느 정도 안정권으로 접어들었다.
곧 폴랑과 함께 황녀를 위한 드레스를 만들 것이고, 이게 잘되면 꽤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다. 굳이 그를 납치하지 않아도 본인이 전부 다 포기하고 올 수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마지막 연회에서 킬리안의 도움 없이 무사히 루프를 넘겼고, 나는 절대 샬럿에게 직접 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만 잘 유지하면 사망 플래그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작위도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아직 백작의 후계자 자리를 막 물려받은 햇병아리긴 했으나, 큰 시련이 닥치지 않는 한 내 앞길은 탄탄대로일 것이다. 가정 교사야 뭐 다른 유능한 사람을 찾으면 되고.
그야말로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웠다. 킬리안이 없어도 나름 혼자서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윤하늘, 잘 생각해. 네가 작가라는 걸 들켰을 때 이 남자에게 돌아올 반응을.’
같이 지내본 결과, 킬리안은 도덕성이 심하게 결여되었을 뿐 관대한 사람이었다. 눈치가 빨라서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사사로운 것까지는 굳이 신경을 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치졸해지고도 남을 것 같았다.
내가 신에게 이용당한 것도 아니고, 사실 이 세계의 신 그 자체였다고 한다면 그를 속인 죄로 어떤 지옥을 맞이하게 될지.
‘수, 숨기면 되지 않나?’
숨겨?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아?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기적의 눈치를 가진 그에게서 과연 1년은 숨길 수나 있을까?
“아가씨?”
킬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혼자 삶의 모든 고뇌를 짊어진 것처럼 끙끙거리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몇 번 나를 더 부르다가 그래도 여전히 넋을 놓은 채 대답이 없자 흠,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일라.”
그리고 그가 내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모든 상념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지워졌다.
그러고 보니 직접 이름 불러 준 거, 처음이지 않나? 늘 ‘너’, ‘아가씨’ 같은 호칭으로 부르더니 왜 하필 갑자기 지금.
어차피 아일라는 내 본래의 이름도 아니었다. 굳이 너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는 시를 인용하지 않아도 별 의미 없는 서양식 이름일 뿐인데.
‘아일라’라고 달싹이는 그의 입 모양과 언뜻 비치는 붉은 혀를 홀린 듯이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의 손이 내 손을 단단히 감싸 쥐고 있었다.
난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킬리안이 마냥 다정하다고 보긴 힘든 퇴폐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딘지 야하고, 조금 음습하기도 한, 마치 수렁처럼 깊고 어두운.
선택은 네가 했으니 이제는 절대 빠져나갈 생각하지 말라는 듯이.
* * *
팔링게아. 달이 태양을 삼키는 날.
이변이 시작된 그 날은, 비단 아일라에게만 악몽인 날이 아니었다.
멋대로 인과율을 뒤틀어 버린 부작용은, 때로 절대자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세계의 외곽에 있던 존재가 세계의 중심에 끼어든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새로운 원인, 그리고 새로운 결과.
나비가 날갯짓한 그 순간, 이미 곳곳에서 폭풍을 불러오고 있었다.
* * *
“지긋지긋하네…….”
허공에서 희미하게 사람 말소리가 들려왔다. 분주하게 정원을 돌아다니던 사용인들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제 눈을 의심했다. 까마득한 높이의 건물 위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소년 때문이었다.
소년은 곧 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지붕 끝에 걸터앉아 맞은편 건물을 향해 허공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허공을 노닐자, 찬란한 금빛이 손길을 따라 황금의 공식을 그려 냈다.
지붕 위에 웬 놈팡이가 있다.
누가 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인.
그것도 무슨 수로 저기까지 올라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사용인들은 흠칫 놀라 소년을 향해 외쳤다.
“웬 놈이냐!”
바로 그때였다.
소년은 갑자기 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그리고 반대편 건물에서 손짓 한 번 했을 뿐인데 집무실에 있던 이 저택의 주인, 레오 자작의 머리가 날아갔다.
콰아아앙―!
동시에 창문까지도 말이다.
당연히 자작가는 난리가 났다. 갑작스러운 폭발과 함께 날아간 자작의 머리에 사용인들은 혼비백산하며 비명을 질렀다. 하필 자작의 옆에서 차 시중을 들던 하녀는 꺽꺽거리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쿵쿵, 시끄러운 심장 소리에 잠시 주변의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하녀는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제 볼을 쓸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살아 있었던 사람의 뜨거운 피가 손가락에 묻어나왔다.
이거…… 꿈이지?
지독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하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소리 없이 테라스 난간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소년이 보였다.
능숙하고 유연한 움직임이었다. 그 난리 통 속에서도 소년은 태연하게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소년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말했다.
“정말 이상하단 말이지.”
불순물이 섞여 있지 않은 새하얀 은발과 순도 높은 금빛 눈동자. 밖에서 마주쳤다면 정말 천사 같은 얼굴이라 감탄사를 터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하녀는 저 아름다운 소년이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닫고 발을 뒤로 질질 끌었다. 호흡은 곧 넘어갈 듯 가빠지고 살짝 벌어진 입에서 이끼리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분명 죽었던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