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49화 (49/131)

# 49

악녀 메이커 49화

소년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계속 이어 나갔다. ……흠, 아냐.

“‘같은’ 게 아니라 확실해. 그 전날도, 그리고 그 전날도 죽였어. 그리고 그 전날의 그 전날도 죽였어. 숨통이 끊어진 걸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착각일 리가 없어. 일 처리만큼은 확실하다고 늘 칭찬받는걸.”

일 처리?

살인을 업으로 삼는 사람은 전 세계를 다 뒤져 봐도 암살자밖에 없을 것이다.

하녀는 경직된 동작으로 목이 잘린 자작과 소년, 소년과 자작을 번갈아 보았다. 소년의 혼잣말과 화려한 외모, 그리고 괴이한 능력을 통해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눈을 한계까지 부릅떴다.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밤의 거리에서 ‘코보스 암살 길드의 바실리’ 하면 모르는 자가 없었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수려한 얼굴과 두려운 능력 탓이었다. 그는 먼 곳에서도 손짓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덤 바실리…….’

이름 앞에 항상 ‘멍청이’라는 별칭이 함께 붙는 유명한 암살자가 눈앞에 있었다. 소문으로 듣기에 그의 행동은 늘 예측 불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존재라고 했다.

맡은 암살 의뢰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완수하지만, 그 외에는 기분이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고.

죽을 거다.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죽고 말 거다.

하녀는 덜덜 떨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던 바실리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안녕, 또 보네.”

……또?

“넌 같은 하루가 계속 반복되는 걸 알고 있어?”

그는 새하얀 머리통을 갸우뚱 기울였다가 이내 콧잔등을 찌푸렸다. 마치 일이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심통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꼭, 무슨 일이 있어도 팔링게아에 죽여 달라는 의뢰인의 까다로운 요구 때문에 장장 3개월을 기다린 거 알아?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런데 왜 하필 오늘이 반복될까.”

계속, 계속 그리고 또 계속.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이제 알겠지? 바실리는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뜻 모를 하소연을 반복했다.

“역시 난 불행한 게 맞나 봐.”

동의를 구하는 모습이라, 하녀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식은땀이 턱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오늘은 꿈 아닌 거 확실하지?”

“…….”

“대답이 없네…….”

음산한 중얼거림에 하녀는 필사적으로 대꾸했다.

“네! 네네! 꾸, 꿈이 아니십니다!”

“그렇지? 착해라. 오늘은 대답했으니까 어제처럼 죽이지는 않을게.”

그는 덜덜 떠는 하녀를 향해 영문모를 사족을 붙이며 호기심과 짜증을 담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아마 자작은 본인이 죽은 줄도 모른 채 죽었을 것이다. 그의 몸뚱어리는 집무실 의자에 앉은 모습 그대로 목에서 콸콸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내가 봐도 그래.”

꿈도 아니고 분명 죽었지.

그런데 내일 하루가 돌아가서 또 살아나면 어쩌지? 없던 일이 되면?

“이런 건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시시하고, 재미없고…… 왠지 불안해진 바실리는 품속에서 암기를 꺼냈다. 그리고 이미 머리통이 날아가 시체가 된 자작을 찌르고 또 찔렀다. 태양을 가득 담은 눈동자는 순수한 광기로 번들거렸다. 잠자리 날개를 뜯는 어린아이의 눈빛이었다.

이래도 안 죽을까? 이래도?

그것이 한계였다. 그 잔혹한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하녀는 그대로 까무룩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바실리는 자신의 몸이 피로 목욕을 한 것처럼 흠뻑 젖고 나서야 그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턱을 타고 뚝뚝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상큼하게 웃었다.

“이젠 죽겠지?”

그는 뿌듯해 하다가 갑자기 스위치를 끈 것처럼 얼굴을 싸악 굳히며 도망가는 사용인들의 등에 대고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또 하루가 돌아가면 다 죽이고 저택째 무너트려 버릴 테니까.”

그러면 내일로 넘어갈 수 있을 거야.

“너도 허락하는 거지?”

바실리는 눈도 감지 못한 자작의 머리통을 보며 해맑게 물었다.

* * *

사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귀를 파고드는 소리였다.

똑똑, 하고 바닥을 두드리는 물방울의 소리, 그리고 낮고 잔잔한 음색의 목소리, 서걱서걱하고 무언가를 잘라 내는 날카로운 소리, 소리…….

가물거리는 시야가 어느새 뚜렷해졌다. 돌벽으로 된 듯한 천장이 보였다.

사내는 눈을 깜빡였다.

상황 파악이 조금도 되지 않는 탓이었다. 그는 뒤늦게 자신의 팔다리가 완벽하게 결박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무슨…….”

희뿌옇고 탁한 연기가 허공에 산란했다. 후, 하는 깊은 숨소리와 함께 연기가 걷히고 나자 궐련을 입에 문 한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깼어, 동생?”

남자는 음울하고 메마른 눈빛으로 사내를 내려다보다가 지독한 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피를 말려 굳힌 것처럼 버석거렸다.

“린다!”

상대의 정체를 단박에 파악한 사내의 얼굴이 낭패와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쳤는데, 결국 붙잡히고 만 것인가!

“말버릇이 많이 안 좋아졌네.”

린다라고 불린 남자는 같잖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굵은 핏줄이 불거진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하던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갔다.

고통은 느리고 둔탁하게 찾아왔다. 처음엔 그저 배 언저리가 화끈하고 뜨겁다는 느낌뿐이었는데, 곧 견딜 수 없이 괴로워졌다.

사내는 생전 처음 겪는 끔찍한 고통에 몸을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상처 벌어지니까 바르작거리는 벌레처럼 굴지 마. 우리가 이런 장사 한두 번 해 본 거 아니잖아?”

“크읏, 크아악!”

“거 동생, 생각보다 참을성 없네.”

린다는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고문 받는 쪽이 되는 건 처음이니 색다르긴 하겠어? 그러니까, 시키는 일만 잘했으면 좋았잖아. 똑똑한 줄 알았는데 순 헛똑똑이였네. 아니면, 뭐…… 내 말이 우스웠나?”

배를 가르던 나이프가 이번에는 상대의 귓가에 붙었다. 사내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극한의 공포로 온몸에 털을 세웠다.

“난 정말 우리 동생들을 친가족처럼 생각하고 아끼고 있어. 그런데 너 같은 새끼 때문에 착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어. 동생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아, 그래. 알고 있었으면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네? 그럼 지금부터 말해 줄 테니 귓구멍 파고 잘 들어.

그는 칼을 사내의 귀에 쑤셔 넣을 것처럼 바짝 대며 이렇게 말했다.

“첫째, 내 말을 안 듣는 거. 둘째, 내 이름 파는 거. 셋째, 내 돈 건드는 거. 넷째, 같은 일 반복하는 거. 그런데 내가 싫어하는 일을 전부 했다니까. 이렇게 용감한 사람인 거 처음 알았어. 어? 아주 훌륭해.”

“쿨럭, 커억, 어, 언제 같은 일을 반복하게 했…… 크아악!”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건데…….”

린다는 입에 물고 있던 궐련의 불꽃을 사내의 몸 위에 지그시 눌렀다. 여린 살이 타는 소리가 지글거리자,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누가 내 말에 토 달라고 했지?”

린다의 새빨간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굵은 목덜미에 핏대가 서는 것과 동시에 연기를 따라 느긋하게 유영하던 숨소리 또한 거칠어졌다. 그가 두꺼운 흉부가 크게 들썩이며 으르렁거렸다.

“시발, 한두 번이 아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여유로운 장사치의 미소를 잃지 않던 그의 얼굴 또한 오늘따라 짜증이 어려 있었다.

“어? 동생, 기억에 문제 있어? 왜 매번 처음인 척 굴어? 네가 이러는 거 정확히 몇 번째인지 알려 줄까? 열 번째야, 열 번째.”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린다는 동의를 구하듯이 그렇게 물었지만,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이미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기 때문이었다.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기절하다니, 예의도 어디다 상실하고 왔나…….”

한숨을 내쉰 린다는 바가지에 찬물을 담아 사내의 얼굴에 뿌려 깨우고는 다시 고문을 시작했다. 기절하면 깨우고 또 기절하면 깨웠다.

사내는 계속되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벌레처럼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경련하다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필사적으로 외쳤다.

“정보……! 크윽, 보스 제발, 제가 가진 정보를 다 말해 드리겠습니다……!!”

“…….”

“아, 알고 있는 것, 허억,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전부…… 다…….”

아무리 ‘밤의 거리’라 불리는 암흑가의 보스 린다라고 하더라도 모를 극비 정보였다. 이것 하나만 믿고 돈을 빼돌려 도주까지 하는 목숨을 건 도박을 벌였으니, 그 정보의 무게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사내에게 남겨진 마지막 보루였다.

하지만 린다는 그의 희망을 짓밟듯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신의 조각? 그것이 묻힌 위치를 드디어 알아냈다고?”

“그, 그걸 어, 어떻게……!”

“말했잖아, 열 번째라니까.”

이래도 모르겠으면 저승에서 알아보시든가.

린다는 그렇게 덧붙이며 사내의 목에 나이프를 꽂아 넣었다. 단숨에 급소가 찢긴 사내는 끄르륵 피 끓는 소리를 내다가 곧 숨이 끊어졌다.

“이렇게 똑같은 시체가 열 구…….”

린다는 피에 젖은 손으로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그리고 내일이면 또 없던 일…….”

원래 조금씩 숨통을 죄이며 상대를 가지고 놀다가 죽이는 것을 선호했지만, 지겹다 못해 싫증이 난 지금은 비교적 편한 죽음을 선사했다.

“시체가 열한 구~ 열두 구~”

그는 미친 사람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뒤에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그들은 아주 능숙하게 의자와 신문, 손수건을 가져와 내밀었다.

린다는 젖은 손수건으로 피 묻은 손을 쓱쓱 닦은 뒤 신문을 펼쳐 들었다. 신문 머리기사에는 뚜렷하게 ‘팔링게아’라고 적혀 있었다.

“염병할.”

확실해.

하루가 돌아간다.

그는 뒷머리를 박박 긁다가 신문을 뒤로 던져 버리고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 머리를 뒤로 젖혔다.

수도 없이 돌아가는 하루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신이든 악마든 뭐든 타인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 하나는 확실한데, 굉장히 불쾌하게도 손 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게 가장 엿 같다고.’

린다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어떻게든 터트리고 싶었다.

하지만 분노가 향할 곳이 마땅하지가 않았다. 보아하니 주위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놈도 없고, 말해 봤자 나만 미친놈 취급당할 뿐이고, 나름대로 노력해도 없던 일이 되어 버리고.

그냥 아무나 잡고 조져 버려도 다음 날이면 다시 멀쩡해진다. 어제는 밤의 거리로 나가 사람이 보이는 족족 다 죽여 버리기도 해 봤다. 물론, 의미 없는 짓이었다.

뾰족한 수가 없…… 아, 맞아.

‘내가 죽어 보지는 않았지.’

린다의 손에 들린 나이프는 한때 그의 조직원이었던 남자의 피로 흥건했다.

그는 나이프를 손가락 사이로 빙빙 돌리다가 제대로 고쳐 잡고 자신의 살갗 위를 사악 긁었다.

턱, 목덜미, 그리고 경동맥.

그냥 이대로 찔러?

‘그래 씨…… 뒤지면 뒤지는 거지.’

그가 망설임 없이 손에 힘을 주려는 그때, 거꾸로 뒤집힌 세계에서 그의 조직원 중 하나가 헐떡이며 들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