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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52화 (5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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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메이커 52화

내년 봄에 있을 루프에서 아일라가 독단으로 저지르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샬럿의 납치였다.

그렇다. 암흑가까지 발걸음을 해서 샬럿의 납치를 사주한 것이다.

그리고 아일라는 그 자리에서 바로 샬럿을 욕보인 후에 골목길에 두고 가라는 지시까지 내린다. 그렇게 하면 이미 더럽혀진 샬럿을 황태자가 버릴 거라는, 10년 전 구시대적인 악녀 같은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예상이 갈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극적으로 짜잔― 하고 정의의 용사님처럼 등장한 베르너가 악당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쓸어버린다.

그날 이후 조금씩 세력을 키워 가던 암흑가 ‘밤의 거리’는, 샬럿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황태자의 지시하에 대대적인 청산이 일어나 잠시 휘청하고 숨을 죽이게 된다.

그리고 그때의 일을 계기로 샬럿은 본격적으로 베르너 한 명에게만 서서히 마음이 가기 시작한다. 물론, 틈틈이 어장 관리도 해 주면서.

그전까지 샬럿은 여지는 줘도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는 않는다.

베르너에게 세기말 공개 고백을 듣고 난 뒤에 샬럿의 반응을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일라가 회장 밖으로 뛰쳐나간 뒤에, 샬럿은 이렇게 말한다.

[“베르너의 마음을 알게 되어 정말 기뻤어요. 하지만 메르텐시아 영애께서 전하를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다고 들었는데…… 전하를 흠모하는 영애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요?”]

샬럿은 아일라 외에도 수많은 영애들이 안쓰럽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결국 제게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로 대답을 나중으로 미룬다.

베르너는 흩날리는 낙엽을 배경으로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날 거부할 줄이야, 그대는 매번 날 놀라게 하는군’ 하는 촌빨 날리는 대사를 하면서 흔쾌히 물러나 잠시 샬럿과 거리를 둔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들이댈 땐 언제고, 쿨워터 향을 풍기며 흔쾌히 물러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베르너 강화 기간이 끝났거든. 그때 당시 독자분들께 내가 열심히 만든 다른 잘빠진 물고기들 자랑도 좀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차례대로 트란디아 공작, 셉티무스, 레녹스가 나온 뒤에 ―그 외에도 생각나는 대로 집어넣었던 각양각색의 남자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납치 사건이 터지면서 본격적으로 베르너 루트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지금은 트란디아 공작의 강화가 막 시작될 시점이란 말이지. 그리고 다음 차례인 셉티무스는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원작을 멋대로 벗어나 쏙 빠져 버렸다. 그러니까 바로 레녹스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 말인즉, 내가 죽을 시기도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와, 루프가 일어날 때까지 가만히 손 빨고 있었으면 큰일 날 수도 있었겠는데?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지만 킬리안 말대로 진작 움직여서 다행이었다.

킬리안은 내가 샬럿의 주인공 자리를 빼앗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신을 능멸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그의 목표이고, 내 최종적인 목표는 뭐로 가든 ‘죽지 않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년 봄, 다시 루프의 시기가 돌아오기 전에 죽을 계기 자체가 생기지 않도록 내 쪽에서 먼저 선수를 쳐 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같은 여자로서 샬럿의 납치를 사주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고 말이다. 10년 전 즈음에는 소설에서 그런 악녀들이 넘쳐났기에 아무 생각 없이 적었는데 지금 감각으로 생각해 보면, 으음…….

지금 상황으로선 최대한 빨리 소설의 완결을 내 버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로맨스 소설의 완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온갖 우여곡절 끝에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맺어지는 것. 하지만 이건 소설이 아닌 내 목숨이 달린 현실이었고, ‘온갖 우여곡절’은 다 생략해 버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지금 당장 샬럿과 베르너의 사랑을 이어 주는 오작교가 되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샬럿이 트란디아 공작, 셉티무스, 레녹스, 외에도 기타 등등의 물고기들과 엮일 상황 자체가 애초에 차단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미 소설의 완결이 났으니 아일라가 악역이 될 필요도 없겠지. 루프도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내 최고의 시나리오이자 가장 행복한 결말이었다.

‘속전속결로 처리해 버려야지!’

트란디아 공작의 강화 기간은 조만간 시작될 것이다.

나는 곧 전쟁을 치르러 가는 사람처럼 주먹을 꽉 쥐고 비장하게 다짐했다.

그동안 나는 후계자 수업도 꾸준히 받으면서 동시에 이리저리 발로 뛰어 그날이 언제인지 알아냈다.

바로 트란디아 공작과 샬럿이 정식으로 대면하게 되는 ‘그날’. 나는 그날을 결전의 날로 정했다.

하지만 그 장소는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워낙 물 관리가 철저해서 트러블 메이커인 아일라는 그동안 알아서 걸러 버렸으니까.

귀족이라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셀럽들만 초대받는 은밀한 파티. 은근히 왕따도 아니고 대놓고 왕따인 아일라가 어떻게 그곳의 초대장을 어떻게 얻어 낼 수 있을까. 그것은 한동안 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쉽게 일이 진행되었다.

내 드레스가 황녀의 주목을 받은 데다가 의뢰까지 받고 심지어 내가 킨타이어 백작위를 물려받게 될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그쪽에서 먼저 내게 잘 보이기 위해 자처해서 초대장을 보냈다.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내가 향한 곳은 바로…….

“카지노 호텔이라니.”

나는 지금 킬리안과 함께 생전 처음 카지노를 앞두고 있었다.

야광석을 사용한 간판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린다. 수도 내 노른자 땅에 세워진 이 건물은 ‘밤의 거리’의 주인 린다의 소유물이었다.

이곳은 표면적으로는 제국의 허가를 받은 합법적인 곳이다. 하지만 이 호텔 지하에서는 정기적으로 불법 노예 경매가 일어났다.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전부 높으신 분들과 관계되어 있었기에, 황실 치안대 기사들조차 단속하지 않고 알아서 쉬쉬하고 있었다.

대신 이 카지노 호텔은 경매에 초대받는 손님을 아주 까다롭게 골라 받았다.

신분이 높다고 다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지금껏 쌓아 온 게 많으며, 자신의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이들이었다. 즉, 알아서 처신을 잘하며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

‘생각해 보니 아일라가 여기 초대 받은 게 기적 같기는 해…….’

소설 속 아일라는 자기 관리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 것 같은 막장 인생이었는데, 요즘 나름 경력을 쌓고 이미지 관리를 했던 게 효과를 본 모양이었다. 내 노력이 인정받았다고 생각해도 되려나.

“초, 초대장 잘 가져왔어?”

나는 덩치 여러 명이 서 있는 입구 가까이에도 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면서 말했다.

킬리안은 정신 사납게 구는 내 어깨를 덥석 붙잡은 뒤에 입고 있는 망토를 단단히 여며 주면서 말했다.

“초대장은 아가씨께서 직접 잘 챙겨 오셨습니다. 긴장하셨습니까?”

“아, 참. 그랬지.”

그야 당연히 긴장하지. 이렇게 대놓고 합법적이지 못한 어둠의 세계에는 발을 들여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노예 경매장이라고 해서 노예 경매만 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단 이 카지노의 오너부터 암흑가의 주인이 아닌가. 노예를 사고파는 건 오히려 여기에서 건전한 편에 속했다. 점점 지하로 내려갈수록 더 음지의 무언가가 나타났으니까. 이 카지노에 네크로필리아도 들락날락한다고 들었다.

그 밖에도 원한다면 합법적이지 못한 온갖 경험을 다 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입에 담기 더러우니 자세한 건 언급하지는 않도록 하겠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어깨를 가볍게 털어 냈다.

그리고 품속을 뒤적여 카지노 문장이 새겨진 은색 패를 꺼냈다. 이걸 내밀면 노예 경매장으로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이걸 쓰십시오.”

문지기가 고급스럽게 꾸며진 가면을 내밀었다.

눈에서 코끝까지 가릴 수 있는 반가면이었다. 귀족 나리들이 온다고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쓴 건가.

나는 문지기가 시키는 대로 가면을 쓴 뒤, 킬리안에게도 건네주었다.

“이게 의미가 있습니까?”

그는 순순히 가면을 쓰면서 내 붉은 머리카락을 들었다가 놓았다. 이렇게 선명하고 빛깔이 탐스러운 붉은 머리는 메르텐시아 공작과 아일라를 제외하곤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문지기의 안내를 따라 열심히 걸음을 옮기며 작게 속삭였다.

“상관없지 않을까요? 이곳 귀족들은 사람의 안면을 인식하는 데 크나큰 결함이 있으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인 건가?”

“네. 못 알아볼걸요. 나중에 결혼한 부인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눈 밑에 점 하나 찍고 나타나도 못 알아볼지도 모르죠.”

나는 아내가 유혹한다는 한 시대를 풍미한 희대의 막장 드라마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물론, 킬리안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진짠데.

계단을 밟고 지하 안쪽으로 깊숙이 내려갈수록 내부 조명이 점점 더 은밀해졌다. 심지어 나는 가면까지 쓰고 있으니 이렇게 되면 어두워서 더더욱 알아보지 못하지 않을까?

그런데, 아니었다.

“헉, 메르텐시아 영애?”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지?”

“어머, 아직 소문 못 들으셨나요? 이번에 그녀가 백작위를…….”

기대한 보람도 없이 곧바로 정체를 들킨 걸로도 모자라 그들은 날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나는 너희의 안면 인식 장애를 믿었던 만큼 내 가면도 믿었기에 난 아무런 부담 없이 내 가면을 썼고…….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민소희급으로 변장한 샬럿은 못 알아보면서 나는 단박에 알아보는 거지?

그런데 가만히 듣고 보니 내가 이전까지 겪었던 경험과 묘하게 달랐다. 무작정 멸시하고 깎아내리며 욕하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여전히 뒷말을 듣고 있기는 했지만, 귀족 사회에서 점점 날 받아들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내가 이곳에 들렀다는 것도 조만간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겠네.’

별로 상관은 없지만.

왠지 베일에 싸여 있어도 나는 트윙클 티가 난다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이래서 그녀의 악명이 남들보다 더 빨리 퍼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일라는 튀어도 너무 튀어서 어딜 가든 주목을 받으니까.

‘과연, 이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여자의 숙명인가. 역시 미인박명이라는 옛말은 틀린 게 아니야.’

나는 남 얘기를 하듯 새삼 감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입이 찢어지시겠습니다.”

“…….”

그러다가 곧바로 킬리안에게 지적을 당했다.

내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자제하기 힘들어 손으로 쭉쭉 내리자, 옆에서 그가 피식하고 날 비웃었다.

예뻐서 주목받는 건 익숙하지 않으니까 내심 기뻐할 수도 있지!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모태 미남이었을 킬리안은 이런 기분을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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