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악녀 메이커 53화
속으로 투덜거리며 경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경매장 내부는 황금과 붉은 천으로 둘러싸인 화려한 극장처럼 꾸며져 있었다. 여기서 당장 오페라를 공연한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그럴듯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나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 그대로 떠나려고 하는 문지기를 붙잡았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애초에 이곳은 노예 경매가 아닌 다른 목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 것이었다. 아무리 소설 속이라지만 사람들을 상품이라고 부르며 값을 매기고 물건처럼 판매하는 꼴은 그다지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경매에 내놓을 노예들을 미리 보고 사들일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물론 가능합니다만, 저희가 취급하는 노예들은 하나같이 최상급이라 VIP 고객님들만 가능하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오늘부터 VIP 고객이 되어 주지.
말없이 킬리안에게 손짓을 하자, 그 또한 말없이 묵직한 돈주머니를 문지기에게 던졌다.
능숙하게 돈주머니를 받아 든 문지기는 내용물을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액수가 놀라워도 이 일을 하루 이틀 해 본 건 아닌지 그는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VIP 고객님들을 위한 최상급 상품은 이쪽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문지기는 전보다 훨씬 정중해진 태도로 나를 곧바로 노예들을 대기시켜 둔 곳으로 이끌었다.
VIP 되기 참 쉽죠? 이게 바로 그동안 봉인해 두었던 돈 많은 백수의 저력이다. 내 아버지 돈으로 생색내는 기분 한번 아주 짜릿하군.
소설에서 샬럿은 오늘 한 백작 영애의 초대를 받고 이곳으로 향한다.
물론, 샬럿 본인은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전혀 모르고 파티라는 말에 순진하게 쫄래쫄래 따라오게 된다.
호텔에서 큰 파티가 열린대! 그런데 그 건물이 우연히 카지노 건물일 뿐이야, 이런 사고의 흐름이었다.
근데 이렇게 대놓고 뒤가 구려 보이는 건물일 줄은 몰랐네. 공들여서 꾸민 듯 대저택에 맞먹을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하기는 하지만, 대체 입구를 지키는 장정부터 몇 명이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샬럿은 순진함을 넘어서 병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람을 쉽게 믿는다.
이렇게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으니, 등장하는 남자마다 하나같이 지켜 주고 싶단 타령을 하지. 세 살배기도 이보단 의심이 많겠다.
아무튼, 그 백작 영애는 사실 모든 권력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샬럿에게 질투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수치심을 줄 생각으로 샬럿을 경매되는 노예들 사이로 밀어 넣는다.
‘정말 뒷일은 생각을 안 하네…….’
내 소설 악역들의 특성은 일단 충동을 느끼는 대로 저질러 보고 본다는 거다.
소설에서는 그 영애의 최후에 대해선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는데 괜찮을까. 분명 언젠가 베르너가 알게 되었을 때 쓱싹 제거당하겠지. 어쩌면 트란디아 공작이 그녀를 처리하는 데 협조해 줬을 수도 있겠다. 아일라가 훗날 당한 것처럼 말이다.
아일라는 샬럿과 베르너를 이어 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됐는데, 그 백작 영애는 샬럿의 어장 속에 물고기를 새로 영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겠지.
‘미안하다. 다 못난 작가 탓이다.’
하지만 나쁜 마음을 먹고 샬럿을 해하려고 한 건 사실이니까 자업자득이었다.
안 그래도 내 코가 석 자인데 도움을 주기는 아무래도 힘들지. 나는 한 백작 영애의 명복을 미리 빌어 주었다.
문지기는 나를 이곳 노예 관리인에게 넘겨주었다.
문지기부터 그랬지만 관리인 또한 등에 문신을 새기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구역 관리를 명목으로 돈을 뜯고 폭력을 일삼게 생겼다. 뭐, 이곳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거의 확실하지만.
나는 내게 굽실거리는 조직 폭력배…… 아니, 관리인에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예.”
“여자야.”
“예?”
“내 보호 본능을 자극할 만큼 청초한 백합꽃처럼 생겼으면 좋겠어. 그리고 아주 사랑스러웠으면 좋겠네.”
특정 인물을 콕 집어 말하는 듯한 내 발언에 관리인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안 좋은 낌새를 느낀 것인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아는 분이신 겁니까? 그런 거라면 미리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 호텔은 고객님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 되는 상품은 절대 판매하지 않습니다.”
만약 노예 중에 의도치 않게 끌려온 사람이 있다면 무언가 착오가 있을 거라는 말이었다.
내 별것 아닌 한마디에 저렇게까지 조심하면서 몸을 사리다니. 그러니까 수도의 중심에서 대놓고 불법적인 일을 만연하게 저질러도 단 한 번도 문제가 터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철저하게 관리하며 운영하면서 대체 샬럿은 어떻게 섞여 들어간 거야? 수작을 부린 백작 영애의 수완이 생각보다 대단한 건가. 아니면 내 소설 개연성이 그만큼 말아 먹은 것인가.
나는 눈치가 빠른 관리인 때문에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야? 내 취향이라고.”
“……정말이십니까?”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대놓고 의심스러워하며 물었다.
그리고 슬슬 나를 VIP 고객이 아닌 호텔을 치려고 잠입해서 들어온 치안대의 끄나풀이 아닌가, 하고 보고 있었다.
아, 안 돼.
이대로 가다간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만다. 수세에 몰린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도도한 음성으로 허세를 부렸다.
“나 몰라? 아일라 메르텐시아.”
나는 가면 끝을 엄지로 밀어내 경국지색의 얼굴을 살짝 보여 준 뒤에 다시 내렸다. 그러자 아일라의 미색에 놀란 관리인이 살짝 멍하니 풀어진 눈빛을 하다가 뒤늦게 제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나는 그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다시 연기에 몰입해서 말했다.
“원래 장난감은 심하게 가지고 놀아도 잘 고장 나지 않는 튼튼한 쪽을 선호해. 하지만 오늘따라 툭 쳐도 울 것 같은 가녀리고 사랑스러운 미인을 괴롭혀 보고 싶어서 그래. 뭐, 가끔 별미도 나쁘지 않잖아?”
“아, 예…….”
이 호텔엔 별별 성향의 별별 변태들이 다 올 테니까, 이 정도는 양호한 편이겠지. 나름 계산해서 한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관리인의 반응이 떫었다. 저기, 님 표정 관리 좀요.
“그런데, 넌 누구기에 내 말에 토를 달지? 설마, 지금 날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 아일라 메르텐시아를?”
나는 ‘어머, 나 참 기가 막혀서!’ 하면서 요즘 내 필수품이 되어 버린 부채로 얼굴을 살랑거리며 부채질했다.
그제야 관리인은 사색이 되어 허리를 직각으로 잡으면서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저같이 천한 것이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최근 수도 내에 단속이 심해져서 조금 예민하게 반응했던 모양입니다. 무례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조심하도록 해. 기분 나빠지면 널 다음 노예로 사들일 거니까.”
어디까지 즉흥적인 연기였는데, 어째 막상 하니까 성격 파탄 난 재벌가 아가씨의 정석 같은 갑질이로군.
나는 쥘부채를 단번에 접어 그의 가슴께를 콕콕 찌르면서 말했다.
“흠, 말하고 보니 너 꽤 마음에 드네. 튼튼해 보여서 오래 가지고 놀 수 있을 것 같아. 한 한두 달쯤?”
똥 씹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 입꼬리를 파르르 떨고 있던 관리인이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나보다 몇 배는 더 악명이 높을 것 같은 조폭의 얼굴을 하고서는 명백히 겁에 질린 기색을 보였다.
어째서죠.
저런 반응을 의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진짜 그러면 떨떠름해지잖아. 아일라의 악명이 그 정도였나.
“그래서 있어,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노예들을 쭉 둘러보았다. 겁에 질려 창백하게 굳어져 있는 이들 중 샬럿은 없었다.
“적어도 얘네 중에선 내가 찾는 느낌이 없는데 말이야.”
내가 부채로 손바닥을 탁탁 내려치며 의도적으로 관리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자,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있습니다! 마침 딱 말씀하신 느낌의 상품이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단장해서 데려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직접 갈래.”
관리인은 내 막무가내 같은 고집에 곤란해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내가 말없이 붉은 입매를 비틀자 얼른 등을 휙 돌려 길을 안내했다.
나는 관리인이 내게서 등을 돌리자마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창피해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볼멘 목소리로 작게 투덜거렸다.
“아, 그만 좀 웃어요.”
킬리안이 입을 틀어막은 채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옆에서 계속 저러고 있어서 내가 분위기 잡기 얼마나 힘들었던 줄은 아나? 악녀 연기를 할 때는 표독스러움을 유지하며 감정 잡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실수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는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그러고 한참 뒤, 킬리안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내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냥 내게 도와달라고 했어도 됐을 텐데.”
“아…….”
나는 그의 숨결이 닿아 간질거리는 귀를 감싸 쥐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뒤늦게 그의 능력을 이용했으면 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차피 이 호텔 관리인은 오늘 한번 보고 말 사람이었으니, 킬리안의 능력을 사용해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한마디로 혼자 아주 열심히 삽질했다는 뜻이었다.
아니, 이걸 왜 진작 생각 못했지?
“바본가 봐…….”
“덕분에 좋은 구경했군.”
내가 한탄하듯이 중얼거리자, 그가 쿡쿡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지? 방금 10년치 놀림감이 생겨 버린 것 같은 이 기분은? 아니나 다를까 그가 그 즉시 날 놀렸다.
“전 아가씨께서 몇백 년을 가지고 놀아도 튼튼할 텐데요. 이쪽도 고려해 보시죠.”
저게 말이야 막걸리야.
지금도 가지고 놀기는커녕 가지고 놀림 받고 있는데 내가 퍽이나 킬리안을 가지고 놀겠다. 그리고 몇백 년이란 까마득한 숫자는 전부터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장수하고 싶나?
나는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몇백 년이 지나도 가지고 놀 엄두도 못 낼 거라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
“이런 씨…….”
“씨?”
필터 없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 험한 말을 킬리안이 되물었다.
“씨…… 씨앗이 날아다니는 봄날이 벌써 그립네요…….”
그러자, 나는 놀랍게도 어느새 분노가 가라앉고 아득히 먼 곳을 향해 아련한 눈빛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 *
샬럿이 다른 노예들과 따로 격리된 이유는 워낙 반항이 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리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한 그녀라고 해도 귀족 영애가 노예로 팔려나갈 처지라면 당연히 반항이 심할 수밖에 없겠지.
사실 굳이 그런 설정을 넣은 것은 샬럿과 짐승남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노예 경매장에 끌려왔다가 같은 처지에 있는 상처 입은 짐승남의 마음을 온화하게 보듬어 주고 구원해 주는 것 또한 여자 주인공의 숙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