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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54화 (54/131)

# 54

악녀 메이커 54화

하지만 그 짐승남은 주요 물고기가 아니라 몇 번 등장하지도 않은 기타 등등의 물고기이기 때문에 내 관심 밖이었다.

아마도 제국에서 야만족이라고 불리는 부족의 전사였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의 이름은 감도 안 잡혔다.

‘알 바도 아니지만.’

관리인은 나를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이끌었다. 지금까지 거쳐 온 곳과 전혀 분위기가 다른 마치 지하 감옥 같은 곳이었다.

“이 여자입니다.”

관리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갈색 머리의 여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쇠창살 사이로 두꺼운 팔뚝을 집어넣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억지로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그러자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샬럿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렇다.

샬럿을 노예 경매장에 팔아넘긴 백작 영애는 샬럿의 머리 색과 눈 색을 일시적으로 갈색으로 보이게 하는 마법을 걸어 버린다.

물론, 내가 자작 영애다, 하고 멋대로 떠들게 둘 수 없으니 말을 할 수 없게 하는 물약까지 먹이고 말이다.

그런데 고작 그것만으로 모두가 샬럿을 알아보지 못한다.

세상에 그게 말이 되는가? 황태자 베르너의 사랑을 받게 된 이후로 사교계에 이름을 날리며 꽤 주목을 받고 있는 샬럿인데 말이다.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나는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보면서 귀족들은 왜 머리 색과 눈 색만 바꾼 채로 경매장에 나온 샬럿은 알아보지 못하는가. 내 소설의 개연성은 어디로 가는가.

특히, 트란디아 공작은 그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경매에서 거금을 주고 사들이기까지 한다.

참고로 그 당시의 상황은 이랬다.

샬럿이 무대에 오르자마자 그녀의 사랑스러움에 반한 귀족들에게서 너도나도 경매가를 올린다.

그리고 치열한 돈지랄 경쟁이 일어나고 있을 그때였다.

그 광경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던 트린디아 공작은 유유히 자리에서 일어나 금화 가방을 펼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1억 2천. 전부 금화다.”]

……그만 알아보도록 하자.

아무튼, 트란디아 공작은 사실 노예를 사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원래는 그는 베르너의 명을 받아 손님인 척 잠입해 카지노 호텔을 소탕하기 위한 꼬리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심한 안면 인식 장애가 의심되는 트란디아 공작은 변장한 샬럿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눈에 반해 버린다. 그리고 황태자의 명령이고 나발이고 다 잊은 채 그녀를 사들여 저택으로 데려오고 만다.

그렇게 그는 샬럿을 억지로 저택에 가둬 놓고 매일 같이 집착과 소유욕의 끝을 보여 주게 되는데, 샬럿은 목소리도 안 나오고, 그렇다고 종이와 펜을 달라 말을 할 수도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겠지.

그런 샬럿을 안타깝게 여긴 한 하인의 희생으로 인해 베르너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고, 샬럿의 실종으로 눈이 뒤집혀 있던 황태자는 그녀를 트란디아 공작에게서 구출해 온다.

공작은 자신이 사들인 노예가 샬럿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고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샬럿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빌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샬럿은 성녀의 환생이라고 불리는 천사표답게 그의 죄를 사해 준다.

그렇게 물고기가 순조롭게 샬럿의 어장 속에 입주 성공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심지어 트란디아 공작은 가문 대대로 중립을 지키고 있는데, 훗날 황태자비가 되는 샬럿을 위해 황태자 편으로 돌아서기까지 한다. 집착으로 시작해 순애보로 끝나는 전형적인 후회 남주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샬럿은 아직 베르너의 고백을 받아 주기 전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고, 샬럿은 한창 혼인 적령기인 미혼의 아가씨였다. 샬럿을 사랑한 베르너는 그녀의 명예를 위해 하는 수 없이 이 일을 묻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베르너는 더더욱 ‘밤의 거리’를 소탕할 기회만 노리게 된다. 그 발판을 마련하게 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밤의 거리는 소설 속에서 자세히 언급되지 않는다. 밤의 거리의 주인인 ‘린다’라는 인물도 이름만 몇 번 거론되었을 뿐 실제로 나오진 않았다. 내가 거기까지 설정을 짜기엔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작가에게 천대를 받고 비밀에 싸여 있는 것처럼 포장된 밤의 거리였지만, 나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샬럿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대부분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베르너가 밤의 거리를 소탕하는 것도 소설에서 제법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밤의 거리를 칠 수 있는 계기를 지금 당장 마련해 주는 것도 소설의 빠른 완결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샬럿은 두피가 당겨서 아픈 건지, 눈물을 애처롭게 흘리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찡그렸던 눈을 떴을 때, 그제야 날 발견했는지 눈을 부릅떴다. 샬럿은 이리저리 발버둥 치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술을 연신 애달프게 달싹였다.

“어이쿠, 아직도 팔팔하네. 저희가 이래서 아직 내놓지 못한 겁니다. 교육이 따로 필요할 것 같아서요.”

관리인은 샬럿의 머리채를 뿌리치듯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바로 옆 감옥에서 뭔가 으르렁대는 짐승 같은 음성이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헐벗은 채 탄탄하게 자리 잡힌 근육을 자랑하고 있는 사내가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일라의 언어 버프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걸 보니 제국 공용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쟤가 바로 그 짐승남인 모양이군. 잠깐 스쳐 지나가는 물고기라도 외모는 포기할 수 없었는지 훤칠하니 잘생겼다.

그는 내가 샬럿을 헤치기라도 할 거라 여긴 건지 살기 어린 눈으로 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왕 온 김에 저 남자도 풀어 줘야겠네. 그럼 알아서 갈 길 가겠지.

나는 일부러 짐승남이 마음에 든 것처럼 그의 구릿빛 피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척을 했다. 그러자 킬리안 쪽에서 그대로 내 얼굴이 뚫려 버릴 듯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어쩐지 따가운 볼을 문지르며 킬리안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림처럼 빙긋 웃고 있는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뭘까, 저 감정을 조금도 읽을 수 없는 표정은…….

‘음…… 너무 변태같이 쳐다봤나.’

생각보다 연기가 좀 과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속으로 반성하며 다시 관리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난 팔팔한 쪽이 좋아.”

“그럼 이 상품으로 하시겠습니까?”

관리인은 샬럿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안심하라는 듯 빙긋 웃어 준 뒤에 손가락으로 짐승남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응. 그리고 쟤도 줘.”

“예? 하지만 저건 다루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할 텐데요.”

“내 취향이 뭔지 다시 말해 줘?”

“……아뇨, 아닙니다.”

관리인은 튼튼한 장난감을 운운했던 내 말을 떠올렸는지 순순히 샬럿과 짐승남을 감옥에서 꺼냈다. 그리고 도망가지 못하게 족쇄와 목줄, 수갑을 꼼꼼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짐승남이 한차례 날뛰었는데, 그러기가 무섭게 직원들이 다 달려들어 그를 제압했다. 다루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더니 아무래도 저렇게 반항하는 게 짐승남 나름의 통과 의례였던 모양이었다.

역시 부족의 전사. 그런데 애초에 여긴 대체 어떻게 잡혀 온 거람.

샬럿은 나와 짐승남, 그리고 킬리안을 번갈아 보면서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전혀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쟤도 고생이 많다.’

친구라고 믿었던 백작 영애를 따라 나왔다가 배신도 당하고, 심지어 노예로 팔려 갈 뻔하고.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망정이지, 소설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갔으면 앞으로 트란디아 공작에게 붙잡힌 감금 생활이었다. 아주 파란만장하네.

하지만 샬럿, 네가 오늘 내 계획대로 잘 따라와 준다면 고생도 이걸로 끝, 꽃길 황태자비 인생이 펼쳐질 거란다.

“상품의 가격은 각각 5천만 골드. 총 1억 되겠습니다, 고객님.”

관리인은 내게 노예 증서를 내밀면서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가 따로 없을 만큼 엄청난 금액을 불렀다.

하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선뜻 돈을 내밀었다. 내가 돈을 쓸 일이라고는 가끔 소설 한정판 주문하면서 취미 생활하고, 드레스를 만들기 위한 천을 공수하고 구매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동안 사용하지 않고 계속 쌓아 뒀던 용돈이 꽤 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고작 이 정도의 사치로는 우리 가문의 금고에 기별도 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물론, 나중에 노예를 구매한 사실이 들통 나면 한 소리 들을 각오는 해야겠지. 하지만 이건 샬럿을 구해 내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니까 선뜻 넘어가 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때, 샬럿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연한 하늘색 눈동자가 1억이 든 돈 가방을 선뜻 내미는 내 손에 닿아 있었다.

아주 화목하지만 그다지 유복하지는 못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가 보기엔 생소한 광경이었던 걸까?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짙게 가라앉은 눈빛이 뭐랄까 굉장히…….

뭔가 싸한 기분을 느끼려고 할 때쯤이었다. 샬럿이 마치 우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착각?’

……치고는 좀 묘하긴 했지.

아무리 천사표 여자 주인공이라고 해도, 금수저의 돈지랄 앞에서는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꼈겠지. 나도 28년간 계속 흙수저로 살아왔으니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샬럿은 조만간 신데렐라의 성공 신화를 뒤따라 황태자비로 화려하게 데뷔하게 될 테니 걱정할 게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가 원하면 베르너가 뭐든 다 해 주지 않나?

“이건 제가 끌고 가겠습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킬리안이 짐승남의 목줄을 콱 잡아당기며 말했다.

여전히 가면처럼 웃고 있는 킬리안의 얼굴에서 귀축의 향기가 짙게 흘렀다. 상관은 없다만, 못 본 새 짐승남에게 무슨 유감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손길이 매우 거치시군요.

“그럼, 아가씨. 천천히 용건 보시고 오시지요.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킬리안은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한 뒤, 반항하는 짐승남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저렇게 버둥거리는데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끌고 가다니, 역시 아무리 짐승남이라도 킬리안에게는 안 되는 건가.

밖에 있겠단 말은 밖에 아예 나가 있겠다는 뜻 같은데 필요하면 어떻게 부르라는 걸까.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그라면 얼마나 떨어져 있든 부른다고 못 올 것도 없을 것 같다.

“마차를 불러올까요?”

내가 일시금으로 대금을 치르자, 관리인의 얼굴은 전보다 더 화색이 돌았다. 나는 표정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건 됐고, 혹시 내가 이곳 손님 중 한 분과 잠시 얘기 좀 나누고 싶은데 잠시 자리 좀 마련해 줄 수 있어?”

그러자 그는 언제 실실거렸느냐는 듯 갑자기 표정을 굳히며 정색했다.

“안 됩니다. 우리 호텔은 고객님의 개인 정보에 관해선 철저하게…….”

나는 말없이 금화가 든 주머니를 그의 손에 얹어 주었다.

그러자 관리인이 ‘에헤이~ 넣어 두십시오. 저희 그렇게 쉬운 호텔 아닙니다.’ 하면서 밀어내려고 하기에 주머니를 두 개 더 얹어 주었다.

그러자 쉬운 관리인이 잠시 흔들리는 눈빛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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