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악녀 메이커 55화
나는 갈팡질팡하는 그의 망설임을 한결 덜어 주기 위한 말을 속삭였다.
“개인 정보라든가 그런 거창한 거 필요 없어. 그냥 만나서 몇 마디 나누고 깔끔하게 물러날 거니까.”
“……이렇게 간절히 부탁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일단 그분께 말씀만 전해 보겠습니다.”
세상에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혹시 돈이 모자란 건 아닌지 확인해 봅시다.
나는 인생의 진리를 다시금 깨우치며 얼마 지나지 않아 트란디아 공작과 대면할 수 있었다.
* * *
“메르텐시아 영애, 영애와 내가 이런 곳에서 따로 만날 정도로 살가운 사이였던가?”
트란디아 공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호텔 객실에 들어서자 그는 예상대로 굉장히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베르너에게 받은 임무를 수행하려고 왔는데 갑자기 친하지도 않은 영애가 사적인 이유로 불러내니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분명 방해받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네가 이걸 보고도 그런 험악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등 뒤에 숨어 있던 샬럿을 짜잔― 하고 앞으로 꺼내 보였다. 그러자 트란디아 공작은 누가 봐도 샬럿인 샬럿을 보고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아니, 너는!’ 하는 시선이다.
혹시 소설과는 달리 이번에는 단박에 알아본 건가? 하긴, 아무리 그래도 머리카락과 눈 색 좀 바뀌었다고 못 알아보는 건 역시 좀 아니지?
마침내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 노예는 누구지?”
진심이냐고.
“각하, 제대로 보세요. 이 얼굴을.”
“아름답군.”
“그게 아닙니다. 물론, 아름답긴 합니다만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으세요?”
“안젤로 영애와 굉장히 닮았어.”
“닮은 게 아니라 본인입니다.”
“하지만 영애는 금발에 푸른 눈이 아닌가. 그 노예는 모두 갈색이고.”
아, 이 인간 진짜 심각하다.
하긴 나중에 샬럿이 그의 저택에서 탈출한 뒤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그 노예가 샬럿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인간인데 어련하시겠어.
나는 조금 전에 이곳에서 구매한 물약을 품속에서 꺼내 샬럿에게 먹이려고 했다.
그녀는 처음에 고개를 저으며 완강하게 거부했지만, 내가 목소리가 돌아오게 해 주는 약이라고 설명해 주자 반항을 잠시 멈췄다.
“…….”
샬럿은 나를 경계 어린 시선으로 보더니 트란디아 공작 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결정을 내린 것인지 물약을 조금씩 홀짝였다.
아무리 그 소문의 아일라라도 설마 다른 사람, 그것도 제국 3대 공작 가문 중 하나인 트란디아 공작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허튼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 그런 판단 끝에 물약을 마시기로 한 모양이었다.
뭐야, 아무 생각 없이 마냥 천진난만한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사리 분별할 수 있잖아? 작가조차 몰랐던 샬럿의 새로운 면모였다.
그런데 왜 백작 영애의 초대에 한 치의 의심 없이 쫄래쫄래 쫓아와 노예로 붙들렸담. 분명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을 텐데.
“아, 아아.”
샬럿은 큼큼, 하고 몇 번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살짝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곧바로 목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저런 모습을 보면 사람을 그렇게 쉽게 덥석 믿는 것 같지도 않고?’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 붕괴에 심히 당황하다가 나는, ‘어쩌다 한 번 노예로 팔려가 보니 경각심이 생겼나 보지’ 하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하지만 이내, 샬럿은 소설 속에서 온갖 위기란 위기는 다 겪어도 한결같이 어벙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대체 뭐람.’
그때였다.
샬럿이 청아한 목소리가 내 혼란스러운 상념을 깨웠다. 그녀의 음성은 곧 눈물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물기가 가득 어려 있었다.
“전 샬럿 안젤로가 맞습니다, 각하.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잠시 노예 경매장으로 끌려갈 뻔했지만요.”
“그런……!”
충격을 받은 트란디아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우당탕하면서 뒤로 넘어갔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놀란 트란디아 공작은 잠시 굳어져 있다가 나를 돌아보며 낮아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대의 짓인가?”
내가 바보냐? 샬럿을 노예로 팔고 굳이 다시 사들여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뒤에 목소리를 원래대로 돌려주게?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건지, 그건 무슨 새로운 자살법이란 말인가.
공작이라는 사람이 생각을 좀 하고 말했으면 좋겠다며 속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샬럿은 내가 터무니없는 의심을 받자 내 앞을 마치 보호하듯 가로막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런 말씀 말아 주세요! 메르텐시아 영애는 절 도와주셨는걸요!”
크, 역시 천사표 여자 주인공.
주요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나만 보면 경계하고 의심하기에 바빴는데, 너는 그래도 나를 감싸 주는구나. 이런 게 홀로 잘 큰 딸을 보는 기분인 걸까.
그런데,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샬럿이 울먹이면서 말을 이었다.
“비록 메르텐시아 영애께서 왜 제가 안젤로 자작 가문의 여식이라는 걸 밝히지 않고 절 사들이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왜 다른 건장한 남성 노예까지 사들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결국 눈가에 맺힌 유리구슬 같은 눈물을 또르르 떨어트렸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틀어 눈을 깔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어떻게 하면 가장 가녀려 보이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분명 나쁜 뜻은 없으셨을 거예요. 저를 안전하게 구해 주려고 하신 거지요?”
음?
“하지만 그 남성 노예분은 상심하고 있는 절 많이 위로해 주신 분이었어요.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좋으신 분 같았는데…… 도주에 성공하셔서 자유를 되찾으시길 바랐는데…… 결국 팔려 가셨군요.”
으음?
듣고 보니 샬럿이 충분히 오해하고 속상해할 만한 상황이기는 했다.
물론, 그렇기는 한데.
음? 굳이 이 상황에서 저런 식으로 울먹이며 트란디아 공작에게 언급했어야 할 부분인가? 그냥 나한테 직접 왜 그랬는지 평범하게 물어보면 안 되나?
그리고 샬럿의 말을 천천히 되새겨 봤을 때 내 행동이 악의로 가득 차 있다고 확신 지은 듯한데, 굳이 ‘분명 나쁜 뜻은 없으셨을 거예요.’라고 말을 붙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 이번만큼은 싸한 것을 넘어 느낌이 굉장히 이상했다. 아무래도 착각일 수가 없는 것 같은데.
“메르텐시아 영애, 왜 굳이 안젤로 영애를 노예로 사들인 거지? 혹시 다른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닌가?”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트란디아 공작은 이제 거의 나를 확신범으로 생각하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정작 샬럿을 사들여서 감금한 건 자신이면서 날 파렴치한 보듯 보고 있다니. 비록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니 기가 막힌다.
‘하여튼, 이놈이고 저놈이고.’
베르너를 포함한 이곳 주, 조연들은 대체로 사랑에 눈이 멀어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하니 아무래도 웬만해선 상대하지 않는 게 좋겠다.
나는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는 이 소설의 그 누구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간에 미혼의 귀족 영애가 노예로 팔려 갈 뻔했다는 건 대단한 흠이었다. 어디까지나 납치를 당해, 혹은 계략에 넘어가서 노예로 끌려왔다고 해도 일절 상관없었다. 그 영애의 혼삿길은 그 길로 끊겼다고 봐도 좋았다.
소설에서 베르너가 샬럿이 그렇게 험한 꼴을 당했는데도 이 카지노 호텔을 뿌리까지 탈탈 털어 내지 못한 건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직 미혼인 그녀를 지켜 내기 위해서. 만약 샬럿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도 그녀의 앞길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러니까, 만약 내가 샬럿을 정말 구해 줄 생각이었다면 그녀의 정체를 이곳 직원들에게 은밀히 알리고 노예 증서를 없애 버린 뒤 몰래 빼내 주어야 했을 것이다.
보통 노예라는 것을 상징하는 목걸이는 검은색 띠 모양으로, 마법이 걸려 있어 맨손으로 억지로 끊어 내려고 하면 폭발하게 된다. 유일하게 목걸이를 끊어 내는 방법은 바로 목걸이와 마법으로 연결된 노예 증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찢어 버리든, 태워 버리든.
하지만 나는 굳이 샬럿을 노예로서 사들인 다음에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채우고 노예 증서까지 챙겼다.
게다가 곧바로 트란디아 공작과 만남을 원한 데다가, 거기에 샬럿을 데려오기까지. 가만 보면 마치 협박이라도 하러 온 것 같았다.
확실히 오해할 만은 해.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범죄자 취급하니 짜증이 안 나는 건 아니었지만.
만약 원작 아일라였다면 이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왜 사람을 나쁜 년 만들고 울고 자빠졌느냐’며 샬럿에게 윽박지르면서 길길이 날뛰었을까? 아일라는 억울한 오해를 받았을 때 울컥 화부터 내고 보는 성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더 침착해질 수 있었다.
“일단은 울지 마시고 진정하시죠.”
나는 눈물로 얼룩진 샬럿의 얼굴을 그저 멀뚱히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아무런 동요도 없자, 샬럿은 놀랐는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러자 트란디아 공작이 그 즉시 내게 달려들 것처럼 다가왔다.
“설마, 지금 그대가 안젤로 영애를 울려 놓고서 타박하는 건가?”
어이쿠, 무서워라.
나는 샬럿과 내 사이를 가로막은 뒤, 나를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쓸데없이 위압감을 조성하는 그를 보며 대답했다.
“위협이라뇨? 지금 위협을 하는 건 각하이신 것 같은데요.”
“하, 영애는 대체 뭘 잘했다고 그렇게 당당한 건지 모르겠지만…….”
“대화가 될 상태였으면 한다는 거죠. 미리 설명해 드리지 않은 제 잘못이고 충분히 겁이 나실 만한 상황인 건 이해합니다만, 제 억울함을 토로할 시간 좀 주셨으면 하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을 뒤적여 노예 증서를 꺼냈다.
그러자 트란디아 공작은 내가 이 노예 증서를 빌미로 그에게 협박이라도 할 거라 생각했는지 대놓고 내게 살기를 흘렸다.
정말이지, 이 다혈질은 사람이 말할 틈이라는 걸 주지 않네. 나는 제발 그가 킬리안의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절반이라도 닮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고 보니 트란디아 공작은 킬리안과 생김새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물론, 킬리안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독보적으로 잘생겼긴 했지만, 외모 계열이 같은 퇴폐 미남 계열이라는 뜻이었다.
‘그래 봤자 킬리안 짭 주제에.’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꿋꿋하게 노예 증서를 펴서 펼쳐 들었다. 그리고 샬럿의 초상화와 인적 사항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면을 내밀었다.
노예 증서에 그려진 초상화는 빼도 박도 못하게 샬럿이었다. 인적 사항도 머리와 눈 색만 마법으로 바뀌어서 다를 뿐 나머지는 정확히 일치할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점이 나 있다는 것까지 적혀 있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를 알아 버렸군.
“역시, 그랬군. 그런 걸로 협박한다고 눈 하나 깜빡할 줄 알았나? 변했다는 소문이 무색하게 영애는 여전히 어리석고 가소롭기 그지없어. 메르텐시아의 이름이 울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