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악녀 메이커 56화
당신 지금 눈 깜빡이고 있는데.
나는 속으로 영양가 없는 농담을 던지면서 피식 웃었다.
그러자 그의 턱이 꿈틀하면서 바짝 힘이 들어갔다. 마치 ‘웃어?’ 하며 이를 악무는 듯했다.
“저는 지금 안젤로 영애께 선택권을 드리려고 한 겁니다. 이 증서를 가지고 어떻게 써먹을지 말이지요.”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이 노예 증서를 파괴하려면 지금 당장 파괴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그대로 끝이지요. 이 카지노 호텔을 무너트릴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 겁니다.”
“뭐?”
“예전부터 이곳을 영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거든요. 수도의 중심가에서 불법적인 범죄 행위가 성행하는 장소가 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예전부터 계속 그렇게 생각했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이지만,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어차피 네가 직접 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소이지 않으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 어떻게 소설과 눈앞의 현실이 같겠는가.
명탐정 ×난 작가가 매화마다 살인 사건을 일으킨다고 해서, 실제로 그 만화 속에 빙의한다면 태연하게 하루마다 일어나는 살인 사건들을 지켜볼 수 있을까?
‘이건 비유가 너무 극단적인가.’
아무튼, 샬럿이야 뭐 여자 주인공인 데다가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어떤 위험에 처하든 어련히 구출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억울하게 끌려온 힘없는 사람들은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결말 즈음에 쓸어버릴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밤의 거리의 꼬리를 잡아 한 번에 쓸어버려야 한 명이라도 피해자가 줄어들지 않겠는가.
내 말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트란디아 공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 아무리 황태자의 명이라지만 그도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중립을 지키는 대표 귀족임에도 황태자의 비밀 임무를 자처해서 수행하고 있는 거겠지.
“안젤로 영애께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준 이 카지노 호텔을 무너트리고, 안젤로 영애의 명예를 한꺼번에 지킬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확신을 담아 말하자, 트란디아 공작은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어느덧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어떤 헛소리를 하든 일단 들어 줄 용의가 생긴 듯했다.
“이 노예 증서의 보증 기간이 끝나기 전에, 안젤로 영애께서 황태자 전하의 고백을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그러자 공작의 등 뒤에 숨어 몸을 감추고 있던 샬럿이 당황한 듯 ‘네?’ 하고 되물었다. 나와 공작이 대화하는 내내 입 한 번 뻥긋하지 않더니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고, 고백을 받아들이라니…….”
“황태자 전하시라면 영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 주실 분이시죠. 그렇게 되면 감히 황태자비가 될 영애를 건드린 이곳과 뿌리가 되는 밤의 거리까지 수사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러면 제국 땅에서 악의 소굴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겠죠.”
어떠냐, 내 약 파는 소리가.
어차피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과 이어질 운명. 굳이 길게 시간 끌어 봐야 주변에 피해밖에 더 주겠어?
솔직히 샬럿이 무의식중에 어장 치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긴 한데, 평생 보답 받지 못할 사랑을 하게 될 걔들도 생각해 보면 불쌍하잖아.
그러니 괜한 희망 고문 하지 말고 짝사랑을 얼른 잊게 도와주고, 새로운 사랑을 찾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전 아직 그럴 마음이…….”
그런데 샬럿은 트란디아 공작의 등 뒤에 꼭 숨어서 이렇게 대꾸했다. 둘의 체구 차이가 엄청나서 그녀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공작이 샬럿의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듯한 이상한 광경이로군.
“전하의 고백을 거절하실 생각이신가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아, 아뇨! 그건 아니고,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라…….”
“그렇군요, 대답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군요. 그렇다면 이 노예 증서의 보증 기간 안에 충분할까요?”
한 달 정도면 충분한 기간이겠지 생각하고 물었는데, 샬럿 쪽에서 대답이 없었다.
나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공작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 또한 어쩌다가 나와 샬럿의 사이에 끼어 버린 구도라 뻘쭘한 기색이었다.
쯧쯧, 그러니까 왜 굳이 우리 둘 사이를 파고들어 와서 섰니. 네 딴엔 샬럿을 지키려고 한 행동이었겠지만, 마치 전봇대를 사이에 두고 대화하고 있는 기분이잖아.
내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는 사이, 침묵과 민망함을 이기지 못한 트란디아 공작이 나를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처음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나는 그 말에 정말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그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며 되물었다.
“여기서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라도 있나요?”
자, 봐라. 내 결백을 주장하는 눈빛을.
그러자 공작은 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슬쩍 눈을 피했다.
“하지만 영애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하를 마음에 품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선뜻 양보할 수가 있는 거지?”
그는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거야 내가 아일라 본인이 아니기 때문이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기에 그럴듯한 변명을 했다.
“전하의 마음에 제가 전혀 없는데, 어찌 그걸 양보라고 하겠습니까.”
소설에서 아일라가 베르너를 쫓아다니며 무슨 짓을 했었더라.
베르너에게 조금이라도 접근하는 여자가 있으면 패악을 부려 쫓아내고, 스토커 뺨치게 쫓아다니면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사랑해 달라 구걸하고. ……정말 내가 이렇게까지 변한 게 의아할 만하군.
베르너도 생각해 보면 짠한 피해자였다. 내가 아마 그였다면 아일라를 제국 밖으로 추방했을 거야.
“그냥, 서로 원하는 상대가 엇갈렸을 뿐이지요. 절 이성으로조차 보지 않는 이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것이 그분께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죄송할 따름이죠.”
일단 담백하게 그렇게 말해 보았다.
내 미련이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고백에 트란디아 공작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듣고 보니 메르텐시아 영애의 말도 맞아.”
“네?”
누가 봐도 샬럿에게 마음이 있어 보였던 트란디아 공작이 나를 옹호하자, 샬럿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등 뒤에 숨어 있는 샬럿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젤로 영애, 그대에게 전하의 고백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대답을 언제까지고 기다려야 하는 전하를 생각해서라도 한 달 내로 마음을 결정해 줬으면 좋겠군.”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트란디아 공작은 그렇게 말했다.
오, 쟤 생각보다 아직 이성은 남아 있는 상태였구나.
샬럿에게 아주 제대로 빠지면 그녀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텐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강화 기간에 막 진입하는 순간에 내가 타이밍 좋게 끼어든 덕분인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의 말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전하의 고백을 받아들이시면 고통 받는 무고한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영애께 어떻게 사랑을 강요하겠어요?”
“그래, 그럴 필요 없지.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냥 황태자 전하께 네 마음만 들려주면 되는 문제다.”
트란디아 공작과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했다. 아무래도 그의 입장에서는 샬럿이 빨리 베르너를 거절해야 본인에게도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나와 대화를 맞춰 주는 게 아닐까?
그와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데 샬럿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샬럿은 공작의 등에 대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전하께 마음을 품었던 영애들이 저는 너무도 불쌍해서…….”
그러고 보니 그런 설정이었던가?
뭐, 아주 착하고 오지랖이 태평양처럼 넓으면 그럴 수도 있지. 샬럿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아일라까지 동정했을 정도로 천사표였으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좀 이상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갸우뚱 기울였다.
“기약 없는 대답을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전하 쪽은 가엾지 않으신가요? 저였다면 굉장히 상처 받았을 것 같습니다만.”
“…….”
또 대답이 없다.
‘아, 답답하네……. 좀 얼굴 좀 보여 주고 얘기하지. 나도 어릴 때부터 계속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또 쳐다볼 상대가 없어서 트란디아 공작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난감한 기색을 보이더니, 샬럿을 등 뒤에서 꺼낸 뒤 내 앞에 마주 보도록 세웠다.
몇 분 만에 겨우 다시 마주한 샬럿의 얼굴엔 울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대신, 무슨 부끄러운 일이라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새빨개져 있었다.
이제 좀 대화할 상태가 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샬럿은 아까보다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와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노예는요?”
“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에 미간을 구기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황태자의 고백을 한 달 안에 대답해 달라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노예?
“저와 같이 사들이신 그 남성분이요. 역시 노예로 쓰시려고 사신 거 아닌가요? 저는 메르텐시아 영애에 관한 뜬소문 같은 건 잘 믿고 싶지 않지만, 아무래도 제게 은인 같은 분이라 걱정이 되어서…….”
샬럿은 다시 목이 메는 것인지 말끝을 흐리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아까부터 계속 걸고넘어질 정도로 그렇게 짐승남이 소중한 사람이었나? 소설의 전체적인 비중을 떠올리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할 텐데.
그리고 지금까지의 내가 한 말을 떠올리면, 내가 얼마나 이곳 카지노와 밤의 거리를 탐탁지 않아 하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내가 짐승남을 노예로 쓰려고 사들인 거라면 굉장한 이중잣대 아닌가.
‘이상하네…….’
왜 자꾸 샬럿이 날 악역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일까.
나는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품속을 뒤적여 짐승남의 노예 증서를 꺼냈다. 그리고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객실 한편에 자리 잡은 책상 위로 향했다.
“오늘은 우연히 노예로 잡혀 온 한 사람밖에 구해 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책상 위에 놓인 촛불 끝에 짐승남의 노예 증서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증서에 불꽃이 붙어 끝에서부터 활활 타올랐다.
“언젠가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구해 내고 싶네요. 진심으로요.”
증서는 빠르게 불이 붙어 어느새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걸로 짐승남의 목에 걸려 있었던 노예용 목걸이는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킬리안은 갑자기 들고 있던 목줄이 연결된 목걸이가 사라져서 킬리둥절 하고 있겠네. 이래서 나중에 킬리안과 다시 만난 뒤에 증서를 태우려고 했던 건데.
짐승남의 노예 증서를 다 태운 뒤에 등을 돌리자, 샬럿이 경악이 어린 얼굴로, 그리고 트란디아 공작이 감정을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