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악녀 메이커 57화
왠지 물러나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이 되어 버렸다.
샬럿에게 얼른 베르너와 이어져 버리라고 좀 더 닦달하고 싶었는데, 흑흑.
나는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샬럿의 노예 증서를 반듯하게 반으로 쭉 찢었다. 그러자 샬럿의 목에 걸려 있던 검은 목걸이가 뚝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허전해진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내가 증서를 가지고 자신을 협박하리라는 의심을 끝까지 버리지 못한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두 개로 나뉘긴 했지만, 읽는 데 문제가 없으니 충분히 증거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추적 마법을 걸어 보면 마법이 걸렸던 흔적도 찾아낼 수 있을 거고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샬럿의 작고 고운 손에 반으로 찢어진 증서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 협박도 회유도 하지 않은 채 깔끔하게 물러나기로 했다. 마지막까지 질척거렸다가 괜히 거부감이 인 샬럿이 베르너를 차 버리면 어떡한단 말인가.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이걸로 소설이 완결 나길 바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킬리안에게서 배운 가면 같은 미소를 지어 준 뒤에 그대로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 뒤로도 샬럿이 베르너의 고백을 받아들였다는, 혹은 거절했다는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 * *
“베르너.”
“…….”
“베르너?”
“…….”
“베르너!”
“……아, 불렀나?”
베르너는 그의 유일한 심장, 샬럿이 살짝 언성을 높이고 나서야 상념에서 벗어나 느릿하게 대꾸했다.
언제나처럼 본인의 일상을 재잘재잘 떠들고 있던 그녀는 귀엽게 볼을 부풀리며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세요! 딴생각이나 하시고.”
“미안하군. 요즘 일정이 바빠서.”
“아……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괜한 투정을 부려서 죄송해요…….”
샬럿은 순순히 사과했지만 어쩐지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무리 바빠도 자신의 말에 소홀했던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녀의 가족들, 주변 지인들, 길거리에서 처음 마주친 사람까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샬럿이 입을 열면 모두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심지어 시비를 걸거나 수작을 부리기 위해 접근한 이들마저 샬럿이 말을 꺼내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어딘지 기이한 현상이었지만 샬럿에게는 그게 바로 일상이었다. 오히려 그녀로서는 영원의 사랑을 맹세한 상대가 자신의 앞에서 넋을 놓고 있는 것이 정상이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샬럿은 콧잔등을 귀엽게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하다 보니 수확제 첫날 무도회의 끝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경험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때는 베르너와 단둘이 정원에 나와 즐겁게 춤을 추고 있을 때였다.
“어머, 셉티무스 님.”
샬럿은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대마법사 셉티무스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베르너는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샬러엇―”
셉티무스는 콧소리를 내며 샬럿을 껴안기라도 할 것처럼 양팔을 활짝 벌리며 서서히 가까워졌다. 베르너는 그녀를 더욱 바짝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위협하듯 으르렁거렸다.
“셉티무스, 내가 분명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뭐 어떻습니까. 이름쯤이야 부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셉티무스는 특유의 유들거리는 말투로 받아치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웬일인지 늘 에너지 넘치는 모습과는 달리 어딘지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샬럿은 그런 그를 의아한 얼굴로 살피다가 화들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자세히 보니 그의 로브 곳곳이 찢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붉은 피마저 비쳐 보였다.
“무, 무슨 일 있으셨어요? 혹시 누구와 싸우기라도 하신 건가요?”
셉티무스는 겉모습에 많이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언제 마주쳐도 그의 새하얀 로브에는 작은 얼룩 하나 보이지 않았고, 늘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그게 때로는 바람둥이 같으면서도 그만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샬럿이 아는 한 이렇게까지 흐트러진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디서 구르고 오기라도 한 건지.
“싸워? 아니, 일방적으로 당했지.”
샬럿은 셉티무스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무 걱정되어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절대 자신의 손을 뿌리치지 않으리란 자신감 또한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자 셉티무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기울여 제 뺨 위에 얹어진 그녀의 손바닥에 무게를 실었다.
“아, 역시 샬럿이야. 치유된다.”
마치 애교를 부리는 듯한 그의 움직임에 샬럿이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손을 떼어 냈다.
“다치신 곳은요?”
“없어, 없어. 정말 이대로 죽는 건가 싶긴 했지만 괜찮아, 하하.”
베르너는 이를 갈며 샬럿의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뒤 낮게 읊조렸다.
“누가 감히 손대도 된다고 했지?”
“제가 댔나요? 샬럿이 댔지.”
“네 뺨이 샬럿의 손을 만졌잖아.”
“예? 세상에, 그건 또 무슨 억지람.”
셉티무스는 황당해하면서도 순순히 한 걸음 물러났다.
가만히 버티기에는 베르너의 분위기가 심히 흉흉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얼굴에 장갑을 던지며 결투를 신청할 기세라 오히려 샬럿이 당황하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그러지 마세요, 베르너.”
그녀가 불안한 표정을 짓자, 베르너는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진 기색으로 달래듯 다정한 음성을 냈다.
“샬럿, 난 괜찮으니 물러나 있어.”
그린 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낸 베르너는, 샬럿을 등 뒤로 보내자마자 다시 위협적인 음성으로 속삭였다.
“대마법사인 그대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도 모자라 목숨의 위협까지 느꼈다니, 거짓말도 그쯤이면 수준급이야. 상냥한 샬럿의 동정심을 끌어내기 위해 개수작을 부리는군.”
“저런, 그런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말씀을.”
셉티무스는 베르너의 경고에 귀엽다는 듯 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죽음조차 거부하는 두려운 존재가 있지요. 황위를 물려받을 시기가 가까워져 오면 폐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실 겁니다. 수면 밑에 잠긴 진실의 이면은 생각보다 깊고 어둡다는 것을요.”
“무슨 소리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는 소리입니다.”
“……뭐?”
“모르십니까? 고대 신화인데.”
“하…… 됐다. 그대와 깊이 말을 섞고자 했던 내가 어리석었군.”
베르너는 셉티무스를 상대하는 것조차 피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는지 흥분을 가라앉히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대마법사와의 대화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베르너가 아직 젊다는 것을 낮잡아 보고 대부분 질문은 여유로운 척 선문답으로 받아친다. 오히려 저래도 되는 건지 듣고 있는 샬럿이 조마조마해졌다.
물론,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는 셉티무스이기에 건방지게 굴어도 어느 정도는 용인되겠지만.
“걱정해 주지 않아도 돼.”
그때, 샬럿의 시선이 딱 마주친 셉티무스가 그녀를 향해 찡긋 윙크했다. 샬럿이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베르너의 등 뒤로 숨자, 셉티무스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는 내가 병풍으로 보이는 모양이군.”
“제가 감히 그럴 리가요.”
셉티무스는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
“전하, 전부터 내심 생각했습니다만 많이 변하셨네요. 샬럿과 관련되기만 하면 여유를 잃으시니…….”
셉티무스는 무서워서 어디 다가갈 수나 있겠냐고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이다가, 이내 눈 사이를 가늘게 접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황태자를 놀려 볼까 하는 짓궂은 미소였다.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 한 번 파트너 했다고 샬럿을 연인처럼 생각하고 계시는 건 아니겠죠?”
“…….”
“그렇게 따지면 저는 만인의 연인이겠네요? 이곳에 모인 영애 중 절반은 저와 파트너를 한 적이 있으니까요. 제가 아무리 잘나가는 대마법사에 여자를 밝힌다지만, 그 많은 영애를 감당할 능력은 없습니다?”
셉티무스는 황태자씩이나 되어 그런 촌스러운 생각이라도 한 거냐는 듯이, 연애 한 번 못해 본 베르너를 향해 경박하게 비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샬럿에 한해서 이성을 잃는 베르너라고 해도 그 정도 도발에 눈 하나 깜짝할 리가 없었다.
베르너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그대가 이 여자 저 여자 가볍게 들이대는 호색한이란 게 그렇게 당당히 자랑할 만한 것이던가?”
“뭐, 딱히 자랑은 아닙니다만 그것도 능력 아니겠습니까? 경험이 없는 것보단 훨씬 낫지요.”
“마음을 준 적 없다고 해서 경험이 없는 건 아니다.”
“그게 더 질 나쁜 게 아닙니까?”
두 남자의 영양가 없는 말다툼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샬럿은 익숙하면 익숙하다 할 수 있는 광경에 한숨을 삼켰다. 오라버니들도 나와 같이 놀고 싶을 때 저렇게 티격태격하고는 했지.
샬럿은 생각했다.
‘날 독점하려 하지 말고, 그냥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낼 수는 없는 걸까?’
괜히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새우 등 터지게 생긴 샬럿은, 애처롭게 끙끙거리며 그들을 말리려 노력했다.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샬럿은 그 말을 뱉으면서까지 한 치의 의심도, 망설임도 없었다. 당연히 자신을 두고 싸우는 건 줄 알았다. 대화의 흐름 또한 그랬고, 그러지 않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샬럿의 말을 들은 셉티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하하 웃으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 오해하게 했구나? 미안해. 사실 할 말이 있어서 왔거든, 샬럿.”
오해라니. 뭐가 오해라는 거지?
그때까지도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샬럿은 고개를 귀엽게 갸우뚱하며 순진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날, 정원 앞에서 처음 너를 마주쳤을 때, 내가 너를 멍하니 넋 놓고 바라봤잖아. 네 주위로 마나가 춤추듯이 뛰어놀며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거든. 그런 건 정말 처음 봤어.”
세계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이런 거겠구나 싶었다니까, 하고 덧붙이며 셉티무스는 본인만 아는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샬럿은 그의 말을 이해하긴 어려웠으나 일단 얌전히 경청했다.
베르너 또한 그랬다. 그는 셉티무스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눈치껏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유치한 말다툼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묵묵하게 침묵하며 서 있었다.
“네 손이 닿으면 다 죽어 가던 식물도 생기를 되찾고, 야생 동물들도 네 주위를 빙빙 돌면서 모여들더라. 그건 정말, 그야말로 ‘마법’ 같았어. 누구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잖아.”
어…… 잠시만.
이거, 고백?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샬럿의 볼이 타오를 것처럼 붉어졌다.
‘어떡하지? 나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하지만 거절하기엔 미안하니까 일단 기다려 달라고 할까? 그, 그래. 지금껏 그래 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