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악녀 메이커 58화
그에겐 너무 감사하지만, 갑작스러워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대답해야겠다. 그녀는 셉티무스가 고백을 꺼내기 전에 무슨 대답을 들려줘야 할지 미리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이어지는 셉티무스의 말은 샬럿의 기대와는 너무도 달랐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에 가까웠다.
“네게 정말 진심이 될 뻔도 했어.”
했어? 과거형이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려고.”
“……네?”
“잠잠했던 악몽의 날이 다시 찾아온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안이한 생각들이 싹 다 날아가는 거야. 코앞에서 상상의 동물인 드래곤이 나타나 브레스를 뿜기 전, 숨을 들이켰을 때의 그 무력함? 종말의 날이 다가왔을 때 홀로 남겨졌을 때의 공허함?”
셉티무스는 다분히 연극적인 어조로 가슴을 쥐어짜는 시늉을 하더니, 하고 싶었던 말이 끝나자 고개를 들어 올리고 빙긋 웃으며 물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다 부질없어. 불장난은 이제 그만두고,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나만의 피앙세를 찾아 떠나겠어. 서로를 의지하고 따뜻하게 품어 줄 내 사랑을.”
샬럿은 혹여 그에게 고백받을까 두근두근 뛰던 심장이 싸늘하게 식고 표정 또한 어색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미쳤나…….’
절로 시선에 경멸이 어리려고 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그렇게 셉티무스는 영원의 사랑을 운운하더니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샬럿이 사람의 등 뒤에 대고 침을 뱉고 싶은 충동을 느꼈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사람 헷갈리게 굴더니.
웃고, 윙크하고, 갑자기 덥석 껴안기도 하고, 만지면 받아 주고, 멋대로 만지기도 하고, 귀엽다는 듯 웃고, 애교 부리고……. 그렇게 대놓고 호감을 내비치더니 갑자기 피앙세는 무슨 소리야?
‘나는 피앙세가 아니라는 거야?’
“왜……?”
어떻게 아닐 수가 있지?
이제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진 샬럿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을 상대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조금도 섭섭한 기색 없이 저렇게 쉽게 물러날 수가 있다는 게 의아했다.
‘나는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샬럿은 셉티무스가 갑자기 고백한다고 해도 그의 마음을 당장 받아 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의 곁에 끝까지 남아 있을 거란 생각은 품고 있었다.
그를 사로잡았다고 확신했으니까.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 중에서 베르너 다음으로 잘생겼고, 지위도 높고 능력도 좋으니까, 멋있으니까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계속 있을 줄 알았다.
영원히 떠나지 않을 줄 알았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나는 그래야 하니까.’
모두의 관심 속에서, 부러움 속에서 둘러싸여 행복해야만 하니까. 세계의 사랑을 받는 나는 누구보다 가장 뛰어난 것들을 누려야 하니까.
‘저건 내건데?’
내 거잖아.
저만큼 잘나가는 남자는 내가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 게 맞잖아. 내가 아니면…… 누가 가져?
샬럿은 이미 사라져 버린 셉티무스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왠지 텅 빈 것 같은 손바닥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짙은 상실감이었다.
베르너는 거슬렸던 연적이 알아서 떨어져 나간 것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인지 낮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현실주의자였군.”
현실? 날 버리고 떠나는 게?
그제야 멍하니 서 있던 샬럿이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얼굴을 수치심으로 서서히 물들이기 시작했다.
샬럿의 숨소리가 색색 거칠어졌다. 그녀에게 있어서 순리만큼이나 당연한 것을, 셉티무스가 한순간에 멋대로 ‘착각’으로 만들었으니까.
“하…….”
그리고 다시 지금.
샬럿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결국 한숨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위화감’이 시작된 건 꽤 오래전부터였다.
가장 처음은 폴랑이 갑자기 불쑥 휴가를 냈을 때였다.
샬럿은 단 한 번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적이 없었다. 굳이 누구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어쩐 일인지 알아서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현실감 없는 미남자가 갑자기 뜬금없이 등장해서 자신을 화초 운운하며 대놓고 무시했을 때였다.
모두가 그녀에게 착하고 순수해서 좋다고 했다. 그들이 그녀를 지켜 주겠다며 온실 속에 집어넣고 싸고돌았다.
샬럿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본 적이 없었으나 현실에 안주했을 뿐이었고, 본인이나 주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샬럿에게 온전히 쏟아져야 했을 관심이 모두의 멸시를 사던 메르텐시아 영애에게 동시에 향했을 때였다.
그래, 생각해 보면 거의 모든 원인은 메르텐시아 영애에게 있었다.
샬럿에게 생에 처음으로 수치심을 안겨 주고, 호기심을 불러온 미남자는 그 메르텐시아 가문의 집사였다. 그리고 베르너가 저렇게 넋을 빼고 있는 것도 수확제 마지막 연회에서 아일라가 얼굴에 술을 뿌린 이후부터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이상했어.’
치정 싸움에 본의 아니게 엮여 본 적은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영애들은 샬럿을 철천지원수 보듯 노려보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네가 꼬리 쳤지? 하는 논리였다.
꼬리를 쳤다니, 그런 적 없다. 나는 모두에게 똑같이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 줬을 뿐인데. 그리고 누구라 하더라도 내게 더 마음이 가고 더 끌리게 되는 건 당연한 결과인데.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당연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웬만하면 싸움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싸움에 자신이 없었지만, 대신 다른 무기라면 가지고 있었다.
샬럿이 눈을 내리깔고 조금 겁을 먹은 기색을 보이며 ‘제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다면 죄송해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하고 울먹이면 끝이었다. 상대의 날카로운 검날이 샬럿을 향하기도 전에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쳐 내 주었으니까.
그런데, 최근 들어 사사건건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아일라는 샬럿이 아닌 베르너에게 화살을 돌렸다.
아일라가 화난 것은 베르너이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했다.
그러니 샬럿은 자신의 무기를 내세울 틈도 없었다. 아일라와 베르너의 싸움이 되어 버린 탓에 관계없는 사람이 된 샬럿은 끼어들 수 없었으니까.
그 뒤로 베르너는 틈만 나면 ‘주제도 모르고 건방을 떤 그 여자의 콧대를 꺾어 놓겠다’고 이를 갈았고, 가끔 아일라 때문에 깊은 생각에 잠겨 넋을 놓았다.
샬럿에게 보내는 호감이란 감정과 많이 다른 성질임은 분명했지만, 아니, 오히려 증오에 더 가까워 보였지만 그래도 거슬렸다. 자신을 눈앞에 두고도 딴생각을 할 만큼 신경을 쓰고 있었으니까.
여기까진 괜찮았다.
여기까진 참을 만했다.
하지만 샬럿이 한 백작 영애에게 속아 카지노 호텔 노예 경매장에 팔려갈 뻔했던 그날, 그날부터 모든 게 제대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샬럿에게 계속 꾸준히 호감을 보내다 못해 가끔 질투와 소유욕이 질척하게 뒤섞인 시선을 던지기도 하던 트란디아 공작, 그가 변했다.
그는 최근 들어 샬럿에게 실망에 물든 얼굴을 했다. 노예 사건 이후로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그녀가 아직도 베르너에게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천사처럼, 성녀처럼.
이 세상에 다시없을 여신의 환생처럼 경건하게 우러러보며 찬양하지 않았다. 그냥 하루하루 실망하는 것 같았다.
대체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아직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을 뿐인데.
이게 다 메르텐시아 영애 탓이었다.
그녀가 카지노 호텔을 제국에서 단속하지 못한 게 다 샬럿 탓인 것처럼 만들어 놓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트란디아 공작이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베르너에게 보고하는 바람에, 그 또한 아일라를 새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베르너는 아일라에 대한 관심과 반비례해서 샬럿을 점점 소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점점 지쳐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백에 좀 답이 늦어지면 어때서?
언제까지고 기다리게 하면 어때서?
나는 그저 황태자 전하를 놓치고 싶지 않고, 아직 내 마음을 잘 모를 뿐인데. 어차피 결혼은 인생에 딱 한 번뿐이고 좀 더 다른 남자들과 골고루 친해져서 선택권을 좀 늘려 보고 싶을 뿐인데. 선택은 신중하게 나중으로 좀 미루면 어때서?
왜 계속 방해하지?
왜 계속 내 것을 빼앗아 가려고 하는 거야?
초조함에 속이 다 울렁거렸다.
샬럿이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그때,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샬럿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찔 떨었다.
“없던 버릇이 생겼군.”
“아…….”
베르너는 샬럿의 손을 내려다보며 슬쩍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엄지손톱이 주기적으로 물어뜯겨 울퉁불퉁해져 있었다. 샬럿은 당황하며 손가락을 꼬물꼬물 등 뒤로 숨겼다.
별로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보인 샬럿은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왠지 치부를 들킨 느낌이었다.
“그대를 불안하게 한 건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해서 미안하군. 그래서 무슨 일로 날 불러낸 거지?”
샬럿은 허둥거리다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베르너가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배려해 주는 모습에 샬럿은 서운함이 조금이나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딘지 찝찝했지만, 입 밖으로 투정부리는 일 없이 순순히 입을 열었다.
“전에 가족들과 황궁에 잠시 지낼 거처를 따로 마련해 주신다고 해 주셨잖아요. 어제 몇 주 전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이 왔는데, 가족 모두 제가 많이 그리우신가 봐요.”
“아, 그럴 만도 하지.”
그만큼 떨어져 살았으면…….
베르너는 그간 나눴단 대화를 통해 샬럿이 가족들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자라 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평생 영지 밖을 벗어날 일 없이 가족들 품에서 안온하게 지내 왔을 그녀가 홀로 타지에 나와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베르너는 단지 그들을 데려올 시기를 보고 있었을 뿐, 이미 거처를 봐 둔 뒤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사람을 보내지.”
곧 가족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말에 시무룩했던 샬럿의 얼굴이 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그렇다면, 잠시 안젤로 영지에 내려가 며칠 지내다가 가족들과 함께 올라와도 될까요?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도 만나고 싶어요.”
베르너는 아이처럼 순수하게 기뻐하는 샬럿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그렸다.
“잠시 다녀오는 거라면 안 될 건 없지……. 잠깐, 안젤로 영지로 향하려면 발크 산맥을 통과해야 하지 않나? 최근 대륙 곳곳에서 마물이 나타난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마물은 대체로 숲 인근에서 나타났다. 한때는 ‘마물의 숲’이라고 불릴 정도로 온갖 종류의 마물들로 가득했던 숲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마물이 그곳에 서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손에 의해 그 거대했던 마물의 숲이 쑥대밭이 되어 버린 이후, 뿔뿔이 흩어져 언제 어디서 숨어 있다가 나타날지 알 수가 없어졌다. 한마디로 종류별로 마물의 서식지가 중구난방으로 흩어졌다는 뜻이었다.
“마물이요? 하지만 마물은 멸종된 게 아니었나요?”
수도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평생을 영지 내에서 생활했던 샬럿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마물을 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