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악녀 메이커 59화
“아니, 개체수가 거의 없어지긴 했지만 멸종될 일은 절대 없어. 예전부터 꾸준히 나타나긴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전보다 더 늘어났다는 건가요?”
“그래. 마물들은 마력의 힘만 강력해지면 더욱 개체 수를 늘리니까. 영원히 사라지지는 일은 없을 거다.”
“그 말은…….”
“최근 제국 전체의 신성력이 급속도로 줄어들었거나,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만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지. 신전의 힘이 약해진 적은 없었으니, 아무래도 후자겠군.”
베르너는 그렇게 대꾸하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갑자기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요즘 어딘지 모르게 문득문득 불길함을 느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하지만 연기처럼 희미해서 도저히 흔적을 붙잡을 수도,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그런 섬뜩한 예감이었다.
그러고 보면 셉티무스가 뜬금없이 세상의 멸망을 운운한 것도 이상했다. 그때는 마냥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실없는 허튼소리 속에 교묘한 진실을 감추는 것에 능했다.
‘그 능구렁이가 뭔가 알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대놓고 물어도 항상 대마법사는 느물거리며 상황을 모면하는 인간이라 골치가 다 아팠다. 아마 결정적인 진실은 절대로 말하지 않겠지.
누가 우물 안 개구리란 말인가. 수면 밑에 감춰진 진실의 이면은 대체 뭔데? 황위를 물려받을 시기가 오면 알게 될 거라니, 무시해도 정도가 있었다.
베르너는 갑자기 급속도로 기분이 나빠져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베르너?”
샬럿이 불안한 음성으로 그를 부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베르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마물이 기승을 부리든 아니든, 위험한 건 다를 바가 없으니 기사단을 보내지. 레녹스가 호위기사로 그대 곁을 지킬 거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웃는 얼굴과는 달리, 살짝 가라앉은 새파란 눈동자는 조금도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대는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군.”
“네?”
흘러가듯 중얼거린 말이라 샬럿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녀가 토끼처럼 휘둥그레진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꼭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샬럿은 이상하게 중요한 말은 꼭 못 들었다.
“아니, 혼잣말.”
베르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녀를 안심시킨 뒤,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벌써 가시나요?”
샬럿은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물었다. 오늘 대화 내내 집중하지 못했으면서 이번엔 용건만 듣고 쌩하니 사라지려고 하다니.
“처음으로 그대가 먼저 날 불러 줬는데 유감이야. 나도 웬만하면 그대와 못다 한 시간을 함께하고 싶지만 정말 일이 바빠서 어쩔 수가 없군.”
한동안 뭐에 쓰이기라도 한 듯 사랑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나, 그는 황태자이니 만큼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일은 매일같이 끝도 없이 쏟아졌고 처리해야 할 서류는 집무실에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그러시군요.”
바쁘다니 어쩔 도리가 있나.
샬럿은 머뭇거리며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힘을 풀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의문만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여도 그의 집무실을 찾아가면 기꺼이 맞아 주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샬럿은 베르너가 사무를 보는 동안, 곁에서 책을 읽거나 수다를 떨며 놀고 피곤해지면 소파에서 잠들기도 했다. 그녀는 황태자의 집무실을 제 방처럼 편하게 드나들었다.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아, 곤란한데.”
뭐? 샬럿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충격을 받은 맑고 투명한 푸른 눈이 흔들리는 것이, 마치 하늘이 요동치는 것처럼 보였다.
“카르하만 왕국에서 조만간 사절단을 보내온다더군. 표면적으로는 외교를 맺으러 온다지만, 사실상 카르하만 왕녀와의 혼인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려고 오는 거겠지.”
“호, 혼인이요?”
“물론, 거절할 거다. 하지만 전 대륙으로 통하는 레헤마 항구 독점권을 두고 치졸하게 나오는 바람에 골치가 아파. 마찰을 피하기 위해선 최대한 비위를 맞춰 주는 게 좋겠지.”
“아, 그렇군요. 그런 사정이…….”
샬럿은 순종적으로 대꾸했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가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야 하고 다망하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그것과 자신과 같이 있을 수 없는 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무슨 사정이 있어도 날 먼저 배려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항상 그래 왔잖아요.’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지만, 그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하는 말이었다. 샬럿에게 있어 모든 건 당연했다.
“그래도,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샬럿.”
베르너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살짝 지친 듯한 그의 안색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반듯한 이마가 잠시 드러났다가 금빛 실타래가 그 위로 흐트러졌다.
“그대가 그랬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으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그의 고백이 너무 갑작스러웠고, 아직 자신의 감정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를 남몰래 흠모하던 영애들이 불쌍했다. 그녀들은 평생 보답 받지 못할 사랑을 하고 있었으니까.
특히, 아일라 메르텐시아.
표독스러운 얼굴로 베르너의 얼굴에 술을 쏟아붓긴 했지만, 목멘 목소리로 연회장을 홀로 쓸쓸히 떠나던 뒷모습은 정말 애처로워서…….
아.
정말, 불쌍했나?
자신이 상대를 가엾이 여기면 ‘세상에, 이 기쁜 날 저 마녀를 동정하시다니 심성도 어쩜 이렇게 고우신지. 날개 없는 천사로군요’ 하고 수많은 이들이 그녀를 치켜세웠다.
샬럿은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베르너는 여전히 뭐라고 말을 걸고 있다가, 그녀가 정신이 팔린 채 대답이 없자 부드럽게 웃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은 가면을 닮았다.
“샬럿, 시간이 필요하다면 언제까지고 기다리마. 그러니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가지도록 하지. 그대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잠시 떨어져 지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테니.”
베르너는 화병에서 백합꽃 한 송이를 꺼내 샬럿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가 얼떨결에 백합꽃을 건네받자,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토할 것 같아.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심장이 뛰고 또 속이 울렁거려지기 시작했다. 샬럿은 심장 위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베르너!”
샬럿은 저도 모르게 또 그를 붙잡았다.
벌써 세 번째였다.
오늘따라 자신답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입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저와 레녹스 경을 단둘이 보내도 되는 건가요……?”
‘날 독점하려 하지 말고,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의 일. 하지만 자신을 마지못해도 아니고 선뜻 다른 남자에게 넘겨주다니.
어딘지 모르게 다급해 보이는 샬럿의 표정을 빤히 응시하던 베르너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기사도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레녹스가 그대에게 손을 댈 리가 없지.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레녹스와 함께라면 그대가 위험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그 말을 마친 베르너는 이제 정말 지체할 시간이 없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향했다.
떠났다. 사라졌다.
같이 있자는 날 두고.
‘……거슬려.’
샬럿은 모든 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동안에 한 번도 품은 적 없는 감정을 떠올렸다.
뒤늦게 떠오른 제 생각에 놀라 흠칫 떨었지만, 이게 그동안 드러날 일 없었던 자신의 본심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죄책감은 순식간에 옅어졌다.
그녀는 활짝 피어난 새하얀 백합 꽃잎을 손안에 쥐고 우그러트렸다.
* * *
한 달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내가 납치해 주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면서 지겹도록 편지를 보내는 폴랑을 원하는 대로 납치해 주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황녀를 위한 드레스 작업에 착수했고, 우리는 코델리아에게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드레스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좀 과감하게 도전해 봤다.
현대인이 입을 법한 드레스였는데, 골드 색상의 엠파이어 라인이었다.
상체 가슴 부근에는 꽃 모양 레이스와 진주로 장식을 넣고 전체적으로 반짝거리는 골드 펄로 은은하게 밝혀 주었다. 그리고 치마는 반투명한 하늘하늘한 천을 덧대기도 했다.
솔직히 만들고 나서 너무 파격적이라 염려하기도 했지만, 코델리아는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장식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화려한 느낌이야. 우아하기도 하군.”
그녀는 치맛자락이 마치 사금이 흐르는 황금의 강 같다고 극찬을 퍼부었다. 나도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만큼 황녀 언니가 좋아해 줘서 기뻤다. 그리고 마치 그 드레스를 입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어울려서 뿌듯하기도 했고.
코델리아가 황궁 무도회에서 그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자 수많은 사교계 귀족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악명만 떨치던 아일라와 다르게 그녀는 사교계에서 어느 정도 패션 리더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 관심이 그대로 나한테 옮겨 와서 코델리아 황녀가 입었던 드레스와 비슷한 디자인을 원한다는 주문이 쏟아졌다.
일단 루프부터 처리해야 하는 관계로 다 거절하고 있긴 하지만 요즘 진짜 의상실이라도 차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 드레스를 작업하면서 느낀 건데 아무래도 지퍼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몸에 딱 맞춘 라인의 드레스에 지퍼가 없으면 도저히 모양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퍼가 없으면 입을 때마다 매번 꿰맸다가 뜯었다가 해야 하는데, 세상에 그렇게 번거로울 수가.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폴랑에게 지퍼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세계에선 아직 발명되기 전의 물건이라 대충 그림으로 그려 가며 말로 설명해 주었다.
“영애는 천재, 아니, 천재라는 말로도 모자랍니다! 신! 신의 자녀가 틀림없어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죠? 이건 혁명이라고요! 당장 특허를 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지퍼를 제안한 뒤의 폴랑의 반응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도저히 만들 수 없어서 기계나 마법 같은 다른 방도가 필요할 것 같다고 하는데도 흥분으로 날뛰고 있었다.
“그전에 우리 계약서부터 같이 쓸까요? 기다리십시오. 일단 황실 디자이너부터 관두고 오겠습니다.”
“……진정해.”
저러다가 진짜 어느 날 불쑥 황실에서 뛰쳐나와 같이 사업하자고 할 것 같아서 걱정이네. 나는 흥분하는 폴랑을 다시 자리에 앉히고 예전에 다른 영애에게서 의뢰받은 드레스나 만들자고 했다.
일단 사업인지 뭔지 그런 본격적인 것을 하기 전에 루프부터 멈추고 소설의 완결부터 내야 할 테니까.
나라고 해서 내 의상실을 내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드레스를 디자인하고 직접 구현해 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내 디자인이 사교계에서 유행해서 귀족 영애들 모두가 예쁘게 입어 줬으면 하는 거창한 꿈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핑크빛 미래를 꿈꾸려고만 하면 늘 내 발목을 잡는 것이 바로 루프와 소설의 완결이었다.
그렇게 착실히 부탁받은 드레스를 만들고, 꾸준히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 나는 성실하고 보람찬 한 달을 채웠다.
어느덧 노예 증서의 보증 기간이 끝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샬럿이 선택 장애로 인해 베르너에게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저택으로 돌아와 쉽게 소설이 완결 날 거라고 장담했던 나를 반성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설마 샬럿이 내게 이렇게 큰 엿을 먹일 줄은 몰랐다. 이쯤 되면 나는 샬럿에게 욕을 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본다.
아니, 내가 솔직히 그렇게 어려운 걸 기대한 것도 아니잖아? 어차피 둘이 이어질 거 그냥 좀 강요로 맺어지면 어때? 어차피 둘은 하늘이 맺어 준 천생연분인데. 요즘 유행하는 그 뭐냐, 계약 결혼이잖아!
일이 이렇게 꼬이니 완결도 날아가고 루프가 사라질 거란 희망도 날아갔다. 샬럿은 아무래도 그녀의 고의든 무의식이든 꼭 어장을 쳐야만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신인지 뭔지가 꼭 소설 내용을 그대로 따라가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르지.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내가 샬럿의 주변 인간들에게 잘 보여 살아남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