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60화 (60/131)

# 60

악녀 메이커 60화

그녀가 어장을 치든 말든 알 바가 아니긴 하지만, 그들이 완전히 샬럿의 편으로 돌아서면 좀 버거울 터였다.

샬럿의 어장 속 물고기들은 황태자 못지않게 아일라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아일라를 직접 죽인 건 베르너였다. 하지만 다른 물고기들이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남자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려고 크게 활약하는 부분을 집어넣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서로를 경계하던 어장 속 물고기들은 샬럿의 안위를 위협하는 공공의 적인 아일라가 나타나는 순간 서로 똘똘 뭉친다. 그리고 샬럿을 지켜 내겠다는 한마음 한뜻으로 베르너의 조력자가 되어 아일라 퇴치에 일조한다.

그러니 적어도 그들의 호감을 사 두는 편이 좋았고, 가장 좋은 방법은 물고기들이 서로 제 갈 길 갈 수 있도록 내가 몰래 풀어 주는 것이다.

이미 베르너는 샬럿에게 푹 빠져서 어떻게 손쓸 수 없어 보이지만.

‘심장이 두 개인 사나이…….’

충격과 공포의 세기말 고백은 잊고 싶어도 기억에 완전히 아로새겨지고 말았다. 나는 으으, 하고 신음을 흘리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쨌든, 할 수밖에 없잖아.’

내게 각오가 필요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남자 주인공인 베르너가 세기말인데, 다른 물고기라고 해서 멀쩡할 것 같은가. 그런 각오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세기말이라고 무작정 도망치지 말고 이제는 정면에서 당당히 마주하며 즐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레녹스 강화 기간이 시작되면 갑자기 향수병을 느낀 샬럿이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는데, 그 모습을 안쓰럽게 여긴 베르너는 하는 수 없이 샬럿을 안젤로 영지로 보내 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호위를 맡게 되는 게 바로 레녹스.

왜 황태자의 호위기사가 지키라는 황태자는 버려두고 일개 자작 영애의 호위를 맡느냐 하면……. 음, 난 도무지 짐작이 안 가니까 10년 전의 나한테 물어봐 주길 바란다.

아무튼,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 기사 남캐의 묘미라면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가며 지켜 주는 그런 거 아니겠는가.

이게 황태자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다르다. 베르너는 짜잔― 하고 백마 타고 와서 구해 주는 거고, 기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묵묵히 곁을 지켜 주는 거고.

그런 고로 소설에서는 샬럿이 발크 산맥을 건너다가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강한 마물들의 습격을 받게 되고, 어쩐지 절벽에 떨어질 위기에 처한다!

결국 레녹스는 하는 수 없이 샬럿을 끌어안고 절벽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얼마나 운이 좋은지 절벽 밑에 호수가 있었다.

절벽에서 맨몸으로 떨어진 여파로 레녹스는 몸에 내상을 입고, 샬럿은 그런 그를 우연히 발견한 동굴에 데려와 극진히 간호해 주게 되는데!

‘뭐, 그렇게 썸 타는 거지.’

그렇게 해서 위 사건이 일어날 날짜와 시기를 계산해 샬럿과 레녹스가 움직이기 훨씬 전, 내가 먼저 발걸음 하려고 한 곳은 카젠 영지!

……였는데.

나, 아무래도 좀 멍청한가 보다.

“샬럿, 그러니까 그 신의 사랑을 받는 여자가 카젠 영지에 포함된 발크 산맥에서 조난을 당할 거라고?”

“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예, 이렇게 말문이 막히죠.

나는 킬리안의 지극히 당연한 의문에, 그를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당시 내가 했던 거짓말을 떠올렸다.

루프를 일어나는 날에만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그날 일어나야 할 일을 본다고 했지.

그런데 내가 다음에 일어날 루프는 내년 봄이라고 이미 입을 턴 전적이 있었다. 이렇게 되면 샬럿이 레녹스와 함께 절벽에서 떨어져 조난을 당하는 걸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

‘사실 그날도 루프가 일어나는데, 신이 내게 뒤늦게 계시를 보여 줬기 때문에…… 라고 하면 통할까?’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그와 시선을 맞췄다.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은회색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진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나는데.”

“…….”

“저번에 카지노 호텔로 향했을 때도 충분히 수상했던 거 알지? 그때는 모르는 척해 주긴 했다만은.”

내 취미가 자승자박이라는 걸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이래서 웬만하면 처음부터 거짓말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어쩌다가 한 번 시작했다가는 그 말을 수습하기 위해 계속 그 위에 거짓말이 쌓이고 쌓일 뿐이니까.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라 불가피했다고. 선택권이 없었잖아.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던 당시에도 킬리안은 이미 내 거짓말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뭐, 지금은 속아 주지’ 하는 말로 관대하게 넘어가 주었지.

……그렇다면, 지금도!

“사실은 루프가 아닌 날도 보게 되었달까요. 계시를 통해 샬럿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보게 되었달까요.”

“흐음.”

“그래서 이것은 저의 생각인데, 루프가 통하지 않으니까 신이 다른 방법을 쓴 것 같아요. 어떻게든 절 샬럿이랑 엮어서 제가 그녀를 위해 희생당하게 하려는 수작인 거죠.”

아무 말이나 막 뱉었는데, 말하고 보니까 말이 된다.

생각해 보니 고작 샬럿 한 명을 행복하게 해 주려고 나머지 피조물 따윈 상관하지도 않고 루프를 막 일으키는 치졸한 신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짓이었다.

나는 꽤 그럴듯하다고 믿고서 주먹을 꼭 쥐고 킬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내 반짝거리는 눈빛을 본 킬리안이 웃는 얼굴 그대로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서서히 표정을 굳히더니 손바닥으로 눈을 덮었다.

“하아…….”

한숨까지 쉴 정도라니.

“내가 너를 어쩌면 좋을까…….”

한탄할 정도라니.

거짓말이 치밀하지 못한 인간이라 슬프다. 내가 그런 걸 많이 해 봤어야 알지. 하지만 절대로 내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입을 꾹 다물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래, 그런 걸로 해 두지.”

한참 나를 내려다보며 ‘이걸 어떻게 할까’ 하는 표정을 짓던 킬리안은, 마침내 그렇게 말했다.

역시 분위기는 마왕이지만 너그러운 킬리안, 사실 알고 보면 착한 사람, 킬리안! 줄여서 분마너킬! 알보착킬!

“하지만 거짓말이 쌓이는 만큼, 내 인내심이 그만 한계에 닿을 만큼.”

그런데 그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갑자기 분위기를 잡고 목소리를 낮게 까는 킬리안 때문에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뒷감당은 네가 해야 할 거야.”

“…….”

“그때가 기대되는군.”

킬리안은 들고 있던 검은 후드를 내게 둘러 주면서 말했다. 몸에 두꺼운 옷감의 후드가 덮어지는데도 온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식으로 뒷감당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왠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데, 편히 죽여 주지 않으려나!

“살살해 주세요…….”

“하는 거 봐서.”

그는 결국 분위기도 마왕이고, 알고 봐도 마왕인 킬리안이었다.

* * *

줄여서 분마알마인 킬리안과 나는, 카젠 영지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발크 산맥에서 붙들려 버렸다.

“여기까지 오시면서 한 번도 마물과 마주치지 않았다니, 운이 좋으셨군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레이디.”

“이 험준한 산맥을 단둘이 건너시려고 했다니, 정말 무모하십니다. 저희가 우연히 지나가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을 당하셨을 겁니다.”

“다음부터는 꼭! 꼭! 용병을 고용하십시오. 아니, 최소한 셋 이상의 용병단을 반드시 고용하셔야 합니다.”

기사들은 내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친절하기도 하지. 정말 나를 걱정하는 모양새라 말없이 웃어 보이자, 그들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아항…….’

주위 사람들이 저런 반응을 보일 때마다 처음에는 나도 같이 몸 둘 바를 모르며 민망해하곤 했었는데, 이젠 많이 익숙해졌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지.

뭐, 기사님들 저도 이해합니다. 나도 가끔 거울을 보고 스스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니까. 나르시시즘이 불가피한 환상의 미모라고나 할까……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들의 싸대기를 왕복으로 날리고도 남을…….

“으풉!”

그때, 갑자기 뭔가 검은 게 내 얼굴을 확 덮는 바람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뭣이여!

깜짝 놀라 허우적거리다가, 시야를 덮은 게 내가 입고 있던 후드 모자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턱 끝까지 덮어씌워진 후드 모자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쓰고 계십시오, 아가씨.”

집사를 가장하는 킬리안의 말투는 오늘도 더없이 정중했다. 그런데 왜 후드를 쓴 채 가만히 미소 짓는 그가 마왕처럼 보이는 걸까.

나는 슬금슬금 들어 올리던 모자를 다시 뒤집어썼다. 아니, 아일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좀 뿌듯해했다고 왜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그런 킬리안의 태도에 기사들은 우리 두 사람을 묘한 시선으로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억지로 결혼하게 돼서 사랑하는 남자와 영지 밖으로 도망치고 있는 거 아니야?’ 하고 멋대로 소설을 쓰면서 수군거렸다.

“영지 밖으로 나가시려고요? 처음 뵙는 걸로 보아, 집에서만 곱게 자란 아가씨 같은데……. 가출을 하기엔 요즘 시기가 많이 안 좋습니다. 마물들이 급속도로 늘어나서 웬만하면 숲 근처에는 가지 않으시는 게…….”

그들은 바깥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험난한지 일장 연설을 하다가 내가 그냥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자,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기사가 된 몸으로 곤경에 처한 레이디를 두고 갈 수는 없지요. 발크 산맥 입구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게 아니지, 집까지 모셔다 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야,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오셨겠냐.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으실 텐데, 겨우 도망쳐 나온 곳으로 다시 보내라니 잔인하잖아.”

“하지만, 집에서 걱정하고 있지 않겠어? 곱게 키운 딸이 갑자기 사라지면 억장이 무너질 텐데…….”

그들은 내 사랑의 도피를 돕는 것이 기사도를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데려다주는 것이 기사도를 지키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킬리안은 기사들의 착각이 재미있었는지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귀족적인 억양이 짙게 밴 말투였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카젠 영지로 향하는 길인데 우연히 기사단 단원분들을 만나다니 운이 좋군요. 이 은혜는 영지에 도착하면 성주님께 직접 표하도록 하지요.”

누가 들어도 나 수도 사람이요! 귀하신 몸이요! 하는 억양과 몸짓에 기사들은 킬리안이 최소 귀족이고, 그가 모시는 듯한 나는 더 높은 신분일 거라는 결론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어, 어라? 그러니까 발크 산맥 밖으로 빠져나가시던 게 아니라, 들어오던 중이신……?”

기사들은 내가 카젠 영지에서 빠져나온 철부지 아가씨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온 귀족이란 걸 알아차리고 급격하게 얼굴이 핼쑥해졌다. 내게 잘난 듯이 이것저것 충고했던 것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아뇨, 그냥 가볍게 조언해 드린 건데 뭐 은혜까지야…….”

그때 그들의 대표로 추정되는 한 중년 남성이 앞으로 나와 볼을 긁적이다가 주저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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