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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61화 (6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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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메이커 61화

“저는 카젠 기사단의 기사단장 비싈 나시리얼이라 합니다. 영주님의 명을 받아 마물 토벌을 위해 잠시 발크 산맥에 나와 있는 중이지요.”

요점만 짚어 자기소개를 마친 그는, ‘그런데…….’ 하고 말을 이었다.

“두 분께서는 설마 수도에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여긴 촌구석이라 텔레포트 센터도 없을 텐데요. 마차도, 수행원도, 호위도 없이 대체 어떻게……? 비싈은 미지를 맞닥뜨린 사람처럼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가장 가까운 텔레포트 센터만 해도 보름을 꼬박 말 타고 달려오셔야 하는 거리인데……. 설마 오는 길에 산적을 만나기라도 하신 겁니까? 아니면 저희와 마주치시기 전에 이미 마물들의 습격을 받으셨다거나…….”

비싈은 본인이 말하고도 억측 같았는지 중간에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입고 있는 후드는 음침하긴 했으나 깔끔했고, 다치거나 지친 기색은커녕 태도가 의연하니 산적이나 마물을 만났다기엔 의아할 테지.

내가 카젠 영지에서 가출한 철부지 영애가 아니라면 딱 한 가지 결론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만큼 대단한 실력자라는 것.

“마법사이십니까?”

비싈은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물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카젠 영지는 지형적으로 발크 산맥을 끼고 있어 사방이 숲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게다가 한쪽은 까마득한 절벽 ―레녹스와 샬럿이 떨어진 그 절벽이 맞다― 으로 이루어진 만큼, 외부와의 교류도 적었다.

카젠 영주민 본인들 입으로 촌구석이라고 자칭할 정도로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가난한 도시인 카젠까지 마법사가 올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하급 마법사를 고용할 돈조차 감당하기 힘들 테니까.

“마법사는 아니야.”

내 말에 기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럼 대체 누구시길래?’ 하는 시선을 서로 교환했다.

마법사도 아니고 신분이 높으면서 실력자라니, 신의 가호라도 받은 건가 싶겠지. 뭐, 신은 아니고 주술사의 가호를 받기는 했다.

나는 하늘 위를 사뿐사뿐 걷는 킬리안의 품에 안겨서 왔다. 하늘로 왔는데 마차나 수행원, 호위 같은 게 왜 필요하겠는가. 하늘에서 마주친 위협이라고는 남쪽으로 향하던 철새 떼밖에 없었다.

내게 킬리안의 주술이 통하지 않아도, 그가 간접적으로 날 안아 들고 나는 건 가능했다. 덕분에 나는 킬리안의 품에 공주님처럼 안겨서 편하게 이동해 왔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지. 승차감은 괜찮았는데, 공중에 계속 떠 있어야 해서 없던 고소 공포증이 다 생길 정도였다.

그에 멀미가 일어 잠시 쉬고자 여러 마을에 머무르며 여관에서 쉬면서 왔다. 마찬가지로 비행 전에 이 숲에서 잠시 쉬다가 저들을 만난 거고.

원래는 바로 성으로 향할 생각이었는데, 이대로 기사들과 합류해서 함께 카젠 남작령으로 향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의 영지에 볼일도 있었다. 다쳐서 골골 앓고 있는 레녹스와 옴짝달싹도 못한 채 동굴에 묶여 있는 샬럿을 발견하는 게 바로 저들, 카젠 기사단이었으니까.

그리고 기사들은 훗날 절반에 가까운 인원들이 희생당하게 된다. 레녹스의 극적인 활약을 위해서였다.

‘불쌍해…….’

조연을 위해 삭제당해야 하는 엑스트라라니, 남 일 같지 않다. 아일라도 같은 조연이긴 하지만 결국 운명은 엑스트라와 다를 바가 없잖아.

나는 기사들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인데 레녹스를 빛내 주기 위해 죽어야 한다니.

‘얘네들도 나도 살았으면 좋겠네.’

내가 명색이 작가인데 내가 뿌린 씨를 거둘 수는 없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내 정체를 밝혔다.

“나 또한 그대들의 노고에 예를 표하지. 난 아일라 메르텐시아, 이쪽은 내 개인 집사 세바스티안이다.”

“아, 그러시군요…….”

내 말에 비싈은 반사적으로 경례하며 고개를 숙였다가 뒤늦게 몸을 경직시켰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며 무례할 정도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메르텐시아 영애시라고요?”

아, 날 아는 건가? 설마 이 지방에까지 내 소문이 퍼졌을 줄은 몰랐네. 허허, 엄청난 유명 인사구먼.

기사들이 눈을 한계까지 부릅뜨며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평생 마주칠 일 없다고 여겼던 소문의 공작 영애가 눈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겐 너무도 익숙한 반응이라 말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커다란 덩치의 기사들이 단체로 화들짝 놀라 몸서리치는 게 아닌가. 그게 왠지 웃겨서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똑같이 웃었을 뿐인데 아까와 반응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내 소문이 좀 요란하지?”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고 영애처럼 높으신 분께서 이곳까지 발걸음 하신 것에 놀라 그만…….”

거짓말하지 마라. 네 얼굴에 지금 ‘으악, 마녀!’ 하고 쓰여 있으니까. 갑자기 천재지변이 닥쳐도 저런 절망적인 표정은 안 할 것 같은데.

비싈은 그 짧은 새에 변명거리를 생각할 정도로 순발력 좋은 기사였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내게 궁금한 것을 물어 왔다.

“그런데, 여기까진 어쩐 일로……?”

정중하게 묻고 있었으나 불안해하는 기색으로 보아, 사실은 ‘무슨 짓을 하려고 예까지 내려온 거냐’고 묻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내가 워낙 여행을 좋아해. 수도에서 오는 길에 보이는 마을마다 다 들러 봤지. 지방 특산품에도 관심이 많은데, 그대들은 이거 먹어 봤나?”

나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꺼낸 것을 던져 주었다. 비싈은 기사답게 민첩한 손놀림으로 날아오는 과일을 잡은 뒤,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맛있어. 선물이야.”

“가, 감사합니다?”

조금씩 아껴 먹던 건데 특별히 줬다. 기사단장이라면 카젠 영지에서 지내는 동안 부딪힐 일이 많을 테니, 친해져서 나쁠 것 없었으니까.

이걸로 겁먹은 기색이 좀 나아질까 했는데 웬걸, 어째 나를 더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어째서야. 먹을 걸 줬는데.

비싈은 독이라도 든 거 아니야 이거? 하는 눈빛으로 과일을 돌려 보고 있었다. 기껏 생각해서 줬더니 너무 노골적으로 의심하는 거 아니냐. 안 먹을 거면 도로 내놔.

하지만 두려운 마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더라도, 먹을 것을 줬다 뺏는 치졸한 영애까지 될 순 없었다.

나는 서글픔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토벌은 끝났나?”

“아, 예. 그렇습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렇게 날뛰던 마물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더군요. 지금 막 성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아무런 수확 없이 허탕을 친 게 아쉬운 기색이었다.

“마침 잘되었군. 카젠 영지의 특산품을 가장 기대하는 중이었거든.”

“특산품이요?”

비싈은 ‘우리 영지에 그런 게 있었나?’ 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당연하지. 카젠에서만 나는걸.”

위기에 처한 샬럿과 그녀의 물고기는 제국 땅을 다 뒤져 봐도 딱 이 시기에 여기에서밖에 못 구하니까. 나는 뒷말을 삼키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기사들이 듣도 보도 못한 카젠의 특산품에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나는 다분히 답정너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함께해도 되는 거지?”

“예…… 물론이지요.”

내 말에 그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몸짓은 굽실거리면서 표정은 웬만하면 함께하고 싶지 않다, 였다.

아까는 그렇게 싸고돌면서 걱정하더니, 내가 아일라라는 걸 알자마자 태도 돌변하는 거 봐라.

그래도 여긴 외지라 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째 수도에 있을 때보다 나를 더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내가 온갖 추문을 달고 다니는 마녀라는 것과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나? 아니면 이곳까지 내 소문이 닿는 동안 엄청나게 와전되었거나?

“…….”

“…….”

“…….”

갑자기 다들 심각하게 말수가 적어지지 않았어?

나는 우리를 호위하듯 둘러싼 기사들을 난처한 기색으로 돌아보았다. 아까는 날 보며 얼굴을 붉히더니, 이젠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고개를 휙휙 돌렸다.

수도 귀족들은 ‘세계적인 디자이너에게 인정받은 드레스’나 ‘귀족적인 언동’ 같은 고상한 걸 좋아해서 생각보다 쉽게 호감을 샀다지만, 시골 기사들은 어떻게 꾀지?

“킬…… 아니, 세바스티안. 내가 쟤네들이랑 친해질 방법이 있긴 할까?”

나는 킬리안의 곁에 바짝 붙어 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그랬더니 그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하고 답하고는 내 후드를 더 깊숙하게 눌러씌웠다.

……으잉?

* * *

내가 영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은 영주, 카젠 남작은 그야말로 버선발로 튀어나왔다.

기사들의 반응 때문에 내가 왔다고 하면 소금이나 뿌리지 않을까 짜져 있을 뻔했는데, 열렬히 환대해 주니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착한 사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짜게 식었다. 그가 양손을 파리처럼 비비며 영광이네 어쩌네 하면서 날 극진히 모시라고 대놓고 사용인들을 구박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아일라에게 엮이는 전형적 부류인 겁쟁이와 아첨꾼 중 후자인 것 같았다.

계속되는 카젠 남작의 아첨을 듣다 보니, <백합 아가씨> 소설의 세부적인 내용이 조금씩 떠올랐다.

그는 황실 직속 기사단 단장이면서 황태자의 호위기사인 레녹스가 영지를 찾아오자 이렇게 말한다.

[“아니, 당신은 말로만 듣던 최연소 그랜드 소드 마스터로 이름을 떨친 여명의 기사 레녹스 경? 레녹스 경께서 저희 영지를 찾아 주시다니. 오, 완전 산맥을 뒤집어 놓으셨다.”]

설마, 내가 쓴 저 호들갑 때문에 간신배 캐릭터가 되어 버린 거야?

“메르텐시아 영애…… 아니, 킨타이어 백작님! 아이고, 여기까지 귀한 걸음 하셨습니다.”

아니, 날 다짜고짜 백작이라고 부르는 건 또 처음이네. 그 의도가 불쾌할 정도로 노골적이라 대놓고 불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메르텐시아 영애라고 불러 주세요. 아직 작위를 물려받지도 않았고, 후계자 수업을 받는 중이이니까요.”

“에이, 시간문제일 뿐 차기 백작님이신 건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그의 논리대로라면 아슬란은 이미 메르텐시아 공작이었다. 아직 내 아버지가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 있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소문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정부를 들이실 예정이시라고요?”

그는 은밀한 얘기를 하듯 속삭이며 여우 같은 눈매를 더욱 길게 찢었다.

대체 그 소문은 또 언제 여기까지 퍼졌대. 그보다, 그걸 왜 굳이 그렇게 은근하게 말하는 건데?

지금은 다른 일에 집중하느라 혼인에 관한 나중으로 미룰 생각이라고 대답할 끝낼 틈도 없었다. 갑자기 카젠 남작이 그의 셋째, 넷째, 다섯째 아들을 차례대로 불러와 내게 소개해 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쪽은 제 셋째 아들, 이든…….”

“아, 아니. 이, 이러지 마시죠!”

뭐 하는 짓이야, 이 양반아!

나는 귀족의 품위고 고상한 연기고 나발이고 다 잊어버리고 더듬거리며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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