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악녀 메이커 62화
아첨꾼들은 매번 상상을 초월한다.
뭘 상상하든 항상 그 이상을 보여 준다. 대체 어디까지 더 진화할 셈인지 이 정도면 두려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저 다섯째 아들은 아직 솜털도 덜 가신 미성년자로 보이는데? 날 소아성애자로 몰아 은팔찌 채워 아주 보내 버릴 속셈인 건가?
남작의 아들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평생 귀족으로 자라 왔을 그들이, 팔려가다시피 내게 선보이고 있으니 수치심에 떨고 있는 걸지도.
나도 그들 못지않게 어이없고 황당해서 할 말을 잃은 채 굳어져 있었다. 남작 부인이 도망갔다는 소문이 있던데,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을 것 같아…….
“아, 오해가 있으시군요. 저는 그냥 제 자랑스러운 아들들을 백작님께 소개해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소개?”
“물론이죠. 영지를 물려받게 되시면 여러모로 바빠지실 텐데, 제 아들들이 백작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말입니다.”
남작은 기품이라고는 한 톨만큼도 보이지 않는 동작으로 손사래를 치며 당황하는 내 비위를 맞췄다.
물론, 나는 말도 안 되는 사탕발림에 속을 바보가 아니었다. 정말 그런 거라면 보통은 정부를 들이신다는 소문은 제가 익히 들었습니다, 하는 말 다음에 아들들을 부르지는 않지.
게다가, 날 정말 차기 백작으로 대우해 줄 생각이었다면 훗날 그의 가문을 물려받을 첫째 아들을 소개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짜증 난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카젠 남작이 저런 구제 못할 성격이 되어 버린 데에는 작가인 내 영향도 어느 정도 큰 건가?
‘하……. 남작한테 레녹스 찬양 작작 시킬걸.’
레녹스가 이만큼 유명하고 멋지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10년 전의 내가 저지른 만행이라고나 할까. 항상 모든 일의 원흉은 과거의 나라는 것이 괴롭다. 그래, 다 내 죄다…….
비록 킨타이어 백작 가문의 후계자이긴 하지만, 지금은 공작 영애일 뿐인 내게 자작이 저렇게까지 굽신거리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카젠 가문은 안 그래도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휘청이고 있었다. 사업의 연이은 실패와 남작의 도박 중독 때문에 빚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유일한 브레이크가 되어 주었던 남작 부인은 답이 없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도주했다고 들었다. 거기에 최근 마물의 수까지 급격하게 느는 바람에 카젠 남작가는 그야말로 폭삭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심지어 외부에서 물자를 들여오기 위해선 발크 산맥을 통과할 수밖에 없는데, 산맥 어디를 가든 마물과 마주치게 되는 구조라 이젠 굶어 죽게 생긴 모양이었다.
미리 조사하고 왔으니 아마 정확하겠지? 그렇다고 남작이 급기야 아들들을 정부로 팔아넘길 생각마저 할 줄은 몰랐지만.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까 하던 소개를 마저 해 드리죠. 이쪽은 제 셋째 아들 이든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메르텐시아 영애. 이든 카젠이라고 합니다.”
아, 아냐. 제발 그러지 마. 마지못해서 인사하지 마. 내가 천하의 나쁜 파렴치한이라도 된 것 같잖아.
“제 셋째 아들은 싹싹하고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비상합니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말수가 적을 뿐이지 아주 다정한 아이랍니다. 게다가 손재주도 얼마나 좋은지…….”
저게 어디로 봐서 내 측근으로서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하는 소개야? 그리고 그 아주 다정한 아이한테 아버지로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야, 이 쓰레기야!
나는 카젠 남작이 멋대로 얘기를 진행하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마물들 때문에 고생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러자 셋째 아들의 요리 실력에 대해 자랑하고 있던 카젠 남작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그렇죠. 마물들 때문에 제가 얼마나 막대한 손해를 입었는지 백작님께서는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카젠 남작이 마물에게 입은 피해에 대해 떠벌리려고 했던 그때였다.
그의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나를 이곳까지 직접 데려다주었던 그 기사들이었다.
“영주님……!!”
그들은 우렁차게 남작을 부르면서 들어왔다.
그러자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작 아들들의 표정이 활짝 폈다. 구원자라도 만난 듯한 얼굴이었다.
기사들의 선두에 선 기사단장, 비싈은 그들 앞을 보호하듯 서서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비통하게 외쳤다.
“어떻게, 어떻게 돈 때문에 도련님들을 저 마녀에게 파실 수가 있으십니까!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요!”
그래, 내가 할 말이다. 제발 저 남작 좀 누가 말려 봐. 마녀란 말이 거슬리긴 했지만 속으로 비싈을 응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그때였다.
“메르텐시아 영애!”
비싈은 갑자기 내 쪽을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붉은 천을 본 투우 소처럼 내게 달려들고 싶은 걸 꾹 참는 듯 억눌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습니다. 카젠에서만 나는 특산품 같은 건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역시 도련님들을 노리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다가 깨달음을 얻은 그가 피를 토하듯 말했다.
“제발, 안 됩니다.”
……뭐를?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를?
저 대사는 아까 카젠 남작도 했던 말인데. 대체 무슨 소문인지 불안해지기 시작했을 때쯤, 비싈이 남작 아들들을 돌아보며 이를 갈 듯이 말했다.
“사람을 장난감 가지고 놀 듯 괴롭히다가 망가지면 고문하고 지겨워지면 버리는 걸 즐기신다고요. 정부를 들인다는 것도 표면적으로 정부일 뿐, 결국 그런 의미 아닙니까.”
그 말을 들은 나는 어이가 없는 나머지, 이제는 슬슬 감탄이 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소문이 와전되면 내가 파렴치한 진성 변태 사디스트가 되는 건지 짐작조차 안 간다.
하지만 내가 아일라라는 것을 밝히자마자 보였던 기사들의 반응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래서 날 범죄자 보듯 하면서 멀리했던 거였어.
“영애, 저는 30년 전부터 이 기사단에 몸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도련님들이 태어난 시절부터 평생을 함께해 온 제 자식 같은 분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제발, 이렇게 부탁하겠습니다. 도련님들만은 안 됩니다.”
비싈은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 가려져 있던 남작의 아들들이 ‘비싈! 비싈!’ 하면서 매달렸다.
그는 그 아들 같은 도련님들을 보며 우는 듯 웃더니,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우리 기사단이 봉급도 받을 수 없는 이 영지에 계속 머물러 있는 건, 순전히 도련님들 때문입니다.”
무상으로 일하다니, 그거 참사랑이네. 진짜 친아들처럼 생각하나 봐.
그래, 그것참 눈물을 쥐어짜는 딱한 사정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그건 내가 아니라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작한테 해야 할 말이 아니겠니?
나는 손쓸 수 없이 꼬여 버린 난장판을 어떻게든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카젠 남작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진심이냐?
“너희 정말 진심이었구나! 난 또 밀린 봉급 받을 때까지 버티는 줄 알고 독하다고 욕했는데……!”
아무래도 그는 다른 부분에서 감동의 쓰나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렇게 돈을 받지 않는 걸로 자신의 충심을 강조한 비싈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극적인 타이밍에 내게 시선을 맞추며 비장하게 말했다.
“도련님들은 보낼 수 없습니다. 제 한 목숨으로 만족해 주십시오.”
“비싈!”
“안 돼! 그럴 순 없어, 비싈!”
“아니요. 전 이미 도련님들 덕분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보냈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단장님!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저희도 도련님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너희들……!”
“단장님……!”
“비싈……!”
“도련님……!”
쟤넨 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나를 멋대로 천하의 나쁜 악역으로 만들어 버린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다.
내가 왜 돈으로 가난한 집안의 남자를 사들이는 무서운 변태 성욕자 같은 게 되어 있는 거지. 왜 그 집안 기사들을 무참히 살해하면서까지 얻어야 하느냐고.
‘난 너희 망상이 더 무서워.’
그리고 이 상황을 자초한 카젠 남작은 기사들 봉급 안 줄 생각에 신이 난 것 같았다. 내가 저 아저씨는 나중에 꼭 돈으로 때려 버리고 말겠다.
주변을 돌아보다가 그쪽에 완전히 신경을 끊고 있던 킬리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나설 의욕조차 식어 버린 모양이었다.
하기야 착각과 오해도 어느 정도여야 화가 나지, 이 정도면 그냥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킬리안은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아가씨의 곁에 있으면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다. 주변에서 가만히 두질 않으니 심심하진 않겠군요.”
“난 제발 심심해지고 싶다…….”
그는 내 진심이 담긴 중얼거림에 짧게 웃음을 터트린 뒤, 허리를 숙여 내 어깨너머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내 몫으로 나온 커피 잔 안에 각설탕 하나를 톡 떨어트리고 어린아이 같은 내 입맛에 맞춰 우유를 넣고 저어 주었다. 왜 그렇게 조용한가 했더니 이 와중에 하녀에게 가져다달라고 부탁한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드실 차는 제가 따로 준비해 드려야겠습니다. 향이 옅군요.”
킬리안은 이 소란을 철저하게 무시한 채 내 앞에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도련님들을 악의 손아귀에 넘기지 않겠다는 기사들의 충성심 넘치는 결의가 정말 안중에도 없어 보이는구나.
나는 내 억울함을 해명해야 한다는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킬리안이 내 입맛에 맞춰 준 커피를 홀짝였다.
“우, 우린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때, 기사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청년 기사가 날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상대가 저렇게까지 관심 좀 가져 달라고 발악하니 더는 외면하기 힘들어진 모양이었다. 킬리안은 그쪽을 흘끔 본 뒤 관대한 척 말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하나쯤은 들어줘도 좋지 않겠습니까.”
킬리안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과 함께 입매를 매혹적으로 휘었다. 아니, 그 산 사람 소원이 죽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데요.
“원하신다면 제가 옆에서 직접 급소를 짚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는 귀찮으니 그냥 처리해 버리자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태연자약한 그 한마디에 기사들이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긴장해서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리고 역시 마녀의 수하라고 수군거렸다.
기사들이 내 계획에 꼭 필요한 건 아니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살인은 아니지. 여기서 더 상황이 악화될 뿐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