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악녀 메이커 63화
“허억! 죽이시면 안 됩니다!”
남작은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다가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난 뒤에야 심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는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공짜 노예…… 크, 크흠! 아니, 반평생을 함께해 온 소중한 저의 기사들을 부디 살려 주십시오!”
이 인간 자신의 본심을 숨길 생각이 있기는 한 거야? 카젠 남작은 간신배이긴 한데 머리가 상당히 나쁜 간신배였다. 오히려 투명했다. 더러운 욕망이 손에 잡힐 듯 투명하잖아.
“너희는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이게 대체 무슨 방해, 아니, 소란이냐! 백작님께서 우리 가문을 구원해 주실지도 모르는데 어느 안전이라고!”
“하, 구원? 돈에 아들을 팔아넘겨야 얻을 수 있는 구원이면, 차라리 폭삭 무너져 망하는 게 낫습니다!”
“뭐, 뭐라?”
남작은 기사들의 하극상에 말문이 막혔는지 뒷골을 잡았다. 하지만 봉급을 지급할 능력을 상실한 그에게 권위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너, 너희가 감히 그동안 먹여 살려 준 은혜도 모르고……!”
“영주님은 조용히 계십시오! 당신은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으니까!”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네! 미쳤습니다! 미치지 않았으면 이러겠습니까! 다시 한번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시려고 하신다면, 그땐 그냥 도련님들 데리고 도망쳐 버릴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심각한 분위기에 미안하지만, 이거 왠지 즉석에서 연극 한 편을 보는 것 같은데. 어쩐지 팝콘이라도 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는데, 카젠 기사단 기사들은 정의감 하나만큼은 정말 투철했다. 제국에서는 이미 기사도 같은 건 퇴색되어 버린 지 오래라 아무도 지키지 않는다던데.
‘음, 이제 슬슬 수습해야겠지.’
내가 이 자리에서 아무리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해 봐야, 그들은 이미 날 파렴치한으로 낙인찍었으니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득력 있는 소리를 해야 한단 건데…….
나는 들고 있던 커피 잔을 일부러 달그락,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서로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으르렁거리던 남작과 기사단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향했다.
나는 사위가 삽시간에 잠잠해지자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지금까지 계속 쓰고 있었던 후드 모자를 벗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놓고 예의마저 없었네요.”
도착하자마자 남작이 정신없게 하는 바람에 후드를 쓰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잖아.
이 부분에서 남작의 머리가 나쁘다는 게 또 증명되었다. 내 얼굴을 제대로 확인도 안 해 보고 누군 줄 알고 메르텐시아 영애라는 걸 덥석 믿어. 저렇게 사람이 허술하니까 계속 사기를 당하는 거다.
‘멍청할 거면 착하기라도 하던가.’
나는 한심한 남작을 향해 속으로 쯧쯧,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그러자 킬리안이 모자에 눌리고 이리저리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능숙한 손길로 정리해 주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시중을 자연스럽게 받으면서 온전히 내게 집중하고 있는 그들에게 도도한 음성으로 말했다.
“남작, 유감입니다만 저는 그런 목적으로 이곳에 찾아온 게 아닙니다.”
그러자 기사들은 그들의 도련님들을 더욱 바짝 둘러쌌다. ‘그 말을 우리가 믿을 것 같아?’ 하고 행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비싈은 아무래도 일어날 타이밍을 놓친 모양인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경계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대단하신 영애께서 마물밖에 남지 않은 이런 시골까지 내려올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무래도 비싈은 목숨을 내놓기로 각오한 뒤로 완전히 겁을 상실한 모양이었다.
그래, 차라리 저렇게 건방질 정도로 솔직한 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것보단 낫네.
나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나는 지금껏 돈으로 수많은 취미 생활을 해 왔지만, 사람을 사 본 적은 없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물론, 카지노 호텔에서 있었던 일은 논외로 하자. 샬럿과 짐승남은 내가 별로 사고 싶어서 사들인 것도 아니란 말이야.
“하, 그런 거짓말……!”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귀찮을 정도로 매달리는 걸 왜 굳이 찾아가서 사야 하는 거지? 나는 도저히 그대들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군.”
“…….”
나는 이 말을 하면서 최대한 재수 없어 보이길 바라며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 말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아일라는 악녀 버프로 온 세상의 미움을 받을 때조차 얼굴만 보고 쫓아다니는 추종자들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우니까.
만약 내가 아일라가 아니라 그녀의 하녀 같은 걸로 빙의했었더라면, 그녀의 악행을 성심성의껏 도와주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얼굴로 웃으면서 ‘나 좀 도와줄래?’ 하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거절을 하겠어.
나는 어디 더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입매를 비틀었다. 그러자 기사들은 내 말에 설득당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우리 도련님들이라면……!”
그들은 날 어지간히 악역으로 만들고 싶었는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마, 맞습니다! 도련님들이 얼마나 훤칠하고 잘생겼는데! 우리 영지에 유일하게 남은 자랑이라고요!”
“막내 도련님은 천사처럼 사랑스럽고 귀엽다고요! 어떻게 도련님들 때문이 아닐 수가 있습니까?!”
……그럼 도련님들 때문이길 바라는 거냐? 진짜 정부로 들이라고?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모르겠다. 태도에 일관성 좀 있어 봐라.
확실히 카젠 남작의 인간성은 둘째 치더라도, 그는 젊은 시절 꽤 날렸을 것 같은 훤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들 또한 훈훈했고 말이다. 저 정도면 수도에 가서도 영애들에게 제법 주목을 받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내 눈은 한참 전에 오염되어 버렸다. 그들이 해산물로밖에 보이지 않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 참, 지금 누구 앞에서 미를 운운하는 거야?
나는 킬리안에게 흘낏 눈길을 준 다음, 그의 옷차림을 지적했다.
“세바스티안, 지금까지 후드를 쓰고 있었구나. 얼른 벗어서 하녀들에게 맡기렴.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은 우리인데, 최소한의 예는 갖춰야지.”
“……물론입니다, 아가씨.”
킬리안은 후드를 벗은 내게 말없이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내다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후드를 고정하는 끈을 풀어, 사람을 열 배는 더 흉악하고 수상하게 보이게 하는 칙칙한 검은 후드를 벗었다.
그가 후드 탓에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곳곳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몇 개 풀어 두었던 셔츠 단추를 유려한 손끝으로 목 끝까지 채운 뒤, 절제된 움직임으로 새하얀 장갑을 꼈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하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킬리안은 주변의 반응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후드를 반듯하게 척척 접어 하녀에게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하녀는 넋이 나가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면서 허공에 헛손질했다.
킬리안은 하녀가 파닥거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답답했는지, 그녀의 손 밑에 자신의 손을 겹쳐 그 위에 곱게 갠 후드를 올려 주었다.
“윽……!”
그 행동에 하녀는 큰 충격을 받았는지, 심장을 쥐어뜯으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나는 킬리안의 파괴력에 새삼 감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게 바로 아름다움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취향이고 나발이고 다 깨부수고 심장을 치고 들어오지.
저분이 바로 내 집사님이시다!
킬리안은 하녀가 쓰러지거나 말거나 방금 낀 장갑을 다시 벗어 후드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응? 뭐야. 설마 지금 하녀랑 손이 살짝 닿았다고 저러는 거야?’
나는 맨손으로도 여기저기 다 만지면서 왜 결벽증처럼 군담. 갑자기 저러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뭐 잘생겼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나!
하지만 아무리 잘생겨도 같은 얼굴을 계속 보니까 무감해지는 것 같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잖아.
킬리안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기사들 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가 있지? 그리고 다시 킬리안을 돌아보았다. 오, 그래. 사람이 이렇게 생겨야지.
기사들도 아마 나와 같은 심정을 느낀 것인지 서로의 얼굴과 킬리안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도중에 말을 끊어서 미안하군.”
나는 서로를 꼴뚜기 보듯 하는 기사들에게 사과 한마디를 툭 던진 뒤, 관대하게 웃어 보이면서 물었다.
“그래서, 그대들의 도련님들이 어땠다고? 계속 말해 봐. 들어 줄 테니.”
내가 말에 그들은 ‘큭!’ 하고 패배감이 짙은 신음을 흘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좋아, 이제는 내가 남작의 아들을 사기 위해 산 넘고 강 건너왔다는 헛소리는 안 할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단장, 비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비슬…… 비실드…… 음, 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군, 비실 경.”
그러자 그가 두 눈을 부릅뜨며 입을 달싹거렸다. ‘누가 비실이라는 겁니까!’ 하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나는 뻔뻔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네가 한 선동질에 이미 심사가 뒤틀렸다, 이거야. 내 소심한 복수를 받아 평생의 놀림감이 되어라.
“비실 경, 나에 대한 오해는 그럼 다 풀린 건가?”
“아, 예…….”
도련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날뛰던 비싈이 똥 씹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무래도 이런 이유로 납득해버린 자신에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도 그 기분 아주 잘 알지.’
나는 말없이 킬리안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첫 만남부터 저 얼굴에 홀려 덥석 계약하고 지금까지 아주 철저하게 휘둘리고 있네. 이 소설은 얼빠들이 살아가기에 험난하다.
나는 비싈이 세상에서 가장 뻘쭘한 분위기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이제야 좀 대화가 될 것 같네. 마침 잘 와 주었어. 그대들에게 상의할 일이 있었으니까.”
“상의…… 말씀이십니까?”
그는 여전히 나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는지 굉장히 미심쩍다는 말투로 물었다. 이쯤 되면 날 끝까지 악역으로 만들고 싶은 집요함에 감탄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은 결국 다 마물들 때문이 아닌가?”
물론, 가장 큰 유해 물질은 빚내서 가문 말아먹고도 정신 못 차린 채 아들 팔아넘기려 하는 남작 그 자체였다. 머리가 나쁘면 착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누가 저 끔찍한 혼종을 만들어 냈는가. ……그건 바로 나네.
‘어휴, 화상아. 언제 정신 차릴래.’
마음 같아선 남작을 마물들의 먹이로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주인 남작을 지금 당장 치워 버릴 순 없으니까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남작을 빤히 응시하자, 그는 갑자기 오한이 드는 것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