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악녀 메이커 64화
비싈은 마물을 운운하는 내 말의 저의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마물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긴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을 없앨 마땅한 해결 방안도 없지 않습니까?”
“없다고?”
“마물의 개체수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나면 그때그때 토벌하러 나서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조차 임시방편밖에 되지 않지만요.”
마물은 토벌을 하면 그때만 잠시 주춤할 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기하급수적으로 몸을 불린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비통한 표정으로 이미 수많은 동료들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마물에게 당한 이들도 적지 않으며, 다른 영지로 떠난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하긴, 누가 마물 밖에 남지 않은 가망 없는 영지에 남아 있으려고 할까. 영주가 조금이라도 믿음직스러우면 몰라, 그를 믿느니 차라리 아메바를 믿는 게 나을 수준인 것 같고. 도련님들을 지키기 위해 봉급도 받지 않고 남은 저들이 이상한 거지.
그런 바보 같을 정도로 의리가 넘치는 자들만 모여 있어서 지금도 기사도를 지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런 바보들이 싫지는 않았다.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만 얄밉긴 하지만.
나는 남작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지원은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요청이야 꾸준히 하고야 있습니다만……. 한두 번 병력을 파견해 주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아무리 죽여도 마물은 끝도 없이 생겨나니까요.”
흠, 그것도 그러네. 게다가 망해 가는 카젠 영지를 도와 봤자 아무런 메리트도 없으니, 한두 번 파견해 준 걸로 최소한의 성의를 다한 거겠지.
‘아무래도 곧 작위랑 영지를 팔아넘기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남작은 아들들에게 작위를 물려줄 여유도 없어 보였다. 카젠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듯했다. 파산하고 영지가 나라의 소유로 넘어가거나, 아니면 다른 영주에게 빼앗기거나.
소설에서는 이 지경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마물의 수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인가?
나는 킬리안의 귀에 더 늘어난 피어싱을 응시하다가 조금 더 시선을 내려 그의 손등 위를 기어 다니는 뱀 모양의 문신을 빤히 보았다.
저 ‘마력을 먹는 뱀’처럼 마물은 주술사의 마력에 기생하며 탄생하고 죽는다고 들었다. 주술사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생겨난다는 점만 빼면, 마물은 생명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주술에 더 가깝다고.
그렇다면 이게 다 엄청난 마력을 가진 주술사가 등장해서 벌어진 사태라는 것 아닐까? 물론, 그게 다 킬리안 탓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소설과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갑자기 등장한 이 남자밖에 없었으니까.
‘자네, 양심의 가책은 느끼는가?’
나는 말없이 그에게 아련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킬리안이 나른하게 눈을 접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왠지 가소롭다는 미소였다.
아, 그러고 보니 애초에 킬리안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게 내가 루프를 일으킨 탓이었지. ……그럼 이것도 따지고 보면 나 때문이야? 나는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인데 나로 인해 파생되는 결과는 왜 재앙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
‘인생…….’
나는 간만에 인생 타령을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 기사들이 마물 토벌을 하러 갈 때 꼽사리 껴서 레녹스와 샬럿을 찾아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끼어들 수밖에 없는 건가.
“오늘은 마물들이 보이지 않아 허탕을 쳤다고 했던가?”
“아, 그렇습니다. 마기(魔氣)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니 살아 있는 것은 분명한데, 어디에 숨었는지 흔적도 없고 나타나질 않더군요.”
“그럼 번거롭게도 조만간 다시 토벌에 나서야 하겠군. 외부에서 물자를 들여오기 위해서는 말이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다음 토벌에는 나도 함께하도록 하지.”
“……예?”
비싈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친절하게 그의 의문에 확신을 실어 주었다.
“제대로 들었어, 비실 경.”
“누가 비실입니까!”
그는 울컥해서 평정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가 곧바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내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물 토벌을 함께하실 순 없습니다…… 영애께서는, 그게, 그러니까…… 레이디 아니십니까?”
비싈은 일단은요, 하고 굳이 덧붙여 말했다.
레이디? 날 천하에 둘도 없는 변태 성욕자로 만들어 경멸하더니 갑자기 왜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돌변했어? 일단 여성이면 지켜야 한다는 쓸데없는 강박 관념이라도 있나?
“언제는 마녀라더니?”
“……그건 실언이었습니다.”
공작 영애에게 마녀라니.
생각해 보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발언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살피다가 흐응, 하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과도 안 하네.”
틀린 말은 안 했다 이건가? 악에 굴복하지 않고 할 말은 해야겠다는 기사도 정신? 내가 그렇게 묻자, 그는 손등에 핏줄이 꿈틀거릴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며 나를 노려보았다.
“비실 경.”
그제야 이 모든 걸 방관하던 킬리안이 그를 나지막이 불렀다.
그 와중에 또 멋대로 이름을 개명당한 비싈의 이마에 핏대가 섰지만, 킬리안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기울이며 나긋하게 물었다.
“제가 언제까지 아가씨 앞에서 경거망동을 서슴지 않는 경의 무례를 참아 드려야 합니까?”
그는 집사가 된 이후부터 늘 습관처럼 머금고 있던 웃음기를 완전히 지워 냈다. 단지 그랬을 뿐인데 위압감에 그대로 숨통이 죄이는 것 같았다.
킬리안이 내 일에 잘 끼어들지 않는 것은 본인 나름대로 규칙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실패하든 성공하든 간에 어쨌든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길 바라고 있었다.
날 신의 사랑을 받는 주인공이자 악녀로 만들기 위해서, 가 표면적인 명목이긴 한데…….
가만히 지켜보니 내가 가르치는 대로 잘 흡수하니까 키우는 게 재밌어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킬리안 2세로 만들고 싶어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만큼 잘 나서지 않는 그가 나설 정도면 비싈이 어지간히 선을 넘은 모양이었다.
덜덜. 나는 체통도 잊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이며 킬리안과 거리를 벌렸다. 그 말이 날 향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거지.
“아가씨.”
“으, 으응?”
화살이 나를 향했다?! 어째서!
“아가씨께서 관대하게 넘어가 주시니 아무래도 버릇이 잘못 든 것 같은데, 대신 교육해도 되겠습니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데 입매만 호선을 그리는 살 떨리는 미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킬리안의 페이턴트 레더 구두가 뚜벅뚜벅 정적을 갈랐다.
집사님이 비싈을 친히 참교육 하러 나서신다. 왠지 슈베르트의 마왕을 배경음으로 깔아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교, 교육이라니요! 아무리 공작 영애의 집사이셔도 그렇지 손님으로 찾아오셔서 이 무슨…… 아악!”
비싈은 단박에 무력을 잃었다!
킬리안이 한쪽 어깨를 붙잡고 그대로 내리눌렀을 뿐인데 비싈은 그대로 풀썩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어, 어떻게…….”
본인도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맥없이 주저앉을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 위로 수십 개의 의문 부호를 띄우며 경악이 담긴 시선으로 킬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킬리안과 닿으면 엄청난 불행이 닥친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킬리안의 손길이 닿은 비싈의 어깨에 시선을 주었다.
킬리안이 갑자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는 없고 아무래도 고의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귀에서 반짝이는 피어싱에 시선을 주며 생각했다.
‘안전장치를 하고 있으니 죽지는 않고 죽을 뻔한 위협이 닥치는 정도의 불행이니까 괜찮겠지……?’
괘, 괜찮은 거 맞나?
내가 반신반의하고 있을 때 비싈은 몸에 힘을 바짝 주며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도로 일어나고 싶은 모양인데, 불행히도 그가 발악하고 있다는 것만 느껴질 뿐 킬리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비실 경.”
쓸데없이 용을 쓰던 비싈은 새빨개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얼마나 힘을 준 건지 그의 이마는 식은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두 번 묻는 수고로움은 이번 한 번만 용납해 드리겠습니다, 비실 경.”
“……예.”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비싈은 본인이 비실이라는 걸 더는 부정하지 않은 채 순순히 대꾸했다.
“아가씨를 응대하는 당신의 눈높이는 딱 이 정도가 적당합니다. 제가 직접 눈높이를 맞춰 드리기 전에 다음부터는 알아서 굽히십시오.”
“…….”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아? 비싈이 날 볼 때마다 무릎을 꿇으면 본인뿐만 아니라 나도 만만찮게 수치스러울 것 같은데.
강제로 눈높이 교육을 당해 버린 비싈은 뭐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나, 하는 시선으로 킬리안을 보았다.
“아시겠습니까?”
킬리안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비싈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분해하는 기사단과, 그를 걱정하는 남작의 아들들에게 차례로 눈길을 주다가 마지못해 입술을 달싹였다.
“……알겠습니다.”
내가 남작의 아들들을 건드릴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웬만하면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생각을 고쳐먹은 모양이었다. 정작 나는 아무 생각 없다만.
나는 문득 든 생각에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들을 위해서라면 한 몸 바치겠다고 들었는데.”
“그, 예……?”
“설마, 했던 말을 번복하지는 않을 테지, 비실 경. 그러면 이 마녀의 심기가 불편해져서 갑자기 그대의 도련님에게 관심이 갈지도 모르니.”
“예?!”
“그러니 내가 동행하는 것에 이의 없길 바라, 비실 경.”
“…….”
내 말에 그는 배신감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른 불경한 뜻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다만, 솔직히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희 몸을 스스로 지키기에도 급급해서…….”
어쩐지 내게 무릎을 꿇었던 것보다 더 수치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영지를 지켜야 하는 기사단이 본인 안위밖에 살필 수 없다는 것에 무력함을 느끼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모두 떠나 버리고 남은 인원이 이것밖에 안 되니 당연한 것 아닌가?
비싈은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발언하고 있었고, 한마디로 내가 함께하면 걸리적거리고 방해라는 뜻이었다. 그 말이 날 마녀라고 매도하는 것보다 더 큰 실례라는 걸 모르겠지.
“누가 지켜 달라고 했어?”
“네?”
“내 안위는 알아서 챙겨. 그대들의 보호를 받으려고 했다면 애초에 동행하겠단 말도 꺼내지 않았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일만큼은 내 몸 하나쯤은 지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떠들어 봤자 직접 보여 줄 때까지 믿을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킬리안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