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악녀 메이커 65화
그러자 비싈이 아, 하고 영구 박 터지는 소리를 내더니 순식간에 수긍하는 듯했다. 그러고는 ‘수도에서 여기까지 호위도 없이 어떻게 오셨나 했더니…….’ 하고 중얼거렸다.
“대체 왜 그런 위험을 자초하시는 겁니까? 영애, 이건 놀이 같은 게 아닙니다. 죽을 수도 있어요.”
“말했잖아. 특산품 찾으러 왔다고.”
그가 나를 철부지 영애로 취급하기에 나도 철부지처럼 답했다. 그러자 나에 대한 편견에 가득 차 있는 비싈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그…… 대화 끝나셨습니까?”
그때, 뒤늦게 우리의 눈치를 보던 남작이 소심하게 물어 왔다. 기사들의 돌발 하극상 때문인지, 아니면 킬리안의 눈높이 교육 때문인지 처음 봤을 때보다 기가 많이 죽어 있었다.
실제로 여기서 더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는 듯했기에 내가 눈빛으로 긍정을 표했다.
“어서 방으로 안내해 드려.”
내 기색을 읽은 카젠 남작이 하녀를 닦달했다. 내가 그의 아들들에게 조금도 관심 없다는 사실을 밝혔으니, 그에게 있어서 나는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나는 하녀를 따라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가는 길에 문가에 서 있던 남작의 셋째 아들, 이든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앗, 아이 컨택.’
그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왕 눈을 마주친 김에 훤히 드러난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카젠 영식, 혹시 남작과 연을 끊고 싶다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한 번쯤은 도와드릴 수도 있으니까.”
설마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이든은 토끼 눈을 뜨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그와 밀담을 하는 것을 본 비싈은 도끼눈을 떴다. 아, 거참. 당신 자식 같은 도련님한테 관심 없다니까.
사실, 이 소설을 쓰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서 아까부터 계속 그들이 신경이 쓰였다.
이든이 스스로 벗어날 능력이 없고 정말 동생들을 생각한다면 알아서 날 찾아올 테지. 만약 내가 의심스럽거나 아버지를 놓지 못해 찾아오지 못한다면 제 팔자 스스로 꼬는 거지, 뭐. 과거 윤하늘처럼 말이다.
“선택은 영식 몫이죠.”
괜한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한 뒤 망설임 없이 하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비싈이 등 뒤에서 ‘무, 무슨 말을 들으신 겁니까! 마녀, 아니, 영애가 무슨 감언이설을 속삭인 겁니까! 속으시면 안 됩니다, 도련님!’ 하고 꽥꽥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때였다.
와장창―!
“악!”
“뭐, 뭐야!”
“차, 창문을 깨고 독수리가……!”
“갑자기 웬 독수리?!”
“독수리가 단장을 덮쳤다!”
“비싈 경!”
“삐이이~익!”
뒤에서 뭔가 난장판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데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갑자기 새 우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킬리안이 내 어깨를 끌어안고 뒤를 돌아보지 못하게 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그의 짓인 게 확실했다.
* * *
“지금까지는 계획했던 대로인 듯한데…….”
당연하지만 내 방과 킬리안의 방은 따로 배정 받았을 텐데.
내가 한참 침대를 뒹굴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하고 새삼스럽게 놀랐다가 뒤늦게 몸을 늘어트렸다. 매번 암살자처럼 기척 없이 슥 나타나는 건 여전했다.
“그런데요?”
나는 침대 위에 나른하게 늘어진 자세로 턱을 괴면서 물었다.
“그런데 네 계획은 전과 달라진 것 같더군.”
“아, 티 났어요?”
“무척.”
딱히 들킬 만한 언동은 하지 않은 것 같은데 킬리안의 눈에는 다 읽힌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킨 뒤 뒷목을 긁적이며 순순히 이실직고했다.
“원래는 아시다시피 샬럿과 레녹스 있는 동굴을 찾아가 결정적인 순간에 황태자처럼 짜잔― 하고 등장해서 카젠 영지로 데리고 올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나는 오른손 중지 손가락에 끼고 있는 에메랄드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마저 이었다.
“그런데 이왕 온 거 산맥의 마물들도 없애 주고 싶어요. 영주랑 기사들이 좀 재수 없긴 하지만, 영주민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닐 테고. 팔려 가야 하는 아들들도 불쌍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비슬인지 비실인지한테 보여 주고 싶었다. 그 편협한 시야에 내 역량이 어디까지인지 똑똑히 아로새겨 주고 싶었다.
권력과 힘으로 짓눌러 억지로 무릎을 꿇리는 게 아니라, 그냥 나라는 사람의 능력에 감탄해서 무릎이 갈렸으면!
‘……라고 입에 담기는 민망한데.’
사실 귀족들이 날 악녀라고 비웃었을 때도 가소롭고 한심했을 뿐 이런 생각이 들진 않았는데, 비싈의 ‘너 마녀잖아? 너 레이디잖아?’ 공격에 어지간히 열 받았던 모양이다.
사실 내가 유일하게 믿고 있는 것은 내게 마물의 힘이 조금도 통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앞서 말했듯이 마물은 생명체라기보다 마력에 의해 생성된 주술에 가까운데, 킬리안은 그들이 아무리 내게 닿아 봤자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나에게는 주술이 통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뭐 하나. 나는 겨우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왕초보였는데. 왕초보 사냥터에서 다람쥐나 잡아야 하는 쪼렙이란 말이다.
눈앞에 있는 몇 마리 정도는 어떻게 요행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이 산맥의 모든 마물들을 처리하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 평생 검술을 수련해 온 기사들도 마물 때문에 고전하고 있는데.
내가 말하고도 참 허무맹랑했기에 의욕만 앞설 뿐, 조금도 확신이 서질 않는다.
막막하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킬리안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내가 수많은 말들을 생략했음에도 어째 내 심정을 파악하고 있는 눈치였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그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에게 물었다.
“오늘따라 갑자기 마물이 안 보인다는 그거, 킬리안이 한 일이죠?”
“뭐…… 그렇지.”
킬리안은 내가 앉아 있는 침대 끝에 본인도 털썩 걸터앉으며 대꾸했다.
나는 그 모습을 생각 없이 헤― 하고 지켜보다가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나, 남녀칠세부동석! 평소에는 개뿔도 신경 쓰지 않던 유교의 교리를 속으로 들먹이며 몸을 사렸다.
그러자 그는 내 재롱을 구경하듯 지켜보다가 말했다.
“마물들은 마력의 흐름에 따라 이동하는 습성이 있지. 아무래도 공기 중에 마력이 뭉쳐 있는 곳으로 가면,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으니까.”
“엑, 그 말은 킬리안이 마력의 흐름도 조정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주술사라면 누구나 하지 않나?”
킬리안은 ‘주술사인데 그 쉬운 걸 못할 수도 있어?’ 하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건 저도 다른 주술사를 만나 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만…… 왠지 느낌상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마물의 움직임을 조정할 수 있다는 거네요. 그럼 킬리안은 이 산맥에 서식하는 마물들을 한꺼번에 없애는 게 가능하겠죠?”
“도와달라고?”
그는 슬쩍 미간을 구기다가 내 이마를 검지로 톡, 튕겼다. 앗, 따거!
“내가 도와주면 의미가 없어. 나는 오로지 너를 빛내기 위한 도구로서 네 뒤를 보조하고 있는 거니까. 그런데 내가 주역이 되면 무슨 의미지?”
……뭐, 그야 그렇지만.
혼자 하기는 너무 막막하니까 조금 마음이 약해졌던 것뿐이었는데. 나는 쓰라린 이마를 문지르면서 시무룩해졌다.
“방법 정돈 알려 줄 수 있어.”
“그, 그게 뭔데요?”
나는 정좌하며 그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내가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침을 꿀꺽 삼키자,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첫 번째는 내가 레테 제국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듣고 보니 그랬다. 킬리안의 주체할 수 없이 넘쳐흐르는 마력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거였으니까.
잠깐, 그 말은…….
‘원래 살던 그 유토피아 같은 숲이라는 게, 대륙 밖에 있던 거였어?’
루프의 원흉인 나를 찾으려고 대륙을 건너왔단 말이야? 오, 오늘도 나는 킬리안 앞에서 까불거리지 말아야겠다는 짙은 결심을 하게 된다.
“두 번째는요?”
그와 떨어질 수 있단 생각에 흔들릴 뻔하긴 했지만, 나는 첫 번째 방법을 기각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킬리안이 달콤한 미소를 짓더니 팔을 뻗어 나를 폭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게 된 나는, 낯이 홧홧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다.
제발 자비 좀요.
이러다가 제가 제 명에 못 살고 심장 마비로 돌연사 해 버릴 것 같아서 그러는데요…….
하지만 내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킬리안이 날 놓아주는 일은 없었다. 버둥거리면 이건 대가라고 하면서 그대로 입을 다물 게 뻔했다.
“마물이 숲에서만 탄생하는 이유는, 숲만 생명의 매개체가 되어 주기 때문이야. 그러니 숲을 불사르면 돼.”
그것참, 화끈한 방법이군요.
“……세 번째는요?”
“핵이 되는 마물을 죽이면 돼.”
이제야 좀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나왔다.
나는 고개를 빼꼼 들었다가 나를 끌어안은 채 지척에서 내려다보는 킬리안을 보고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대체 그에 대한 완벽한 면역 체계는 언제쯤 완성되는 걸까.
“핵이란 마력과 숲의 생명력이 결합된 본체라고 할 수 있지. 나머지는 핵이 지닌 마력의 양에 따라 무수히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하는 분신 격이고.”
“오, 그럼 꽤 간단하네요……!”
나는 고개를 다시 번쩍 들어 올리면서 외쳤다.
그러니까, 그 핵이라는 마물을 찾아서 파괴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얼굴에 화색이 돌자, 그는 날 보고 마주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면 기사들이 지금껏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겠지.”
“…….”
“그래도 긍정적이라 보기 좋네.”
“…….”
“긍정만으로 해결되진 않겠지만.”
“…….”
서, 성격 나빠.
나보고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으면서, 어차피 안 될 거 알더라도 할 수 있다고 기운이라도 좀 북돋아 주면 안 됩니까.
내 자존감이 바닥 칠 때는 오구오구 어르고 달래더니, 내가 너무 일을 쉽게 생각하면 금세 저렇게 말한다.
‘역시 노련한 조련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