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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66화 (66/131)

# 66

악녀 메이커 66화

나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가 그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말을 돌렸다.

“그런데 기사들은 핵이 되는 마물이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던데요?”

그들과 나눈 대화 속에서 그런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영주도 그렇고 기사들도 그렇고 그냥 급격하게 늘어나는 마물의 수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에 마물에 대해 나름대로 조사를 해 보았던 나 또한 금시초문이었다.

내 질문에 킬리안이 그 이유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마물들은 수백 년 동안 거의 멸종 위기 동물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아주 운이 나빠 마력이 밀집해 있는 공간에 들어섰다가 마물에게 습격을 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는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굳이 수고스럽게 마물의 핵을 찾아서 없애 버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설명이었다.

쉽게 말해 평화에 찌들어 버린 인간들의 말로라는 것이로군. 아무리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만약을 대비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니.

‘그 말은 이곳에서 나만 알고 있는 아주 희귀한 정보라는 말이렷다.’

나는 주술에 특화된 정보원, 킬리안의 도움으로 손쉽게 마물들을 처리할 방법을 얻었다.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시도할 가치는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직접 나서진 않겠지만, 마물을 처치하는 방법 정도는 알려 주마.”

킬리안은 친절하게도 내게 직접 마물의 종류별 공략법까지 알려 주었다. 듣다 보니까 진짜 게임 몬스터 잡는 공략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워낙 판타지 같아서 내가 감을 잡지 못하자, 그는 직접 양피지 위에 마물의 생김새를 그려 설명해 주기도 했다.

‘와…… 그림 진짜 못 그린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대체 어떻게 저렇게 그릴 수가 있는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대체 뭘 그린 건지 말로 설명한 것보다 더 모르겠어.

“이게 뭐예요?”

“나무.”

“…….”

동그라미에 막대기? 기호인가?

킬리안도 못하는 게 있었구나. 예술에 대한 지식은 진짜 해박하던데 아무래도 이론에만 강한 건가.

술식 같은 건 반듯하게 잘 그리지 않았나? 그건 아무래도 그림이라기보단 문자와 도형에 가까워서 개념이 많이 다른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글 솜씨와 그림은 좀 자신 있는 편이었다. 처음으로 그보다 더 잘하는 걸 찾아냈다는 기쁨에 뿌듯해하고 있는데, 정작 그걸 그리고 있는 본인은 세상 진지했다.

……어째서야. 심지어 자각이 없어?

“사람 그려 봐요.”

나는 나무라기보단 막대 사탕에 가까운 그림 옆을 가리키며 대뜸 그에게 시켜 보았다. 그러자 킬리안이 망설임 없이 찍찍 졸라맨을 그렸다.

‘그럴 줄 알았어!’

어쩜 이렇게 예상과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 거지.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귀여워 보인 건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그가 눈썹을 까딱였다.

“왜 웃지?”

“아뇨, 아무것도.”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그는 의아하다는 듯 보다가 다시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설명을 계속했다.

그림은 못 그려도 선은 자 대고 그린 것처럼 진짜 깔끔하게 긋는다. 원은 무슨 컴퍼스로 그린 것 같고.

나는 ‘원을 잘 그리면 변태라는 속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뒤늦게 그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그렇게 새로운 마물 토벌 일정이 잡힐 때까지 영주성에서의 나날들이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 * *

“아니, 마물 토벌을 가는데 옷차림이 그게 뭡니까?”

비싈은 킬리안이 입고 있는 연미복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다. 뒷목을 잡을 기세였다.

그런데, 머리에 땜빵은 어쩌다가 생긴 거야? 나는 동전 크기 정도로 머리가 빈 비싈의 뒤통수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디서 쥐어뜯겼나?

뭐, 그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발크 산맥은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말을 타기 어려울 정도로 험준했다. 그런 곳을 가야 하는데 정장에 구두를 신고 오니 황당할 만하지.

하지만 킬리안이 어디 보통 사람이던가. 대마법사도 이겨 먹는 주술사에게 때와 장소에 맞는 옷차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킬리안이 저러고 강과 바다를 건넌다고 해도 충분히 납득할 거라고.

“세바스티안의 연미복은 뭐랄까, 제복 같은 거라 절대 안 벗을걸.”

나는 영 쓸데없는 것에 간섭하는 비싈에게 한마디 조언을 해 준 뒤, 그대로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이제는 말 정도는 안장만 있으면 혼자 탈 수 있단 말씀! 승마의 ‘승’ 자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내가 언제 이만큼 성장했는지 감개무량하다.

나는 말고삐를 쥐고 씩씩하게 말했다.

“그만하고 출발하지.”

그러자 기사들이 나를 희한하다는 시선으로 빤히 응시했다.

뭐, 왜.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니, 내가 입은 짙은 회색빛 바지가 보였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들른 마을에서 산 거였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 남성들 의복은 비교적 19세기에 가까웠는데, 여성들 의복은 대체로 18세기 로코코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여성에게 바지는 빅토리안 시대에 보편화되었으니까 그들은 귀족 여성이 바지를 입은 건 아마 처음 봤을 거다.

원래 의복은 혁명 같은 큰 격변을 겪은 뒤에야 자유롭게 변하기 마련인 만큼, 고작 여성이 바지를 입었을 뿐인데 저런 반응이라는 것에 어째 입맛이 좀 썼다.

“귀족 영애가 바지를 입으니까 이상해 보이는 모양이지?”

토벌 나간다고 해서 불편한 치마가 아니라 편한 바지를 입고 왔는데 이상하게 쳐다보는 저 태도 좀 봐라.

그렇게 내가 대놓고 돌직구를 던지자, 그제야 그들의 시선이 떨어졌다.

“아뇨, 잘 입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또 편견에 찬 헛소리나 할 줄 알았던 비싈은 생각보다 진지하게 내 말에 대꾸해 주었다. 킬리안이 연미복을 입고 토벌대에 참가한 충격이 상당했는지 조금이나마 날 다시 봤다는 표정이었다.

“오늘은 영애와 함께하는 영광을 얻었으니, 위험한 마물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은 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희가 선두와 양옆에서 호위해 드릴 테니 뒤에서 잘 따라오십시오.”

아, 그러셔? 날 다시 보기는 개뿔이 그냥 하나하나 챙겨 줘야 하는 구제 불능의 레이디에서 조금 덜 성가셔진 레이디 정도로 바뀐 모양이군.

‘내 안위는 내가 알아서 지킨다는 말은 대체 어디로 들어 먹은 거야?’

나는 뚱한 표정을 지었으나, 처음부터 갑자기 위험한 마물을 상대하는 건 솔직히 벅차긴 할 것 같아서 이번만큼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토벌대는 산맥을 타고 그대로 쭉 직진했다. 길이 크게 난 걸로 보아 아마 사람들이 예전부터 자주 오가던 경로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런 곳에 위험한 마물이 있진 않겠지.

“이 근방에는 로튼 트리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오, 로튼 트리. 지난번에 킬리안이 막대 사탕을 그려 놓고 나무라고 박박 우겼던 바로 그 마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림으로는 도저히 생김새를 짐작할 수 없었으니 실제로 어떻게 생겼을지 굉장히 궁금했다.

“겉모습이 썩은 나무라고 해서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나무줄기를 채찍처럼 휘두르니까요. 줄기에 상처를 입으면 곧바로 마비가 오기 때문에 움직임이 점점 둔해집니다. 치명적인 독성은 없지만, 마비가 심하게 오면 완전히 몸이 굳기도 합니다.”

스피드 왜건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비싈은 로튼 트리에 관한 설명을 줄줄 읊었다. 그건 이미 킬리안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허리춤에 찬 검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동안 아일라의 몸으로 지내면서 새삼 놀란 것이 있었는데, 그녀는 생각보다 몸을 쓰는 것을 잘했다.

아니, 오히려 재능이 있는 쪽에 가까웠다. 현실에선 몸치에 가까웠던 내가 이 세계에서 넘어오면서 춤을 아주 빠르게 습득했고, 승마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혼자서 몰 수 있게 됐고, 체력도 좀 키우고 근력도 키우니까 금방 근육이 붙었다. 왜 지금껏 그녀가 이쪽으로 재능을 살리지 않았던 건지 의아할 정도로.

나는 그냥 딱히 능력이 없는 평범한 캐릭터로 설정했던 것 같은데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지.

악녀 역할만 몰아주다 보니 애가 제 역량도 발휘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죽은 것 같아 작가의 입장에서 굉장히 미안했다.

아무튼, 아일라가 힘이 좋아서 검을 배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도 롱 소드를 휘두를 수 있었다.

물론 ‘가능’만 하다는 거지, 여전히 내 검술 실력은 검술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수준이었다. 나는 킬리안이 검술 시범을 보이고 나서 내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해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거의 허우적거리는 것에 가까웠지…….’

하지만 킬리안은 내 그런 발 같은 컨트롤에도 마물을 처리할 수 있다고 해 주었다.

그는 절대 가능성 없는 허튼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만큼 마물이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거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한참 말을 타고 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말을 세운 비싈이 우리를 향해 멈추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에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니 전방에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모였다. 아마도 로튼 트리인 것 같았다.

로튼 트리는 나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어딘지 머리에 두 다리 달린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사람이 좀비가 되었다가 그대로 나무가 된 느낌이라고 할까. 로튼 트리 몸체에서 거품과 함께 흘러내린 녹색 진액과 버섯 포자처럼 곳곳에 피어난 것들이 순식간에 시선을 강탈해 갔다.

‘와, 징그러워…….’

그냥 움직이는 썩은 나무 정도를 상상했던 나는, 생각보다 더 흉물스러운 로튼 트리의 생김새에 감탄했다. 그리고 말없이 킬리안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저걸 보고 막대 사탕을 그릴 수가 있어요?

나는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그를 보았으나, 귀신같은 눈치의 소유자인 그도 지금만큼은 내 시선을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영애는 여기 계십시오. 집사님께서 영애의 곁을 지켜 주실 거라 믿습니다.”

이놈이 끝까지.

비싈과 그의 기사단원들은 우리를 놔두고 그대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로튼 트리를 향해 기척을 죽여 신중하게 접근하더니, 하나씩 능숙하게 처리했다.

그야말로 대학살이었다.

기사들은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로튼 트리의 나무줄기를 검으로 쳐 내고 순식간에 몸체를 향해 접근했다. 그리고 로튼 트리의 머리처럼 생긴 부분을 날려 버리자 그 즉시 새까만 가루가 되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원래의 모습이었던 마력으로 돌아간 것이다.

발크 산맥에서 가장 약한 마물이라더니 정말 삽시간에 없애 버린다. 아무리 지방 영지의 기사라고는 해도, 그간 마물을 처리해 온 경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지 다들 굉장한 실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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