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악녀 메이커 67화
어쩐지 막상 이렇게 닥치니까 좀 주눅이 들었다. 킬리안의 말만 믿고 너무 의기양양했나.
‘조금 반성…….’
평생 단 한 번도 싸움해 본 적 없는 사람이 저 속에 말려든다면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저들 입장에선 검도 제대로 못 다루는 영애가 마물을 잡겠다고 나섰으니 기가 막혔겠지. 그들은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마물과 싸우고 있는데 여기가 애들 장난인가? 놀이터인가? 하고 울컥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혹시라도 고귀한 공작 영애의 몸에 상처라도 생기면, 보통 경을 치는 건 그들일 테니 아주 골치가 아팠겠지.
그래,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닌데 이렇게까지 당당하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나?’ 하고 한 번쯤 물어봐 주면 어디 덧나나? 내게 뭔가 재능이 있거나 숨겨 둔 힘이 있을 거라는 가능성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제외하는 게 열 받는다고.
나는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로튼 트리들을 눈으로 쫓았다.
숲 지척에 널린 게 나무라 그런 건지, 나무형 마물인 로튼 트리는 사방에서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때.
“가 봐.”
킬리안이 멀뚱히 그들의 뒷모습만 보고 있던 내게 말했다.
“……네?”
그 말에 나는 조금 얼빠진 반응을 보이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마물이 코앞에 닥치니까 주춤하게 되었다. 다들 저렇게 진지해져서 필사적으로 싸우니까 기가 질린 것이다.
내가 과연 저 치열한 전투에 속에 당당히 끼어들 수 있을까?
“엄살은.”
그러자 킬리안이 창백하게 질린 내 얼굴에서 갈팡질팡하는 기색을 읽어 내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저런 걸로 죽을 정도였으면 이미 날 처음 만났을 때 죽었겠지.”
그리고 그 말은 무엇보다 내게 용기를 북돋아 줬다.
듣고 보니 나, 매일 최종 보스 같은 남자와 부대끼면서도 지금껏 잘만 살아남았잖아?
게다가 첫 만남에서 그가 날 죽이고자 주술을 읊었는데도 조금도 통하지 않았지. 남들은 툭, 하고 부딪히기만 해도 마차에 치일 뻔하는 등의 불행이 닥쳐오는데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어도 멀쩡하고.
로튼 트리의 생김새만 봐선 인간계를 파멸하기 위해 지옥에서 올라온 파수꾼 같긴 하지만, 저건 킬리안의 발톱의 때만큼도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였다.
좋아, 검술 훈련을 위한 통나무 정도로 생각하자. 사실 나무라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게 없잖아?
나는 어색한 동작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걸음을 떼다 잠시 주춤하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각오를 다지듯 이를 악문 뒤에 조금씩 걸음을 내디뎠다.
* * *
비싈은 요즘 따라 거리를 걸으면 꼭 머리 위로 새똥을 맞고, 큰일을 보러 가면 항상 닦을 게 없으며, 빵을 떨어트리면 꼭 쨈을 바른 쪽이고, 지나가던 마차에 치일 뻔하고, 마차를 겨우 피하면 말똥을 밟으며, 똥 밟은 신발을 닦기 위해 강이 흐르는 산맥으로 향하면 가장 먼저 마물의 습격을 받았다.
‘재수 옴 붙었나.’
돌이켜 보면 그의 불행은, 그날 갑자기 창문을 깨고 나타난 독수리에게 습격을 당한 뒤부터 시작되었다.
돌연 들이닥친 독수리는 갑자기 대뜸 비싈을 덮쳤고, 급소만 집요하게 노리며 달려들었다. 그가 머리카락을 제물로 바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지금도 간담이 서늘하다.
그때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메르텐시아 영애를 대면한 뒤부터였다. 그 뒤로부터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무언가로부터 비싈은 수도 없이 섬뜩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역시 그 영애는 마녀인 게 틀림없다.’
끝도 없는 불행에 시달리는 중인 그는, 하루하루 늙어 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비싈.
카젠 영지에서 평생을 나고 자랐으며, 그가 영주의 기사가 된 것은 대략 30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반평생, 아니, 그보다 조금 더 오랫동안 카젠 남작과 그의 가족들을 보필해 왔다. 그리고 마물이 갑자기 급격하게 늘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일상은 대체로 쳇바퀴 돌듯 반복되어 왔다. 카젠 같은 시골 촌구석에서 특별한 일이라고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비싈은 카젠 영지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손바닥 보듯이 훤하게 내다보고 있었다.
외부에서 카젠 남작의 성을 찾는 이들은, 대체로 그를 등쳐 먹기 위해 찾아온 노련한 사기꾼이었다.
남작은 옆에서 살짝만 부추기면 금세 넘어갈 정도로 귀가 얇았기 때문이었다. 남작이 꽤나 비열하고 약은 성정인 것치고는 머리가 나쁘고 순진해서 문제였다.
그 탓에 부유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던 카젠은 순식간에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굳이 마물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곧 인근 영지 영주들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카젠 남작도 문제였지만, 인근 지역의 다른 영주들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탐욕에 가득 찬 수전노들뿐이라 영주민들의 고혈을 쥐어짜 제 배를 불리는 장사치 같은 자들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저열한 짓을 숨 쉬듯 일삼는지, 카젠 남작이 양반으로 느껴질 정도니 이미 말 다했다.
하지만 영주로서 조금도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한참 떨어지는 남작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자식 농사는 잘 지었다. 아버지가 철이 없으니 자식들이 하나같이 총명하고 사려 깊은 멀쩡한 사람으로 자라난 것이다.
그 유일한 희망이 비싈의 발을 묶어 두었다. 그는 망해 가기만 하는 카젠 가문을 하루빨리 첫째 도련님이 물려받게 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계속 그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렸다.
마물의 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지만 않았어도, 정말 그런 꿈같은 미래가 실현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 예정된 미래는 쇠퇴밖에 남지 않았다.
며칠 전, 남작의 첫째 아들이 기사들을 불러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끝까지 우리 가문을 지켜 주어 고맙다고. 그대들의 공로는 내가, 그리고 내 동생들이 평생 잊지 않겠다고.
“내 입으로 이런 말을 꺼내게 될 때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그는 평정을 유지하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무덤덤하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침통한 기색까지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이제 더는 가망이 없어. 아직 어떻게든 버티고 있긴 하지만 식량도 일이 년 내로 떨어지겠지.”
그러자 기사 한 명이 분하다는 듯 이를 악물며 외쳤다.
“그래도 우리 카젠의 자랑은 토지가 비옥하다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든 자급자족을 하면……!”
“그대의 말대로 자급자족하면 연명이야 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사방이 산맥이라 퇴로도 완전히 막혀 있지 않나. 힘없는 영주민들은 이곳에 갇힌 것과 다름없어. 문제는 마물들도 우리가 독 안에 든 쥐 꼴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거다. 그들이 마을을 덮칠 가능성도 생각해야 해.”
“억측이십니다. 마물들은 절대 산맥 밖을 벗어나지 못하니까요.”
“그 증거는?”
“……증거는, 없지만.”
하지만 그냥 알았다. 마물이 숲이 아닌 곳에서 발견된 적은 없었으니까. 마물들이 사람 사는 마을까지 내려왔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적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어.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무시하면 안 된다. 영주민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비싈의 첫째 도련님은 그가 안전한 땅을 찾아서 영주민들을 대피시켜 주길 바라고 있었다. 말이 좋아 대피지, 사실 대규모 이주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말인즉, 영주민의 안전을 위해 언젠가 물려받게 될 영주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비싈은 도련님의 성품에 다시 한번 감탄하면서도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하고 회의적인 생각을 품었다. 어쨌든, 마물이 마을을 덮치든 말든 재정적으로 망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건 다름이 없었지만.
그렇게 한참 심란한 와중에 찾아온 메르텐시아 영애는,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환란이나 다름없었다. 진짜 환장할 지경이었다.
시골 기사 나부랭이가 수도의 대귀족을 만날 기회가 평생에 한 번이라도 있을까. 생전 처음 마주하는 공작 영애는 그동안 봐 왔던 귀족 그 누구와도 다르게 독보적이었다.
처음에는 명화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것처럼 경이롭고 현실감 없는 그 미모에 감탄했다.
외모는 아름다웠다.
외모만 아름다웠다.
우연히 숲에서 발견한 요정처럼 아리따운 아가씨가 소문의 마녀라는 것을 알았으면, 비싈은 절대 그녀에게 도련님들을 소개해 주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마녀가 어디 우리 도련님을!’
아일라가 본인 스스로 정체를 밝히자, 비싈의 생각은 손바닥 뒤집듯 돌변했다.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카젠 영지에 굳이 찾아와서 무슨 행패를 부리려고 무거운 발걸음을 하셨나.
‘내가 뭐 때문에 이곳에 남아 저런 답 없는 영주를 모시고 있는데? 씨,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유일한 희망조차 빼앗아 가는 건 못 참는다.’
그런데 도련님이 목적이 아니란다.
아일라는 그의 착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모두의 앞에서 집사의 미모를 자랑했다.
마치 ‘내 집사가 이 정도인데 지금 누구 앞에서 누굴 들이대?’ 하고 거들먹거리는 것 같았다. 그만큼 그녀의 집사는 그녀 못지않게 환상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수도의 귀족들은 외모로 뽑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순간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 남녀의 후광 때문에 눈이 시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놀랐던 것은, 소문보다…….
‘멀쩡한데?’
들은 소문에 의하면 세상에 둘도 없는 악의 화신이라던 아일라가 생각보다 정상인처럼 보였다.
물론, 천사처럼 착한 건 전혀 아니었지만 악마 같은 여자를 각오해서 그런 건지 상대적으로 괜찮았다. 오히려 카젠 영지를 호시탐탐 노리는 인근 영주들이 더 악마처럼 느껴질 정도로.
심지어 아일라는 돈에 눈이 멀어 제 아들을 팔아넘기려고 하는 카젠 남작을 경멸하며 세상에 둘도 없는 쓰레기 보듯 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건방지게 행동하는 비싈에게 손을 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이 마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걸 굳이 물어보며 마치 신경 써 주듯 토벌에 동행하겠다고 했다.
물론, 그들에게 전력은커녕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 같았지만 애초에 그런 말을 꺼낸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비싈은 이내 그 사실을 부정했다.
‘아니야, 저 마녀가 측은지심이라는 지극히 인간다운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어. 마침 심심했는데 재밌어 보이니까 따라나서는 게 분명해. 방해나 하면서 자기 몸에 흠집 하나라도 나면 경을 치려고 그런 거겠지.’
지금은 발톱을 숨기고 있을 뿐일 것이다. 때가 오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짓밟으려고 들 거다.
심심풀이로 사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아주 악독한 영애라고 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