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악녀 메이커 68화
“내 안위는 알아서 챙겨. 그대들의 보호를 받으려고 했다면, 애초에 동행하겠단 말도 꺼내지 않았겠지.”
그 말에 비싈은 확신했다.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이긴 하지만 고작 그것뿐. 귀족 영애답게 관리된 늘씬한 몸매에 검이나 제대로 휘둘러 본 적은 있나 싶을 정도로 가녀린 팔뚝에, 마물은커녕 토끼도 잡아 본 적 없을 것 같은 영애인데?
그런데, 보호가 필요 없다고?
‘대항할 힘도 없는 무력한 사람을 핍박하고 괴롭히고 죽여 보니,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거 아니야?’
돈과 권력으로 찍어 눌러 포식자처럼 군림하니까 세상에 발아래로 보이는 모양이지?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그렇게 무모할 수가 있을까.
인간 사냥과 마물 사냥이 같을 리가 없었다. 마물에게 인간은 황제라고 해도 한낱 먹이에 지나지 않는다. 마물에게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같은 게 통할 것 같은가.
물론, 대동하고 다니는 저 집사의 악력이 무지막지하긴 했지만 토벌에서 필요한 건 힘과 요령이 전부가 아니었다. 쪽수로 밀어붙이는 마물들에게 둘러싸이면 아무리 실력이 출중한 기사라 한들 별수 없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토벌대에 포함시키지 말고 처음부터 철저하게 배제할 생각이었다. 마녀의 의도대로 휘둘리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동행할 때마다 그녀를 빈틈없이 보호하고 마물이 없는 안전한 곳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자. 아무리 마녀라고 해도 생각이 있으면 제 발로 마물이 있는 곳에 다가가서 일부러 죽음을 자초하지 않겠지.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귀족들이 평민의 생명을 벌레처럼 짓밟을지언정 자신의 안위는 얼마나 소중하게 아끼고 챙기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비싈은 방심했다. 마녀가 그 정도까지 미친 줄은 몰랐다.
비싈은 점점 몰려드는 로튼 트리를 정신없이 해치우다가 꽤 먼 거리에서 그의 동료 기사 브라움이 버벅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방심하다 당했는지 움직임이 많이 둔해져 있었다.
“브라움!”
로튼 트리는 특징 중 하나는 아주 움직임이 느리다는 거였다. 아무리 마물이라도 썩어 빠진 나무가 빨라 봤자 얼마나 빠르겠는가.
하지만 로튼 트리는 그것의 대항책으로 상대를 둔하게 마비시키는 능력을 갖추고 진화했다. 그게 바로 로튼 트리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일단 한 번 당하기 시작하면 속수무책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몸에 마비가 오기 시작하면 점점 더 둔해지고, 둔해지면 더 많은 줄기에 맞게 되고, 그럼 더 둔해지고.
그러다가 움직임이 완전히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리면 로튼 트리가 다가와 조금씩 육체를 갉아 먹는다. 통각은 그대로인 상태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산 채로 몸이 갉아 먹히는 고통과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어이! 누구라도 가서 브라움 경을 지원해!”
너무 멀었다.
비싈은 힘껏 외쳤지만 다들 눈앞에 있는 로튼 트리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심지어 브라움은 혼자 무리에서 이탈해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로튼 트리의 독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서 가만히 있으면 금방 상태를 회복한다. 완전히 몸이 굳거나 아예 둘러싸이지 않는 이상…….
그렇게 생각한 순간, 브라움이 발밑에 있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저렇게 되면 로튼 트리들의 먹잇감이 되는 건 정말 시간문제였다.
아. 젠장, 빌어먹을.
살리러 가야 한다.
여기서 동료를 한 명이라도 더 잃을 수는 없었다.
비싈은 검을 휘둘러 눈앞의 로튼 트리의 목을 날려 버리고 브라움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렸다. 하지만 달리면서도 도저히 가망이 없다는 절망감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비싈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메르텐시아 영애?!’
아일라가 유유히 브라움의 뒤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양손 검인 롱소드를 왼손으로 잡았다, 오른손으로 잡았다 하면서 무슨 산책을 나온 듯 느긋한 걸음으로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환장 위에 환장을 더한 대환장 파티란 말인가.
아, 그래. 비싈은 아주 강렬한 확신이 섰다. 저 마녀는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는 빌미로 카젠 영지 자체를 그냥 싹 다 쑥대밭으로 만들 생각인 거야.
대체 왜 그런 짓을 벌이는가에 대한 의문은, 이미 그녀가 ‘아일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력한 확신이 되었다.
비싈은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뒷목을 붙잡고 비틀거릴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다시 달렸다.
도련님들을 생각해서라도 여기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내가 평생 몸 바쳐 온 이곳을 마녀의 장난질에 순순히 넘어가게 둘 수는 없다.
‘아…….’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가오는 아일라를 발견한 로튼 트리 한 마리가 그녀를 향해 줄기를 휘두른 것이다.
‘끝이네, 저건…….’
비싈은 그대로 눈앞이 까맣게 암전 되는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로 불바다가 되어 버린 카젠 영지가 펼쳐졌다.
고작 마녀의 유희에 소모되기 위해 지금까지 버텨 왔다니, 참 허무하기 짝이 없는 운명이기도 하지.
비싈은 아일라가 로튼 트리에게 맞았다고 길길이 날뛰면서 말도 안 통하는 마물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거나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참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채찍처럼 휘둘러진 로튼 트리의 나무줄기가 아일라에 닿기도 전에 힘을 잃고 가루가 되어 흩어지거나, 아예 그녀를 피해 바닥을 내려치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야, 저건.
비싈의 뜀박질은 어느새 멎었다.
그는 아일라가 마비 독이 묻은 나무줄기를 손으로 탁, 잡아채고 그것을 들고 있던 검으로 툭툭 끊어 내는 것을 아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오, 역시 썩은 나무라 그런지 쉽게 잘리네.”
아일라는 마물에게 둘러싸인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태평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살짝 반짝거리는 눈이 마물을 신기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신기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데? 대체 뭐야? 괴물?
그녀는 로튼 트리를 헤치고 나아갔다. 진짜 정말 말 그대로 헤치고.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곳에서 지나갈게요, 비켜 주세요, 하는 것처럼 마물들을 헤치고 나아갔단 말이다.
그때, 로튼 트리 하나가 흉측한 입을 벌려 지나가는 아일라를 갉아 먹으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영애, 조심……!”
하지만 비싈의 의미 없는 외침은 중간에 멎을 수밖에 없었다.
로튼 트리가 갑자기 천치가 된 것처럼 바로 눈앞에 먹이를 두고도 허공에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저런 걸 보면 공격할 의사가 없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그녀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란 말인가.
‘마녀라는 소문이 진짜였나? 지금껏 악랄하다는 의미의 마녀인 줄 알았는데, 진짜 마녀의 그 마녀였어?’
하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마녀라면 응당 마물을 수족처럼 다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저건 다루는 게 아니라, 그냥 마물들의 공격을 무효화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비싈은 브라움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대로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그런 비싈을 대신해서 아일라가 나섰다.
그녀는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쥔 뒤, 브라움을 덮치려고 하는 마물을 향해 휘둘렀다. 대각선으로 내려 베는, 검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실전 경험이 없는 사람이 가장 먼저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검술이었다.
동선이 길고 빈틈이 많은 대신 파괴력이 높은 검술이지만, 궤도가 뻔해서 저 정도는 마물도 피하는…….
콰직―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로튼 트리의 나무 밑동이 날아갔다.
요행이로군. 하지만 저렇게 단박에 머리를 날리지 못하면 로튼 트리는 죽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줄기로 반격을 당하게 되는…….
콰직, 콱! 콰지직―
“…….”
아일라가 로튼 트리의 머리를 날릴 때까지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비싈은 더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한두 번 하다 보니 감을 잡은 건지, 아일라는 이제 제법 능숙하게 로튼 트리의 머리를 단번에 도려냈다. 물론, 그녀에 한해서 마물이 힘없고 무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날아다니는 벌레를 잡는 게 저것보다는 힘들어 보이겠다.’
마물은 영악한 편이었다. 그냥 무작정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전력을 본능으로 미리 파악하고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판단이 서야지만 움직인다.
하지만 아일라는 약해 보이고 실제로도 약하기 때문에 너도나도 불나방처럼 달려들다가, 그녀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해 당하는 것의 무한 반복이었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느 정도 충격이 가시자, 비싈은 경악하는 것은 멈추고 착잡한 심정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괜찮아?”
아일라는 근처에 있는 로튼 트리를 전부 처리하고 쓰러져 있는 브라움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무거운 검을 내내 휘둘렀는데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지쳐 보이지도 않았다. 일반인치고는 굉장한 체력이었다.
비싈과 마찬가지로 아일라를 경악하는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던 브라움은, 내밀어진 그녀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살짝 경이로움을 담아 아일라를 응시했다.
“못 움직이겠어?”
“아, 아닙니다. 아직 움직일 수 있습니다.”
브라움은 더듬거리면서 그녀의 손을 무심코 잡았다가 생각보다 작고 부드러워서 놀라 확 뿌리칠 뻔했다. 여인에게 조금도 면역이 없는 그는 귓등까지 새빨개져 옴짝달싹도 못했다.
아일라가 그런 브라움을 잠시 의아하게 보다가 그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영차, 하고 힘을 주어 일으켜 세웠다.
브라움은 온몸이 다 근육질로 이루어진 곰처럼 큰 덩치의 장정이었다. 그런 그를 생각보다 쉽게 일으켜 세우자 브라움도 놀랐고, 비싈도 놀랐고, 아일라 본인도 놀랐다.
아일라는 ‘엥, 내 힘이 이 정도였나?’ 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비싈을 발견했다. 그녀는 할 말도 잃고 생각도 잃은 비싈에게 말없이 웃어 보였다.
그는 그녀의 당당한 미소에도 더 이상 마녀라고 매도하며 욕을 할 수가 없어졌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무슨 목적인지 의문투성이였으나, 그녀가 동료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무사해서 다행이네.”
아일라는 곁에 서서 허둥지둥하는 브라움을 향해 불쑥 말을 걸었다.
“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정말 큰일 나겠다 싶었는데, 영애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경의 이름은?”
“브라움입니다!”
브라움은 씩씩하게 답했다. 그러자 아일라가 ‘응, 그래. 브라움 경.’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더니 비싈의 시선을 정확하게 맞추며 말했다.
“방심하지 않는 게 좋아. 약해 보이면 누군가가 경을 토벌대에서 완전히 제외해 버릴지도 모르거든. 실제로 어떻든 상관없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