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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69화 (6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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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메이커 69화

아일라는 언제 웃었느냐는 듯 무심한 눈빛으로 비싈을 응시했다.

“세상은 흑과 백이 아닐 텐데.”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비웃듯이 입매를 비틀다가 이내 휙, 하고 등을 돌려 사라졌다.

두 기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뒷모습만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탐스러운 장밋빛 머리카락이 걸음마다 말꼬리처럼 흔들렸다.

저렇게 작고 가녀린 여인인데, 마물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건 어설플지언정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수십 년간 매일같이 마물을 상대해 왔던 기사들도 매번 마물을 토벌할 때마다 긴장을 놓지 않으면 안 됐다. 약한 마물이라고 방심했다가 목숨을 잃는 게 예삿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브라움처럼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렇게 자신감 넘치고 당당할 수 있다는 건, 무모한 오기가 아니라 뭐가 되었든 간에 그만한 무기를 가지고 있단 뜻이었을 텐데. 그 사실을 왜 몰랐을까.

‘몰랐다기보다는, 외면한 거지.’

비싈은 그동안 자신이 메르텐시아 영애를 철저하게 낮잡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인이라, 사악한 마녀라.

방해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낙인찍고 편협한 시야로만 판단했다. 정작 중요한 건 보려고 하지도 않고 말이다.

처음 그녀에게 동행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물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봤었다면 오해할 일 없이 끝났을 텐데. 어쩌면 정말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검술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정말 겁이 없군. 그런 이들이 실력이 급속도로 늘긴 하지.’

어느 분야에서든 두려워하지 않고 끝없이 부딪히면서 도전하면 누구든 실력이 월등히 높아지기 마련이다. 특히 검술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문제는 실력 좀 늘었다고 오만방자해져서 자기 역량도 모르고 무턱대고 달려드는 경우였다. 대련도 아니고 마물을 상대로 그런 건방을 떨었다가는 백이면 백,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메르텐시아 영애의 저 능력이라면…….’

정말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만약에 그녀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아니, 이곳에 머물면서 더 수련하고 어느 정도 검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렇다면 엄청난 전력이 되어 줄 것이다. 그만큼 마물에게 공격당해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능력이었다.

기본적으로 힘과 체력이 좋은 듯하니 재료도 좋고, 몸을 사릴 필요 없이 마물을 상대로 바로 실전에 뛰어들 수도 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우리의 뭐가 예뻐서 여기에 남아 수련까지 하면서 마물들과 싸워 주겠는가.

그녀의 신분이 조금만 낮았더라도 어떻게든 시도하려 노력이라도 해 보겠는데, 상대는 대귀족이었다. 그것도 황제 다음으로 세력이 막강하다는 메르텐시아 공작가의 막내딸.

‘애당초 모든 마물의 공격을 다 무효화한다는 보장도 없어. 어쩌다가 운 좋게 로튼 트리에게만 통하는 것일지도 몰라. 로튼 트리는 공격성도 낮고 약하잖아. 마비에 당해도 몸이 굳는 정도이고 몇 분 뒤 금방 풀리니까.’

비싈이 아일라를 오르지 못할 나무 취급하며 외면하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넋 놓고 있던 브라움이 비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말이 찔렀다지 거의 찍은 것과 다름없었다.

“어서 가서 사과하세요, 단장님!”

“……뭐?”

갑자기 미쳤나 왜 이래? 비싈이 황당하다는 듯 되묻자 그가 말했다.

“영애께서 단장님 때문에 화가 많이 나셨잖습니까! 저러다가 그냥 떠나 버리시면 어쩌려고 그래요?”

“며칠 전만 해도 마녀라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라고 다 같이 수군거릴 땐 언제고…….”

“그거야 저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지만, 영애가 영지에 있는 내내 사고 치는 것을 한 번이라도 봤습니까?”

듣고 보니 그랬다.

아일라는 그 소문의 마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무런 패악도 부리지 않고 얌전했다. 오히려 그녀의 집사가 아가씨께 드릴 음식에 이런 저급한 재료를 넣느냐고 양아치처럼 군 적은 있어도.

“지나다니면서 인사하면 받아 주시더라고요. 지금 그녀를 모시는 하녀도 영애가 친절하진 않지만, 소문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그랬습니다. 그냥 남을 신경 쓰지 않고 무심한 사람일 뿐이라고요.”

“그런 건 연기일 수도 있잖아. 영애의 새로운 놀이인지도 모르지.”

“지금 그게 문제입니까? 연기면 어떻고 실제 소문대로 마녀같이 괴팍스러운 취향이면 뭐 어때요?”

지금 그들이 상대가 어떤지 따질 처지인가? 일단 도련님들이 무사하다는 전제하라면 상대가 마녀든 마왕이든 괴물이든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만 했다.

브라움은 답답했는지 가슴을 치면서 소리쳤다.

“방금 못 보셨습니까? 로튼 트리를 말 그대로 무슨 썩은 나무 베어 넘기듯이 휙휙 처리하던 거?”

“검도 제대로 못 다루는 생초짜잖아. 막무가내로 휘두르다가 본인의 힘을 감당 못하고 본인이 휘청거리던데, 저래서 어떻게 오래 버텨?”

“그런 생초짜한테 제가 도움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마침 잘 말씀하셨습니다. 영애보다 두세 배 무거운 절 번쩍 일으켜 세울 만큼 힘이 좋잖아요? 영애는 원석이라고요!”

비싈이 내심 느꼈던 감탄을 브라움 또한 고스란히 느꼈던 모양이었다.

브라움은 마물을 허수아비만큼 무력하게 만드는 아일라의 가능성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설파했다.

영애가 조금만 도와주면 그간 골머리를 앓던 강한 마물들도 한 방에 처리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으냐, 물자를 조달할 때도 수월하게 들여올 수 있지 않겠느냐, 어쩌면 정말로 마물을 아예 이곳에서 쫓아내 버려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구원자일지도 모른다고요.”

브라움은 희망에 찬 눈빛으로 아일라가 사라진 방향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비싈은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졌다. 순간 그 말에 설득당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지언정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걸 남들 앞에서 인정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비싈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구원자는 무슨…… 반했냐?”

그 말에 한창 섬세한 나이인 열여덟의 청년 기사 브라움은 차갑게 식어 버린 표정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아, 진짜……. 단장님이 그런 아저씨 같은 소리나 하니까 장가를 못 가신 겁니다.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빨리 가서 사과하세요.”

장가를 못 간 게 여기서 무슨 상관이야! 울컥한 비싈이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브라움은 막무가내로 비싈의 등을 밀쳤다. 기사 중에서도 나이도 가장 어린 게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따로 없었다.

단장님 멋있어요, 단장님 최고예요, 하고 병아리처럼 졸졸 쫓아다닐 때는 언제고 이렇게 건방져져서. 자식새끼 키워 봤자 소용이 없다더니.

비싈은 속으로 투덜투덜하면서 남은 로튼 트리들을 처리하러 갔다. 지금 뒤쫓아 가기엔 어째 민망했기 때문에 나중에 성으로 돌아갈 때 넌지시 사과할 생각이었다.

로튼 트리는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 약한 마물이라 토벌은 순식간이었다.

“……영애는?”

그런데, 마물들을 없애고 나니 그녀는 이미 어딘가 사라지고 없었다. 기사들에게 물어보니 집사와 함께 성으로 돌아가고 없다고 했다.

“…….”

망부석이 된 비싈을 보고 브라움이 고개를 흔들며 쯧쯧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그의 단장이 매번 여자들에게 차이는 이유는 수만 가지였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못 잡는 거라는 것을.

* * *

‘이상하다.’

씻고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운 나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매끈한 손바닥을 빤히 응시했다.

사실 킬리안에게도 말하기 창피해서 일부러 숨겼는데, 아까 검을 겁집에 집어넣을 때 검 끝쪽에 바짝 손을 대고 있다가 손바닥을 베였었다.

아니, 내가 어? 비실이 앞에서 멋진 척 폼 잡으며 마물들을 해치우고 죽을 뻔한 기사도 구해 주고 했는데, 그 뿌듯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게 무슨 머저리 같은 짓이란 말이야. 아무도 못 봐서 다행이지.

비싈과 브라움 앞에서 검을 집어넣지 않길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덜덜 떨거나 움찔거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분위기 잡으면서 공들인 거 다 날려 버릴 뻔했네.

상처가 깊지 않았기에 일정을 마치고 하녀가 목욕물을 데워 올 때까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목욕을 하다가 내 손바닥이 흉터 없이 말끔한 것을 발견했다.

아무리 옅은 상처라고 해도 검에 베인 상처였다. 그런데 어떻게 순식간에 아물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지? 내가 상처가 안 났는데 났다고 착각했을 리도 없고, 분명 피가 송골송골 맺히는 걸 똑똑히 봤는데?

‘뭐지?’

내게 아무런 능력도 통하지 않으니까 이제는 검마저 내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된 거냐? 이젠 뭐 자가 치유 능력마저 생긴 것인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어쩌다가 종이에 손가락을 베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꽤 오랜 기간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때 킬리안이 넌 포션이나 치료 마법도 통하지 않을 테니 웬만하면 다치지 말라고 내게 조언해 주었었지.

그래서 검술 훈련 때도 최대한 다치지 않게 그가 배려해 주기도 했고, 또 나 자신도 스스로 조심했기 때문에 그동안 다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오래간만에 다친 거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상처가 사라질 줄이야. 통증도 없으니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고.

‘킬리안한테 물어봐야 하나?’

나는 무의식중에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다가 응? 하고 손바닥을 눈앞에 바짝 들이대 보았다. 거기서도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진 것이다.

최근 검을 잡아 까슬까슬 굳은살이 생겼었던 손바닥이 부드럽고 말랑거렸다. 손바닥이 다 터져서 연고를 덕지덕지 발랐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게 무슨…….

‘토벌 테라피?’

아냐,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어.

나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관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킬리안이 배정받은 손님방에 찾아가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 성내 식당에서 희미하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킬리안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나는, 순간 호기심이 일어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모두가 잠들었을 야밤중에 대체 무슨 일인 건지 살짝만 보고 올 생각이었다.

식당에 가까워질수록 소란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왁자지껄하게 변질되어 내 귀청을 때렸다. 나는 식당 문 안쪽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서 제가 마비 때문에 몸은 무슨 가위라도 눌린 양 꼼짝도 안 하지, 돌부리에 발이 걸려서 갑자기 막 이렇게 넘어지려고 하는데…….”

앗, 꽐라가 하나, 둘, 셋, 넷…….

뭐야, 다 같이 토벌 끝내고 회포라도 풀고 있었어? 너희 봉급도 못 받고 밀려 있다면서 술 마실 돈은 있니? 저번에 보니까 돌아가면서 영지 밖으로 잡일 같은 거 하러 가는 거 같던데, 그때 번 돈인 모양이구나.

나는 회식에 억지로 끌려가 2차 3차까지 달려야 했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그대로 백 스텝을 밟았다.

술자리를 조금도 즐기지 못하는 저 같은 아싸는 그냥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영애가 마치 구원자처럼 나타나서…… 오, 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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