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악녀 메이커 70화
그때, 기적의 시력을 가진 브라움이 나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나 삿대질했다.
나는 슬슬 뒷걸음질을 치던 동작 그대로 굳어져서 입꼬리를 파들거리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제 말할 때 나타난 호랑이가 된 기분은 썩 유쾌하지 못하다. 대체 왜 내 얘기를 무용담처럼 떠드는지 모르겠지만 민망하니까 그만둬.
크, 오늘 나 끝장나게 멋졌다, 멋이란 게 폭발했다, 하고 거울을 보며 스스로 감탄했던 몇 시간 전의 나까지 창피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그때, 전 느꼈습니다. 오…… 영애께서 마물을 평정하러 오셨다.”
아, 글쎄 그만두라니까.
“여기저기서 절 쓰러트렸던 나무줄기들이 날아오는데, 영애께서는 보지도 않고 기척만으로 휙휙 피하셨죠.”
……내가 언제?
“그때 영애께서 하신 말씀이, 어딜 보시는 거죠? 그건 제 잔상입니다.”
“그딴 말 한 기억 없어!”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던 내가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내부의 소음이 갑자기 뚝 하고 멎었다. 모두가 술에 취해 사리 분간을 못하는 얼굴로 내 쪽을 빤히 쳐다봤다.
“아,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그렇게 말해 보는 게 제 평생 꿈이었어요.”
브라움은 술기운에 반쯤 풀린 눈을 깜빡이다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대체 왜 저런 괴악한 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현실과 본인의 꿈과 망상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과연.”
그는 새빨개진 얼굴로 몇 번 딸꾹질하다가 정적을 깨고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영애께서 감히 범·접·할·수·없·는 존재라서 마물들이 공격은커녕 다가가지도 못한 건가?”
“…….”
“하긴, 미천한 마물이라고 해서 모를 리가 없지요. 위대하신 영애께서 검을 한 번 휘두르면 비구름이 몰려와 천둥 번개가 내리치고, 검을 두 번 휘두르면 지진이 일어나며 땅이 갈라지고…….”
누가 쟤 좀 기절시켜 줘.
이쯤 되면 날 놀리는 게 아닐까 싶을 때쯤, 꽐라들은 한술 더 떠 환호하고 짝짝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망할 10년 전 소설, 빌어먹을 10년 전의 나. 내가 아직 등장하지 않은 레녹스를 대신하여 활약했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기사들이 레녹스를 찬양했던 게 그대로 나에게 넘어온 듯했다.
이런 건 진짜 생각도 못했는데. 이게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이란 말인가. 은혜를 원수로 갚은 나쁜 브라움 같으니. 왠지 울고 싶어진 나는 그대로 등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비싈이 탕! 하고 기세 좋게 나무로 된 술잔을 내려놓더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날 향해 다가왔다.
뭐, 뭐야. 설마 때리려고?
쿵쿵 내리찍듯 다가오는 발걸음과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이 마치 한 대 치려고 오는 것 같지 않은가. 설마, 아까 내가 한마디 좀 했다고 이렇게 치졸하게 나오시겠다 이건가?
폭력을 쓴다면 그 즉시 폭력으로 맞대응하겠다. 그리고 공작 영애의 신분을 한껏 활용해서 더러운 권력의 쓴맛을 보여 주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비싈은 술기운 때문에 눈이 자꾸 감기는 탓인지, 두 눈을 기괴할 정도로 부릅뜬 채 점점 가까워졌다. 조금씩 다가올 때마다 얼마나 퍼마셨는지 지독한 술 냄새가 풀풀 풍겨 왔다.
“메르텐시아 영애……!!”
아이고, 귀청이야.
방심했다. 설마 고막 테러를 당할 줄 몰랐던 나는 뒤늦게 얼얼한 귀를 문지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음, 일단 때리려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비장해?’
나는 여전히 긴장을 놓지 않은 채 그를 미심쩍은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비싈은 2미터는 되어 보일 정도로 쓸데없이 키가 커서, 이렇게 코앞에서 마주 보고 있으니 고개를 한껏 치켜들어야만 했다.
“…….”
그런데, 뭘 이렇게 뜸 들여?
‘고개 아픈데 빨리 말하지.’
지금까지의 경험상 비싈이 내게 좋은 말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뚱한 표정을 한 채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런데 술 취한 와중에도 한참이나 말을 고르듯 망설이던 그가 뜻밖에 말을 꺼냈다.
“그간 소문만 믿고 멋대로 영애를 오해해서 죄송했다고, 꼭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어?”
지금 내게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어? 세계가 멸망해도 날 마녀라고 외치다가 죽을 것 같았던 비싈이?
내가 공기 중에 떠도는 술 냄새에 취하기라도 한 건 아닐 테고. 너무 당황스러워 표정 관리를 전혀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있는 비싈에게 내 표정 같은 게 눈에 들어올 리도 없겠지만.
“소문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저로선 알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지켜본 바로 영애께서 그런 사람이 아닐 것 같더군요. 하지만 저는 보이는 걸 보려고 하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믿었습니다.”
“…….”
“멋대로 판단해서 죄송합니다.”
비싈은 처음에는 아주 기세 좋게 말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목소리가 작아져 중얼거림에 가까워지다가 종내에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마물을 때려잡던 용맹함은 갑자기 어딜 갔는지.
음…….
나는 생각도 못한 낯선 상황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긴장한 듯 위아래로 움직이는 목울대와 그의 꽉 쥔 주먹에 차례로 눈길을 주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취중 진담인가.’
아일라로 지내 오면서 나를 악녀라고 매도한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으나, 그들 중 누구도 내게 이렇게 진지하게 사과를 한 적은 없었다.
사용인들은 죽을죄를 지었다, 살려 달라 열창이었고, 귀족들은 사과는커녕 언제 날 욕했느냐는 듯 안면 몰수하고 살가운 척 다가왔다.
비싈이 내게 사과하게 된다면 한참 지난 뒤에야 억지로 질질 끌려오듯 마지못해 ‘거, 미안하게 됐수다’ 하는 식으로 말할 줄 알았는데.
그가 이렇게 빨리 사과할 줄도 몰랐고, 이렇게까지 진심을 담아 사과할 줄도 몰랐다. 술기운에 용기를 낸 게 아니라 멀쩡한 정신일 때 정식으로 사과해 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긴 하네.
거 봐라, 꼴좋다, 하고 깔깔 웃어 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한 번쯤은 용서해 줄 수밖에 없겠는걸.
나는 결투라도 신청할 기세로 비싈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다음부턴 용서 안 해.”
그리고 꺾인 듯 들고 있어야 했던 고개가 너무 뻐근했기 때문에 말하던 도중 뒷목을 꾹꾹 주물렀다.
“목 아파 죽겠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줄게.’
“…….”
“……아.”
생각이랑 대사를 반대로 말했다.
나는 뻘쭘하게 뒷목을 주무르던 손을 내리며 내 말을 정정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런데,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내 대답만 기다리던 비싈이 갑자기 풀썩 주저앉아 무릎을 꿇는 게 더 빨랐다.
뚜둑―
나는 순식간에 밑으로 훅 꺼져 버린 그를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순간 그가 술을 너무 퍼마셔서 고주망태가 되어 다리에 힘이 풀린 건가 했다.
아저씨, 무릎에서 엄청난 소리가 났는데 괜찮아요? 뭔가 뚝 하는 소리 났는데, 설마 부러진 건 아니죠? 그를 부축해 줘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될 즈음에 비싈이 자신의 실책에 비통해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애의 눈높이를 맞추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그건 나도 잊고 있었는데. 그런데 영원히 잊어 주어도 될 것 같아.
그때, 뒤에서 내 영웅담을 읊고 있던 허언증 환자 브라움이 혀가 꼬인 발음으로 엄중하게 선포했다.
“꿇어라,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다.”
그러자 사람이 술을 먹는지, 술이 사람을 먹는지 모를 정도로 술을 퍼마시던 기사들이 ‘오오!’ 하는 의미 모를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러고는 너도나도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털썩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식당 입구에서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는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무릎을 꿇어 나와 눈높이를 맞춰 주고 있었다.
나는 브라움이 ‘영애를 위한 카펫’이라며 그의 붉은 망토를 벗어 바닥에 까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았다.
아. 루프고 나발이고, 샬럿이고 레녹스고 뭐고 이젠 진절머리가 난다. 이대로 수도로 올라가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미 비싈의 진심 어린 사과는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비싈은 그냥 나에게 똥을 준 거야. 새로운 엿을 먹이고 싶었던 거지.
‘진지하게 들은 내가 바보였다.’
나는 개가 된 기사들에게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토벌이 피곤하긴 했는지, 잠에 빠져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킬리안에게 무언가 물어보려고 했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서.
* * *
그날 이후, 나와 기사들의 사이는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전우와 다름없이 막역해졌다.
……라고 하고 싶지만, 처음 한동안은 전보다 더 데면데면했었다.
아찔한 눈높이 교육의 추억을 기억하는 기사들이 날 발견하면 부리나케 도주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10년 치 흑역사를 그날 한 번에 다 쌓은 듯한 브라움은, 토벌을 나설 때를 제외하곤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비싈은 브라움만큼 대놓고 날 피하진 않았지만, 내가 말을 걸 때마다 심하게 움찔거리며 눈을 피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기사들이 전보다 조금씩 더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이 소설에서 수치를 아는 인간은 굉장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나 혼자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그러고 보면 이 소설은 비중이 없는 엑스트라로 갈수록 정상인일 확률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비교적? 반면, 완전체인 베르너로 말할 것 같으면…… 굳이 알 필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나만 보면 죽고 싶다는 듯 우중충한 표정을 짓는 기사들이었으나, 날 대하는 태도가 전과는 확실하게 달라져 있었다.
물론, 내가 검을 휘두르면 천둥 번개가 치고 땅이 갈라진다는 브라움의 헛소리를 믿는 건 아니고, 기사들은 술에서 깨어나 제정신일 때 비싈과 브라움을 통해 내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들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내 사기 수준의 능력을 전해 듣고, 내가 방해는커녕 엄청난 전력이 될 거라고 판단을 내린 듯했다.
나는 그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증거로, 그 다음 날 즉시 토벌대의 작전 회의에 초대를 받았다. 작전 회의는커녕 안전한 곳에서 꼼짝도 못하게 했던 처음과는 아주 상반된 대우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어진 마물 토벌에서 내가 직접 활약하는 모습을 보게 된 뒤로는 내 실력에 의심을 품는 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말이 진짜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