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악녀 메이커 71화
“봤어? 영애가 주변에 있으면 마물들이 고장 나 버리는 거? 그 상대하기 번거로운 골렘도 영애 앞에서는 막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허공에 공격하고 그랬잖아. 말이 돼?”
“브라움 경한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꿈이라도 꿨냐고 엄청나게 비웃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며 기사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골렘이 그냥 허공만 때린 건 아니야. 영애가 제대로 맞기도 했잖아.”
“그리고 영애는 ‘음? 무슨 솜방망이가 때렸나?’ 하는 표정으로 골렘을 돌아보았지. 크, 내가 돈만 있었어도 그걸 영상석으로 찍어 뒀을 텐데.”
그리고 그 뒤로 기사들은 하나같이 나를 경이로운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전긍긍 고전하던 마물들이 내게 영향 자체를 끼치지 못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영애에게 마물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어떤 마물을 만나도 안심할 수 있겠네요.”
내게 위험이 닥칠 일이 없겠다는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면서 답했다.
“나보다는 너희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혹시 위험에 처하면 비명을 지르도록 해. 가능한 한 빨리 달려갈 테니까.”
“하하, 알겠습니다.”
이제는 서로 이런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단 말씀.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농담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되었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 싶어지기만 하면 기사들은 ‘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으니까. 그동안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은 것 보면, 내가 도움되긴 엄청나게 되는 모양이었다. 나도 검술을 연습하는 데 많은 경험이 되었으니까 기꺼이 달려가 도움을 주고는 했고.
그 뒤로도 몇 번의 토벌이 더 진행되었다. 기사들은 완전히 나를 신뢰하게 되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상당히 의지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나를 데리고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빈번하게 토벌에 나섰다.
카젠 영지에 온 이후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해서 그런가? 이런 빠듯한 일정에도 나름 버틸 만했다. 예전 같았으면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어서 침대 위에서 골골거리며 죽어 갔을 텐데.
실전 경험이라는 게 확실히 뭔가 다르긴 다른가 보다. 부딪히면서 배우니까 검술 실력도 힘과 체력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일취월장했다.
비싈도 그런 내게 감탄했다.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것밖에 못하시더니, 고작 보름 새 동선이 짧은 검술도 구사하실 수 있게 되신 겁니까? 검의 무게 중심도 정확히 이용하실 줄 알게 되셨네요?”
다시 보니 감탄이라기보단 경악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연무장에서 킬리안이 시키는 대로 검 손잡이를 눈높이에 두고 수직으로 내려 베는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처음엔 막상 눈앞에 닥치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직접 연습해 보니까 감을 잡겠더라고.”
“……마물은 연습용이 아닐 텐데.”
하지만 제게는 훌륭한 검술 훈련 공급원이죠. 왠지 아연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비싈의 말 상대가 되어 주는 동안, 킬리안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그러자, 뒤편에서 대련하던 기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새 자세가 깔끔하게 자리 잡혔는데? 겉모습만 보면 그럴듯해.”
“검술의 천재인가?”
“아니, 저 정도면 거의 괴물…….”
내가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수군거리던 세 기사가 움찔하며 날 모르는 척 외면했다.
그때, 킬리안이 언제 준비해 뒀는지 모를 수통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원래 습득이 빠르십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시죠.”
그러곤 남들 앞에서 팔불출 같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 아닌가. 객관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왠지 민망해져,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수통의 물을 들이켰다.
“원래부터 그랬다는 것 정도로 납득할 수 있는 겁니까? 지금도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니신데, 숨소리도 고르고.”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아가씨께서 훈련을 시작한 지 서너 시간 만에 지치실 이유라도 있어야 하는지.”
“…….”
그러고 보니 킬리안도 보통 인간은 아니었지.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체로 천재는 범인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가르치는 것에 재능이 없기 마련이고. 저절로 깨우치는 걸 왜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다행히 킬리안은 가르치는 데 재능이 넘쳐 났지만, 현재 그의 유일한 학생이 나였기 때문에 평범함의 기준이 남다르게 잡힌 모양이었다.
‘저 말을 3층만 계단을 올라도 사후 세계를 넘나들었던 윤하늘에게 했으면 아마 울었을 텐데.’
어딘지 핀트가 엇나간 그의 답변에 비싈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더 할 말이 있으십니까?”
“할 말은 넘치게 많습니다만…….”
“저런, 상당히 지치셨나 봅니다. 몰골이 안쓰러우시군요. 심신 안정을 위해 저쪽에서 쉬고 계심이 어떤지.”
“그 정도는 아닌데요!”
“정확히 말해 몰골이 아가씨의 정신 건강에 해로우니 부디 물러나 주셨으면 합니다, 비실 경.”
“…….”
말투만 정중한 척했지 폭언이 따로 없었다. 싸우지 않았음에도 전력을 상실한 비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터덜터덜 멀어져 갔다. 나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요 며칠 동안 지켜본 바, 아일라는 몸을 쓰는 것에 재능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괴물 수준인 것 같았다. 체력도 힘도 검술도 보통 이렇게까지 확확 늘진 않지.
나는 말없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검을 다뤘는데도 여전히 손바닥에는 굳은살 하나 박여 있지 않았다. 물 한 번 묻혀 보지 않은 것처럼 섬섬옥수가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굳은살이 다시 생기지도 않고……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네.’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지난 마물 토벌 때 풀숲을 지나다가 풀잎에 베였던 곳을 살펴보았다.
저번처럼 흉터는커녕 조금의 흔적도 없었다. 주술이나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건 내 영혼이 이 세계에 속하지 않으니까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육체는 이 세계에 속하는데 그 이유 때문일 수가 있나?
“왜 팔뚝을 들여다보십니까?”
그때, 불쑥 다가온 킬리안이 나를 향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 깜짝이야. 기척 좀, 제발.
나는 화들짝 놀라 퍼드덕 떨었다가 들춰 보던 옷자락을 얌전히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살이 잘 안 타서?”
그런데 나도 모르게 다른 말로 둘러대고 말았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지라, 대체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말해 놓고 엥? 하는 사이에 킬리안은 별 의심 없이 대답했다.
“흠, 살이 잘 안 타는 체질이 있죠. 저 같은 경우도 일단은 그렇고.”
아직 내 몸에 난 상처가 알아서 낫는다는 걸 따로 킬리안에게 말하지 않았다. 첫 토벌을 나갔던 그날, 술 취한 기사들 때문에 어영부영 넘어간 이후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킬리안이 틈만 나면 날 곰 인형처럼 껴안기는 했지만 내 손을 잡은 적은 거의 드물었기에 굳은살의 유무까지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어째 숨기는 것처럼 되어 버렸네.’
지금이라도 말할까? 나는 잠시 고민해 봤지만, 이번에는 선뜻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보통 이런 치유는…….
‘신성력과 관련 있지 않나?’
일반적으로 판타지 소설 같은 곳에서 치료는 신관들이 했다. 물론 이 세계는 치료 마법도, 포션도 있고, 주술에도 치료에 관련된 뭔가가 있는 모양이니 단언할 순 없지만.
만약 이게 신성력으로 인한 거라면 루프로 인해 간접적으로 신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별것도 아닌데. 이미 그가 알고 있을 수도 있고, 딱히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 하지만…….’
킬리안에게 있어서 레제르브와 관련된 모든 것은 딱 두 가지 중 하나였다.
경멸하거나, 이용하거나.
‘……난 말할 것도 없이 후자지.’
날이 갈수록 킬리안에게 신에 관한 얘기를 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만약 그가 이 사실을 알면 나를 더욱 이용하기 좋은 패로 생각할 것 같아서. 애초에 그에게 난 원한을 갚기 위한 도구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신의 사랑을 받는 자리를 빼앗아 오려고 하면서도 신과 엮이고 싶지 않다니, 참으로 모순된 감정이다. 이래서 깊게 엮이고 싶지 않았던 건데.
“아가씨?”
킬리안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나 그를 돌아보았다. 눈치가 빠른 그는 벌써 가늘게 뜬 눈으로 날 가늠하듯 응시하고 있었다.
“고민이 있으시군요.”
의문이 아니라 이미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고민 같은 거 없다고 하면 씨알도 안 먹히겠지. 내가 둘러댈 말을 고민하는 사이, 킬리안은 드물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예전엔 표정만 봐도 빤히 생각이 보이셨는데, 이젠 거짓말에 제법 능숙해지셨습니다.”
거짓말이라는 것까진 눈치챘지만, 그게 뭔지까지는 알지 못한 모양이다.
이미 거짓말이라는 걸 들통 난 시점에서 능숙해졌다고는 안 하지 않나. 하지만 상대가 킬리안이라면 들키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기도.
킬리안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기사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작게 중얼거리며 덧붙여 말했다.
“이럴 땐 능력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군.”
능력이 통했다면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면서.
아니, 그랬다면 애초에 첫 만남에서 그에게 죽임을 당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어떻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주술사인 그의 살갗만 닿아도 죽었을 텐데.
그러니 내 곁에 남아 있겠지. 희소가치가 있고, 이용하기 좋은 위치의.
나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가로 베는 건 로튼 트리로 연습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힘들어. 그리고 마물은 내게 반격을 못하니까 상대적으로 방어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고. 그 부분을 좀 도와줬으면 해.”
이게 내 고민이라는 대답에 킬리안은 역시 조금도 믿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별달리 반박할 말도 없었는지, 그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묵묵히 내 훈련을 도와주었다.
* * *
내가 아무런 목적 없이 마물 토벌을 다니는 건 물론 아니었다.
샬럿과 레녹스가 나타나는 정확한 시기를 알기 위해서는 자주 발크 산맥으로 나가는 게 좋으니까, 정찰도 할 겸 겸사겸사 마물도 토벌하러 다녔다.
그렇게 내가 카젠 영지에 머물기 시작한 지 보름하고도 5일이 더 지난 시점이었다. 아침 수련을 하러 킬리안과 함께 복도를 지나가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내게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들이 내게 외쳤다.
“영애, 마물 학살하러 갑시다!”
그들은 나에게만 마물 ‘토벌’이 아니라 ‘학살’이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그 이유가 내 앞에선 한없이 무력해지는 마물들을 죽이는 내 모습이 마치 학살하는 것 같기 때문이란다.
더 나아가 ‘마물 연쇄 학살범’이라고 장난치며 수군댈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건 좀 너무한 것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