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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72화 (72/131)

# 72

악녀 메이커 72화

“어디로 가는데?”

“이번에는 멀리까지 가 볼 예정인데, 아마 하루 정돈 야영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안 됩니다.”

응?

나는 내가 대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옆에서 멋대로 칼같이 거절해 버린 킬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탄식이 나올 정도로 경이로운 미소를 뽐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의 정말 즐거울 때의 미소와 꾸며 내는 가면 같은 미소, 그리고 위협하는 맹수 같은 미소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저건, 공포의 미소였다.

‘제대로 빡친 표정인데…….’

그가 사람을 가지고 놀듯 궁지에 몰아넣으며 마왕 포스를 풍길 때보다 훨씬 무서웠다.

나는 기사들 쪽을 돌아보며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안 된대.”

그러자 킬리안이 참 잘했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평소에 내게 방향을 제시해 주거나 방법만 알려 줄 뿐 내 일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끼어들었다는 건 왠지 안 좋은 징조 같으니, 웬만하면 넙죽 엎드리는 편이 좋겠지.

‘그러고 보니, 내가 마물 토벌을 갈 때마다 뭔가 분위기가 싸했지.’

킬리안도 처음 몇 번은 묵묵히 응원했는데, 토벌이 너무 잦아지자 왠지 탐탁지 않아 하는 듯했다. 어딘가 불만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사들을 보며 굉장히 미덥지 못하다는 눈빛을 보내기도 하고.

내 대답에 기사들은 조금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모시는 아가씨의 대답을 맘대로 가로채는 집사라니, 게다가 애 다루듯 함부로 머리를 쓰다듬다니, 이런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들이 미심쩍은 투로 물었다.

“영애의 집사분 아니십니까?”

“정확하게는 개인 집사 겸 가정 교사이지요. 아가씨의 모든 시간은 제가 관리하고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 그러시군요.”

그렇다는데 딱히 할 말이 있을 리가.

하지만 기사들은 토벌대에서 나를 빠트린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한차례 주춤하며 서로 우왕좌왕하던 그들 중 한 명이,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영애의 의사를 존중해 주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아무리 집사님이셔도 모든 결정은 영애께서 내리셔야지요.”

“제 모습 어디가 아가씨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걸로 보이셨는지?”

“대답을 먼저 가로채셨잖습니까.”

“결론적으로 분명 아가씨의 입으로 직접 대답을 들으셨을 텐데요.”

“그게 존중입니까? 협박이지.”

‘오오…….’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그 말을 뱉은 기사, 브라움을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킬리안의 앞에서, 그것도 그가 최고로 심기 불편해 보일 때 대들 수 있다니 다시 봤다. 생각보다 패기가 넘치는 아이구나?

그런데 그거 아니, 브라움?

‘……너 이제 죽을 것 같아.’

나는 킬리안이 말없이 끼고 있던 장갑의 손가락 끝 부분을 입술로 물고 부드럽게 당겨 벗겨 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괜히 코 밑이 시큰거릴 정도로 치명적이게 야했다…… 가 아니라, 곧 브라움의 명이 다할 것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위협하면 제가 겁먹을 것 같습니까? 할 말을 했을 뿐인데요. 마음대로 집사님의 사적인 의견을 강요하실 권리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 브라움아. 너 왜 그러니.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니? 다시 보니 패기가 넘치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만용을 부리는 거였잖아.

그날 브라움이 고주망태가 되어 내 무용담 늘어놨을 때 진작 알아보긴 했지만, 그는 마치 나를 구원자처럼 우상시하며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장에서 킬리안이 날 멋대로 하려 드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겁도 없이 일단 이부터 드러내고 본 거겠지.

왠지, 어디선가 강아지가 깽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킬리안은 브라움의 황갈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고 빙긋 웃었다.

“저희 아가씨를 멋대로 이용하려고 드는 잣대를 더는 용서해 드릴 수가 없군요. 누가 누굴 나무라는 건지.”

“이, 이용이라니!”

“틀렸습니까? 아가씨의 수련을 위해 가만히 두었더니 도움은커녕 아가씨께 의지하려고 들고, 기어오르고, 빌빌거리고, 징징거리고, 차라리 이보단 사냥개가 쓸모가 있겠군요.”

잠깐, 가만히 들어 보니 그런 말을 하는 킬리안이야말로 기사들을 내 수련에 이용하고 있었다는 말이잖아. 하지만 브라움은 킬리안의 첫마디부터 충격을 받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그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영애께서도 마물을 토벌하길 원하시니까 카젠에 남아 계시는 것 아닙니까! 이용이 아닌 상부상조지요!”

“그렇다고 당신들과 함께할 이유는 없습니다. 제가 아가씨의 곁에 있는 게 훨씬 도움 될 테니까요. 교육상 아무런 가치 없는 것에 시간 낭비를 강요하지 마시지요. 아가씨의 시간은 당신들과 달리 찰나가 황금과도 같습니다.”

아, 아니. 그 정도까지 귀하진 않은 것 같은데. 나도 샬럿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실력 키울 겸 하는 거니까 딱히 상관없기도 하고.

브라움은 반박하고 싶은데 말문이 막혔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런데, 애초에 왜 화가 난 거지?’

나는 킬리안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왜 능력이나 주술을 쓰지 않고 굳이 제정신일 때 막말을 쏘아붙인 걸까. 평소엔 상대하기 귀찮아서라도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힘으로 눌러 버리거나, 툭 하고 건드려서 불행해지게 하거나 했을 텐데 말이다.

물론 기사들이 내게 많이 의지한 건 사실이지만 그들에게 이용당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시키거나 강요한 적도, 그럴 배짱도 없는 사람들이고.

‘써 봤더니 개똥만큼의 이용 가치도 없으니까 버리겠다는 건가? 아니면 가치야 있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단물 다 빠졌으니 뱉겠다는 건가…….’

하긴 킬리안은 처음 내 교육을 담당하던 시절부터 사람의 이용 가치를 보라고 했었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언젠가 닥쳐올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우울해져 입술을 깨물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말했다.

“갈게요, 토벌.”

그 말에 두 남자의 반응이 엇갈렸다.

브라움의 얼굴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활짝 피어났고, 반대로 킬리안은 굉장히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킬리안은 바로 옆에 서 있는 내게만 겨우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핵부터 처분할걸 그랬습니다.”

물론,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벌써 핵을 없애면 마물이 이 숲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고, 그러면 샬럿이 습격을 받아 조난을 당할 일도 없잖아.

잘은 모르겠지만 킬리안은 내가 기사들과 함께 마물을 토벌하러 가는 게 그렇게까지 싫은 모양이다.

* * *

“영애! 아무래도 이쪽으로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던가.

야영까지 준비하고 토벌길에 오른 나는,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황실 기사로 보이는 이들을 발견했다는 소식이었다. 분명 레녹스와 함께 샬럿을 호위하던 기사들이겠지. 제국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황금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으니까 확실했다.

가장 먼저 황실 기사단을 발견한 기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상태들이 말이 아닙니다.”

응? 어째서?

그 말을 의아하게 여기며 기사가 안내하는 대로 킬리안과 함께 그를 따라갔다.

‘……!’

그런데, 도착해 보니 정말 그의 말대로 황실 기사들이 패잔병처럼 이곳저곳에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나는 놀라 숨을 삼키며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황실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카젠 기사단원들에게 간단한 응급 처치를 받고 있었는데, 많이 다치긴 했어도 다행히 사망자는 없는 듯했다.

‘이상하네. 분명 소설에서는 ‘다들 다친 곳 없이 무리에서 떨어진 샬럿과 레녹스를 찾아다닌다’고 적었는데.’

설마, 마물들이 소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서 그것 때문에 영향을 받은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명색이 황실 직속 기사단인데 이렇게 맥없이 당하다니……. 그렇다면 황실 기사들처럼 샬럿과 레녹스 또한 소설과 다른 상황에 부닥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설마, 마물들한테 둘러싸여 벌써 죽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게 됐다면 루프를 반복할 정도로 샬럿 위주로 돌아가는 이 세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여유로웠던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나는, 빠르게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중에서 상태가 가장 멀쩡해 보이는 기사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황실 기사단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군요. 도대체 경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기사는 내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잠시 ‘누구?’ 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순식간에 내 정체를 파악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났을 때 으레 보일 법한 경악이었다.

“설마, 메르텐시아 영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자세한 설명을 할 여유가 없어 보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발크 산맥까지 오신 거죠?”

“……아. 일단 저는 황실 제2기사단 단원 제이콥 안젤로스라고 합니다.”

제2기사단?

당연히 레녹스가 이끄는 황실 직속 기사단인 제1기사단이 올 줄 알았던 나는, 잠시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저희 제2기사단은 제1기사단 단장님이신 레녹스 경과 함께 안젤로 영애를 호위하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산맥을 지나는 중, 갑자기 수없이 많은 마물들이 순식간에 마차를 덮치는 바람에…….”

제이콥은 흙빛이 된 얼굴로 아주 심란한 듯 얘기하고 있었으나, 사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 반쯤 듣고 흘려버렸다. 중요한 건 그들이 ‘제2기사단’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설과 다르게 맥없이 당한 거였구나. 제1기사단은 제국의 최정예 기사단이니까.’

사실 소설을 다 떠나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황궁을 지켜야 하는 제1기사단이 고작 샬럿을 호위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사이에 갑자기 반란이 일어나거나 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그런데 소설에서는 그 미친 짓을 황태자 베르너가 해낸다. 그만큼 그가 샬럿에게 미쳐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설과 달리 베르너가 샬럿의 호위로 레녹스와 제2기사단을 보냈다니. 물론 이것 또한 만만찮게 미친 짓이기는 했지만, 소설의 내용보다는 양호하다고 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가, 일단 이 일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제이콥에게 물었다.

“그럼, 안젤로 영애와 레녹스 경은요? 왜 두 분께선 안 보이시죠?”

내 물음에 그는 잠시 비통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푹 숙이면서 대답했다.

“분명 두 분 다 무사하실 겁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레녹스 경께서 샬럿 영애를 지켜 주고 계셨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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