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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73화 (73/131)

# 73

악녀 메이커 73화

레녹스는 제국 최고의 실력자이자 최연소 그랜드 소드 마스터였다. 제이콥은 그런 레녹스 경이 설마 고작 마물들에게 당할 리가 있겠느냐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레녹스의 몸 상태가 보통 이상인 경우였으면 당했을 리가 없겠지.

하지만 절벽에서 떨어진 뒤 온몸의 뼈가 박살 나고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갑자기 수많은 마물이 덮치면 그가 감당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카젠 기사단원들이 내게 주목하도록 짝짝 손뼉을 쳤다.

“아무래도 한시가 급한 긴급 상황인 듯하니 오늘의 토벌 일정은 취소하는 게 좋겠어. 이의 있나?”

“없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사들이 동시에 우렁차게 대답했다. 딱히 군기를 잡은 적도 없는데, 나와 마물 토벌을 나선 이후로 꼭 저러더라.

“그럼, 일단 두 개의 조로 나뉘어 한 조는 제2기사단 기사분들을 영지로 모시고, 나머지는 조난당한 안젤로 영애와 레녹스 경을 찾자.”

그렇게 명령한 뒤, 이어서 말했다.

“비싈 경! 경이 조를 나누도록.”

“예, 알겠습니다!”

비싈은 반사적으로 재깍 대답하고는 뭔가 이상했는지 멈칫했다. 그러곤 ‘이름 제대로 부를 수 있잖습니까!’ 하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그럼 그동안 내가 정말 발음을 못해서 비실 경이라고 부르는 줄 알았니. 당연히 고의지. 지금 한 번만 다른 기사단 앞이니까 체면 차려 준 거고.

“나는 수색대를 지휘하지.”

“……예.”

내가 그의 강렬하고도 억울한 눈빛을 간단히 무시하자, 비싈은 다시 터덜터덜 조를 꾸리러 갔다. 그리고 괜히 기사단원들에게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하느냐고 화풀이했다.

황실 제2기사단들은 나와 카젠 기사단을 번갈아 보며 별 희한한 광경을 다 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기사단장이라도 되는 양, 심지어 기사단장까지 지휘하는 것이 이상해 보인 모양이다.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 혼란스럽겠지. 나는 그들의 시선을 자연스레 받아넘긴 뒤, 제이콥을 돌아보며 물었다.

“안젤로 영애와 레녹스 경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어느 부근이었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상관없었으나 남들이 보기엔 이상해 보일 것이다. 나는 제이콥이 성심성의껏 알려 주는 위치를 듣는 척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제2기사단원들은 대체 왜 저 마녀가 눈엣가시일 게 분명한 안젤로 영애를 구출하는 데 저렇게 열의를 표하는 건지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하나같이 날 보는 표정들이 탐탁지 않아 하고 미심쩍어 하고 그랬다.

“믿어도 되는 겁니까?”

그때, 그렇게 생각만 할 뿐 서로의 눈치만 삼키는 황실 기사단 중, 직접 총대를 메고 직접 내게 물어보는 기사가 있었다. 화법이 얼마나 직설적인지, 나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 대놓고 묻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젤로 영애를 안젤로 영지까지 무사히 모셔다 드려야 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부디 제게 신뢰를 주십시오.”

내게 말을 건 황실 기사는 나무에 기대앉아 겨우 몸을 지탱한 채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리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가 있었는데 출혈이 심해 보였다.

그런데 하는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 웃기는 말이었다.

이미 마물들한테 당해 샬럿을 잃어버린 시점에서 임무는 실패한 거 아니냐? 이미 본인이 실패한 주제에 왜 내게는 갖은 생색을 다 내고 있는 거지?

내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그 말을 들은 카젠 기사들은 본인들이 더 울컥해서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그런데 황실 기사단들보다 더 심한 오해를 했던 너희가 보일 반응은 아닌 것 같은데. 태세 전환 봐라.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믿어 달라 하면 믿어 주실 겁니까?”

“…….”

그러자 황실 기사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면, 제 대신 수색대를 이끌고 움직일 기력이라도 있으십니까.”

“…….”

“당장 물에 빠져 구해 드렸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 하시는군요. 제게 바라시는 것도 참 많으십니다.”

“……죄송합니다, 영애.”

그는 그제야 본인이 참 염치없었단 것을 자각한 모양인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짧게 피식 웃은 뒤, 그에게 사과는 됐다는 듯 대충 손을 휘저어 보였다.

“기사님께서 잡을 지푸라기가 하나밖에 없다면, 부디 그게 썩지 않았기를 초조해하면서 기도하십시오.”

“예? 그게 무슨……!”

나는 샬럿을 구해서 돌아올 건지, 아니면 찾아가서 그녀에게 해를 끼칠 건지 일부러 말하지 않은 채 그대로 기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뒤에서 그가 간절하게 ‘메르텐시아 영애!’ 하고 불렀으나, 나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러자 악에 받친 고함이 들린 것도 같았지만 그 또한 못 들은 척했다.

그렇게 급조된 수색대가 꾸려졌다.

기사들은 전원 열 명, 그리고 공작 영애인 나와 집사 킬리안, 이렇게 셋이었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어딘지 특이한 구성원이기는 했다.

나는 일단 곧바로 제이콥이 알려 준 위치로 찾아가 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한차례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일단 여기서 흩어져서 살펴보자.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뭐 하나라도 단서 같은 게 있으면 말해 주고.”

“예!”

나는 능숙하게 서로끼리 구역을 정하고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는 기사들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기사들을 자연스럽게 절벽 밑으로 향하게끔 할 수 있으려나. 일단 샬럿과 레녹스의 흔적을 하나라도 찾게 된다면 대충 끼워 맞추기 식으로 사기를 쳐서…….

“영애!”

그런데 그때, 뒤쪽에서 불쑥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언제나 혈기 왕성하고 의욕 넘치는 브라움이 손을 흔들며 나를 향해 빠르게 뛰어오고 있었다.

“제가 곁에서 보조하겠습니다!”

뭐, 그러든가. 어차피 누구랑 있든 절벽 밑을 뒤져 보면 될 테니, 날 보조하게 될 기사의 수색 실력 같은 건 아무래도 딱히 상관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서 낮고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킬리안이었다.

“보태어 도움이 된다는 게 보조의 뜻이라는 건 알고 말하는 건지.”

“그럼 설마 제가 단어의 뜻도 모르고 말을 했겠습니까? 저는 당연히 영애께 도움이 되어 드릴 겁니다!”

“스스로 짐이라는 자각이 없다니.”

“누가 짐이라는 겁니까, 누가! 그러는 집사님은 뭐……! 뭐, 뭐…….”

뭐……. 에서 멈춰 버린 그는 끝까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브라움은 필사적으로 킬리안을 힐끗대며 머리를 굴리는 듯했지만, 만능 집사에게 잡을 수 있는 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외견도, 힘도, 능력도, 말솜씨도.

“저런.”

딱하다는 듯한 킬리안의 한마디에 브라움은 또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뭔가 반박하고 싶은데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나를 거들어 주는 건 킬리안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인 건지.

‘그보다, 왜 또 싸우는 거지.’

애초에 상대도 되지 않는 의미 없는 싸움이기는 했지만, 킬리안이 브라움을 상대해 준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가만히 있기 심심했나?

킬리안은 흠, 하고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더니 마치 품평하듯이 브라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자 분노로 길길이 날뛰던 브라움도 왠지 모를 오한이 느껴졌는지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며 온몸을 굳혔다.

킬리안의 은회색의 시선이 그의 주근깨 박힌 앳된 얼굴을 가볍게 스쳤다가.

“어디 한 군데쯤은.”

곰같이 커다란 덩치를 스쳤다가.

“쓸모 있는 구석이.”

옆구리에 쥐고 있는 검에 닿았다.

“있으면 좋으련만.”

“…….”

“안타깝군요.”

아무래도 어디로 보나 영 글러 먹었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나는 킬리안이 그 특유의 우아한 발음으로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어 낼 때마다 괜히 내 바지를 꾹 움켜쥐었다.

나한테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를 철저하게 짓밟는 저 말들이 언젠가 날 향하게 될 것만 같아서 태연하게 듣고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놈의 쓸모, 쓸모.’

쓸모가 없으면 버릴 건가?

내가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돌변했던 그의 태도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때만 해도 일단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그라도 날 도와줘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 목표를 달성하면 이제 내 이용 가치는 거기서 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아니, 거기서 끝이어야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나는.

당연히 내가 작가라는 정체를 들키기 전에 그에게 버림받고 헤어져야 서로 감정 상할 일 없이, 몸 성하고 깔끔하게 영원히 안녕할 수 있겠지.

그래, 빨리 이 모든 걸 끝내고 신에게 사랑받는 위치를 빼앗아 오자.

그러면 킬리안은 나에 대한 흥미도 관심도 떨어질 것이고, 나는 작가라는 사실을 들킬까 봐 매일같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게 최선이야.’

최대한 내가 다치지 않을 방법.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킬리안은 브라움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능력을 쓰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무언가를 읽어 내려는 듯한…….

“아니면.”

그리고 동시에 킬리안은 그가 찾던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고 달빛 같은 눈동자에서 살벌한 이채가 어렸다. 제 입술을 훑던 손가락이 그대로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주제 모르는 눈을 할 만큼의 가치를, 제게 증명해 보이시겠습니까?”

킬리안은 낮고 음산하게 속삭였다.

새하얀 이가 조금씩 그의 살갗을 파고들자 핏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킬리안의 옷자락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그러자 그의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

끼어들 생각까진 없었는데, 아무래도 그가 주술을 쓰려고 하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멈추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여기에 우리 셋 빼곤 없다지만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주술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들키면 어쩌려고.’

나는 종교 재판에 끌려갈 일 있느냐고 킬리안에게 눈빛을 주었다.

하지만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가 주술을 쓰려고 해서 막은 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 깨달았다.

킬리안의 ‘주제를 모르는 눈’이라는 말에 괜히 제 발이 저린 것이다. 브라움에게 지나치게 이입해 버린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변호했다.

“그리고 난 브라움 경이 쓸모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리고 이건 킬리안이 예절 교육을 해 주던 당시, 내게 해 준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인간이라고 해도 개똥이 약에 쓰이는 일도 있듯 주의 깊게 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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