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악녀 메이커 74화
“영애…….”
내 말에 브라움이 작게 중얼거리며 내게 감동으로 일렁거리는 눈빛을 보냈다.
사실 겉으로는 브라움을 감싼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상 나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려고 발악한 것과 다름없는데. 괜히 양심이 찔린 나는 브라움의 시선을 스리슬쩍 피해 버렸다.
“쓸모라……. 확실히.”
그러자 킬리안은 언제 살벌한 기운을 뿜었느냐는 듯 순식간에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와 턱을 쓸며 진지하게 대꾸했다.
“미끼로라면 쓸모 있겠군요.”
“…….”
“예전에 한 번 가르쳐 드린 내용을 여태 기억하고 계셨다니 역시 아가씨이십니다. 한낱 미생물도 어딘가에는 분명 쓰임새가 있을 텐데 제가 그만 간과하고 있었군요.”
“미, 미끼, 미끼라니…….”
그러자 수색하는 동안만이라도 내 최측근, 보좌관 자리를 꿈꾼 듯한 브라움이 충격에 빠져 계속 미끼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저도 분명 뭔가 더 그럴듯한 쓸모가…….”
“쓸모가?”
“…….”
그는 기사단 내에서 가장 어린 만큼 실전 경험도 적고, 어리바리한 실수도 가장 자주 저지르고, 내게 목숨을 빚진 횟수도 가장 많았다. 아무래도 미끼라는 말을 본인 스스로 반박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불행히도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당신은 스스로 걸림돌이 되어 마물을 끌어 모으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습니다.”
킬리안은 이제야 알아차리게 되어 정말 유감이라는 듯이 말했다.
어그로가 재능이라니. 대체 이 무슨 상냥하고 치명적인 독설이란 말인가. 심신을 난도질하는 독사 같은 혀가 아닐 수 없었다.
‘부, 불쌍해.’
브라움은 내 어설픈 변호로 더 너무한 취급을 받아 버리고 말았다.
킬리안은 까맣게 죽어 버린 눈빛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브라움에게 말했다. 쓸데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말투였다.
“아가씨께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보조가 필요하게 되었으니 좀 더 기뻐하십시오.”
“……그게 뭡니까?”
“아가씨의 10미터 밖에서 더 접근하지 마시고 어슬렁거리시면 됩니다. 훌륭한 미끼가 되어 주십시오.”
“…….”
그렇게 브라움은 미끼가 되기 위해 떠나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이 덩치에 걸맞지 않게 축 늘어져 있었다. 왠지 팔뚝으로 눈을 문대는 듯한데,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날 우상처럼 떠받들고 막 대단하다고 따라다니는데, 그런 그가 대체로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저런 취급을 받으면 안쓰러워지기 마련이었다.
아냐, 지금은 네가 아직 어려서 그렇지 좀 더 훈련하고 실력을 쌓으면 언젠가 출중한 실력을 갖추게 되지 않겠니. 일단 기사 작위를 받고 기사단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거니까.
측은함이 절로 일어나는 그의 뒷모습을 계속 눈으로 좇고 있을 때, 갑자기 무언가가 불쑥 내 눈앞에 내밀어 졌다. 순식간에 시야가 가렸다.
“응?”
킬리안의 손이었다.
“뭐예요?”
나는 새하얀 장갑이 씌워져 있는 그의 커다란 손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킬리안은 브라움을 농락할 때와는 전혀 다른 묘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감정을 감추고 표정을 꾸미는 데 능한 그의 보기 드문 민낯이었다.
“왜요?”
대답이 없기에 두 번 물었다.
그는 나를 뚫어질 것처럼 가만히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본인과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귀여운 동작을 하는데도, 일단 겉모습이 겉모습인지라 뭘 하든 지독하게 어울린다는 게 함정이다.
‘저 표정, 어디서 봤는데.’
내가 눈 사이를 좁히며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가고 있을 때 문득 떠올릴 수 있었다.
내 동생들, 그러니까 윤하늘의 동생들이 어렸을 때 저런 표정을 지으면서 왜? 왜? 하고 묻고는 했다.
‘왜’의 굴레. 왜비우스의 띠.
왜 물고기는 물고기야? 왜 하늘은 파래? 왜 달이 날 따라와? 왜? 왜? 수도 없이 왜? 만 연발하던 서너 살 시절의 동생들의 표정과 왜 킬리안의 표정이 겹쳐 보이는 거란 말인가.
“왜…….”
심지어 직접 입 밖으로 뱉었다.
그는 호기심이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나는 아이의 얼굴을 하다가, 동시에 혼란스러운 어른의 얼굴을 했다.
“손.”
“손?”
“손 줘 봐.”
갑자기 손을 줘 보라니.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딱히 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에게 선뜻 손을 내미려고 했다.
‘아!’
하지만 갑자기 퍼뜩 생각났다.
내 손은 알 수 없는 치유의 능력으로 굳은살이 다 사라진 상태여서 킬리안이 보면 바로 눈치채게 될 거란 걸.
물론, 지금 숨겨도 같이 지내다 보면 어차피 조만간 들키게 될 테니 그냥 이대로 손을 내밀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움찔 떨며 등 뒤로 숨겼다.
왜 내 몸은 항상 킬리안 앞에서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걸까. 아무리 올바른 판단을 내리면 뭘 한단 말인가, 몸이 뇌의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움직이는데.
“아일라?”
‘왜?’ 하는 표정에서 벗어난 킬리안이 다정하게 웃으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손을 잡으라는 듯이.
언젠가 내 이름을 부르는 그 한마디에 정신없이 넘어갔던 그날처럼.
순간 이번에도 사정없이 휘둘릴 뻔했지만, 나는 꼭 주먹 쥔 손을 가슴 위에 얹으면서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그의 거부하기 힘든 미소에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저, 음…… 저만 놀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저도 주변 좀 둘러보고 올게요. 그, 금방 올게요!”
금방 온다는 말은 곧 돌아올 테니 따라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숨은 뜻을 알아들은 킬리안이 단박에 얼굴을 구겼다.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마음에 안 드는군.”
등을 돌리자 그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를 바람결에 흘려보냈다.
요즘 따라 뭐가 이렇게 마음에 안 들고 심지어 마음대로 되지도 않으며 신경 쓰이는 일이 많은지.
킬리안이나 나나 아무래도 어딘가 많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 * *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나는 하늘을 따라 숲도 핏빛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사들의 추적술은 생각보다 뛰어났다. 내가 어떻게 절벽으로 그들을 이끌까 고민한 보람도 없이 알아서 샬럿과 레녹스가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는 걸 유추해 냈으니까 말이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여, 여기서 떨어지셨다고……?”
그들은 까마득한 절벽 밑을 내려다보며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밑에 호수가 있다지만, 그곳으로 깔끔하게 떨어지기 전에 뾰족하게 솟은 절벽 돌부리에 이리저리 부딪쳐서 뼈가 산산 조각났을 확률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와, 실제로 보니까 아득하네.’
만약 내가 킬리안 덕분에 하늘 걷기 체험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절벽 밑으로 고개를 내밀자, 킬리안이 허리를 끌어안고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화들짝 놀라 이리저리 갈피 못 잡는 눈동자로 그를 돌아보았다. 킬리안은 내가 위험해 보여 반사적으로 끌어당겼을 뿐인 건지 순순히 나를 놓아주었다.
“영애…… 그거 아십니까?”
그때, 카젠 기사단의 기사 중 한 명이 갑자기 아련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날 부르더니, 붉게 노을 진 하늘을 응시하며 느릿하게 운을 뗐다.
“이 절벽은 말입니다, 저희 대륙에서 가장 높은 절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 제일일지도 몰라요.”
“아…….”
그런 세부 설정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레녹스를 그만큼 대단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라면 순식간에 납득이 되는군.
“발자국이 남은 흔적으로 보아 두 분 다 절벽 밑으로 떨어지신 것 같은데, 샬럿 영애를 보호하면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레녹스 경이 아무리 초인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레녹스 경이 샬럿 영애를 필사적으로 보호했다면야 한 분 정도는 사셨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기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분명 둘 다 죽었거나 살아남았다고 해도 안젤로 영애만 살아남았을 것이다. 가능성은 그 두 가지뿐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그 불가능의 확률을 깨고 둘 다 살아남는 기적을, 우리의 레녹스가 해냅니다.
“하…… 레녹스 경은 내 우상이었는데, 아직 사인은커녕 실물도 한 번 못 뵀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가시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제국에 이길 자가 없다는 그 레녹스 경이 절벽에서 떨어져 비명횡사하게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
“과연, 그 레녹스 경이라도 위대한 대자연은 이기지 못했군…….”
아니, 그대들의 레녹스 경은 위대한 대자연도 이겨 먹어. 애초에 이 절벽도 그를 돋보이게 하려고 생겨난 거라니까.
나는 벌써 레녹스의 장례식이라도 치른 것처럼 비탄에 잠긴 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절벽 밑으로 가 보자. 한 명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다면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지.”
그러자 샬럿과 레녹스의 운명을 헛다리 짚었던 기사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라……. 저희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보다시피 절벽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지 않습니까.”
나는 말없이 절벽의 좌우를 살폈다.
그 기사의 말대로였다. 과장 좀 보태서 이건 차라리 지평선인가 싶을 정도로 절벽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 거리를 빙 돌아가려면 하루는 족히 걸리겠지.
‘아, 그래서 샬럿과 레녹스가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낸 거구나.’
나는 그냥 서로를 보듬고 지켜 주며 동굴에서 같이 밤을 지새우는 썸남썸녀의 두근두근 로맨스를 생각하면서 생각 없이 썼는데! 물론, 전체 이용가였기 때문에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긴, 그렇지 않으면 기사들이 굳이 하루걸러 찾으러 왔을 리가 없지. 그럼 하룻밤 야영하면서 저 밑까지 내려가야 하나? 기사들과 함께 가려면 그 수밖에 없기는 하지?
어쩔 수 없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절벽 밑을 내려다보던 킬리안이 내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절벽 밑에 마물들이 몰려와 있어.”
“헉!”
나는 깜짝 놀라 입 밖으로 크게 소리를 낼 뻔하다가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뒤에서 작전 회의를 하는 기사들의 눈치를 흘낏 살핀 뒤에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슨 마물인데요?”
로튼 트리까지는 괜찮을 거다. 아무리 레녹스의 상태가 안 좋다고 해도 가장 약한 마물을 처리하지 못해서야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울고 가겠지.
“림비 토드스툴.”
하지만 킬리안은 상당히 절망적인 대답을 들려주었다.
“며, 몇 마리요?”
“정확한 수는 파악이 안 되지만, 기운으로 봐서는 스무 마리? 아니, 그 이상 되겠군. 끝도 없이 밀려오고 있어.”
오, 망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