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악녀 메이커 75화
림비 토드스툴은 킬리안의 그림으로 설명하자면 동그라미 하나에 작대기가 여덟 개 달린 마물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모를 테니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그 마물은 거미를 닮았는데, 사람보다 몇 배는 몸체가 컸다.
림비 토드스툴의 본체는 거미가 아니라, 거미를 숙주로 삼고 등에 기생하고 있는 버섯 쪽이었다. 마치 동충하초처럼 버섯은 숙주를 죽이고 거미의 몸속에서 점점 몸을 키우며 조종한다.
움직임도 엄청나게 재빠른 데다 죽이기도 힘들고, 심지어 환각을 일으키는 독까지 품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떼로 몰려온다면 나나 킬리안이 아니고서야 그냥 그들 쪽으로 양팔을 벌린 채 죽음을 경건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여기서 떨어진 상태라면 림비 토드스툴을 상대할 순 없을 텐데.”
소설에서는 이 대목에서 레녹스가 상당히 골골거렸다. 그 당시 레녹스가 샬럿에게 간호를 받는 장면을 내가 너무 쓰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 마물에게 습격당하면 곤란했다. 그가 지금 죽어 버리면 지금껏 내 노력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수가 있잖아.
“그럼 내가 마물들을 치워 주는 방법도 있고. 하지만 아쉽지 않나?”
“뭐가요?”
“지금 당장 내려가면, 네가 구원자처럼 등장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 그건!
‘최고의 시나리오 아니야?’
물론, 이대로 절벽을 쭉 돌아서 내려간 뒤 다음 날 기사들과 함께해도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공을 기사들과 나눠 가져야만 했다.
심지어 별 감동도 없을 것이었다. 그냥 동굴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그들을 찾아내는 것에 불과할 테니까. 아마 레녹스는 어쩌다가 찾아 준 나보다 그를 간호해 준 샬럿에게 더 감동할 것이다.
나는 샬럿과 레녹스에게 빼도 박도 못하게 내게 목숨을 빚지게 한 뒤, 앞으로 날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아무리 황태자가 날 죽이려고 해도 샬럿과 레녹스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준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나는 킬리안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요즘 그는 참 대하기 어려운 상대였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조언을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킬리안이 나를 빤히 보다가 말없이 절벽 밑을 가리켰다.
“뛰어내려.”
“……예?”
아니, 그 무슨 하드코어 한.
번지 점프대에서 점프할 배짱도 없는 내게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을지도 모르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라고? 물론 지금 당장 이 밑을 내려가려면 그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리가 없지만!
킬리안의 품에 안겨 하늘을 걷는 것과 절벽에서 그대로 수직 낙하하는 것은 아주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나는 창백하게 질려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냐, 이건 아닌 것 같아.
“네가 내려가 있는 동안 기사들의 눈을 가려 놓고 있으마. 뒷수습은 확실하게 해 둘 테니 걱정할 건 없어.”
그래, 킬리안과 같이 가도 공을 나눠 가져 감동이 반으로 줄어들 수도 있으니, 일단은 나 혼자 내려가는 편이 좋겠지.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요?”
나는 번지 점프보다는 오히려 낙하산 없는 스카이다이빙 쪽에 더 가까워 보이는 절벽 밑을 아연하게 응시했다.
설마, 저 밑에 뿌옇게 떠 있는 건 구름입니까? 지금 주변이 뿌연 것도 안개가 아니라 구름 속이라 그런 거야?
갑자기 레녹스와 샬럿이 밑도 끝도 없이 존경스러워지려고 하고 있었다. 아무리 마물에게 둘러싸여 퇴로가 없었다지만, 대체 어떻게 여기서 뛰어내릴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왜, 무서워?”
“……그걸 말이라고 해요?”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도리어 겁을 상실한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대로 말을 막 뱉었다.
그러자 킬리안이 저런, 하고 내가 안쓰럽다는 듯한 얼굴을 하면서 속살거렸다.
“아주 잠깐이라면 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줄 수 있어.”
“…….”
“손.”
그는 내게 에스코트를 하듯 손을 내밀었다. 노을에 물들어 거의 붉은색에 가까워 보이는 그의 눈동자가 둥근 호선을 그렸다.
“…….”
하,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대체 지난날의 내 고민과 고뇌는 다 뭐였던 걸까. 이렇게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 바로 닥쳐올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순순히 내밀기나 할걸.
나는 잠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다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리자, 킬리안이 내 손을 그대로 쭉 잡아당겨 나를 품속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순간적으로 기사들을 돌아보았는데, 그들은 여전히 우리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샬럿의 구출 회의를 계속하고 있었다.
‘뭐야, 눈동자가 풀려 있잖아?’
저건 킬리안의 능력에 걸려들었단 뜻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와 대화를 나누기 전에 능력을 걸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는 처음부터 내가 이 선택을 하게 될 줄 알고 미리…….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갑자기 땅이 훅 하고 꺼졌다. 아니, 킬리안이 날 품속에 꼭 끌어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버렸다.
* * *
“으…… 으으…….”
아득한 정신 너머로 계속 누군가의 끙끙 앓는 신음이 들려왔다.
누구지? 샬럿은 자꾸만 가물가물 흐려지는 정신 너머로 생각했다. 누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거지?
그런데 그게 사실 본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린 건, 그보다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녀가 퉁퉁 부어 지끈거리는 눈꺼풀을 깜빡이자 시야가 까맣게 점멸했다가 숲이 보였다가 했다.
……숲?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알아챈 샬럿은 자꾸만 수면 밑으로 잠기려 하는 정신을 깨우고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물에 빠진 생쥐처럼 온몸이 축축했다.
그녀는 손을 움직여 바닥을 더듬었다. 그러자 푸른 풀잎과 흙, 그리고 바닥을 기어 다니던 벌레가 한가득 손에 쥐어졌다.
꺅! 하고 짧게 비명을 지른 그녀는 손가락을 타고 기어올라 오는 벌레를 털어 냈다.
뭐, 뭐야?
“내가 왜 흙바닥에…….”
반사적으로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마자 샬럿은 신음을 뱉으며 다시 몸을 웅크렸다.
서서히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몸 또한 조금씩 감각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한동안 밀려오는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댔다.
그 순간, 정신을 잃기 전까지 그녀가 겪어 왔던 모든 기억이 잔상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샬럿이 그녀의 고향인 안젤로 영지로 돌아가는 도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참 발크 산맥을 건너던 도중이었다. 이 산맥만 넘으면 절반 이상은 온 것이기 때문에 샬럿은 지루한 여정 속에서도 굉장히 들떠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샬럿은 이 여정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마치 여행을 나온 듯하여 요즘같이 심란할 때 가벼운 기분 전환도 되어 주었다.
지나는 마을마다 틈틈이 들러 관광도 하고 먹거리도 먹어 보고, 황궁에서 머무는 동안 하지 못했던 것도 맘대로 다 해 봤다.
“아가씨, 꽤 반반한데 저런 놈들이랑 다니지 말고 우리랑 함께할래?”
“그래, 맞아. 우리가 아주 좋은 데를 알고 있거든? 아주 잘해 줄게.”
“이, 이러지 마세요.”
“쿡쿡, 앙탈도 귀엽기는.”
물론 여느 때처럼 불량배에게 시비가 걸리긴 했지만, ‘저런 놈들’이 바로 황실 기사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둔한 자들은 금세 처리당했다. 제국 최고의 실력자인 레녹스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대체 왜 그런진 몰라도 항상 샬럿이 가는 곳마다 적어도 한 무리의 불량배, 혹은 정말 위험해 보이는 범죄자들이 다가와 수작을 부렸다.
하지만 그녀는 내심 그것을 즐겼다.
당연히 진심으로 상대할 생각도 들지 않는 이들이 흑심을 가지고 추근대는 걸 즐겼다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어쩌다 위험에 휘말릴 때마다 레녹스가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며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즐겼다.
레녹스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샬럿에게 이것저것 금이야 옥이야 챙겨 주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그동안 느꼈던 불안을 모두 다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샬럿은 몇몇 사건들 때문에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신감이 다시 조금씩 차올랐다.
그 일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갑자기 누가 다급한 목소리로, ‘영애! 절대 마차 밖에 나오지 마십시오!’ 하고 외치더니, 바깥 상황이 매우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쇠붙이가 날카롭게 휘둘러지는 소리와 기사들의 고함이 위급한 상황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마차가 뒤집혔다.
무방비하게 앉아 있던 샬럿은 그대로 마차 내부 곳곳에 부딪혀 멍들고 이마가 찢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마에 흐르는 피를 옷소매로 훔쳐 냈다.
겨우 마차에서 빠져나왔을 때, 이미 바깥 상황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땅에서 진흙 같은 것을 뚝뚝 흘리는 흉측한 괴물이 기어 나와 기사들을 공격하고 있었으니까.
저게 뭐야…….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 외의 존재를 본 샬럿은 그대로 사고가 완전히 정지하고 말았다. 그동안 온갖 사건에는 다 휘말렸던 그녀지만, 적으로 마주친 게 사람도 아니라 괴물이라는 건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베르너가 최근 발크 산맥에 마물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겁에 질린 그녀는 슬슬 뒷걸음질을 치다가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샬럿!”
샬럿은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레녹스의 음성을 언뜻 들었으나 그저 정신없이 뛰어갔다. 처음 보는 기괴한 것들은 그녀를 완전히 공황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도 남았다.
아무리 힘껏 내달려도 본인의 걸음으로 마물을 따돌릴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차라리 기사들 곁에 붙어서 몸을 사리며 보호받는 게 더 안전하다는 것도 알아차리는 건 늦었다. 샬럿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마물들에게 쫓겨 절벽까지 내몰린 뒤였다.
앞은 마물, 뒤는 절벽.
웬만한 사고도 이제는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녀조차 주춤하던 그때, 마물들의 뒤편으로 레녹스가 절박한 얼굴을 한 채 달려오는 게 보였다.
절망에 물들어 가던 샬럿은 ‘역시 그럼 그렇지’ 하는 희망으로 피어났고 곧, ‘나에게만 이토록 관대한 세상이 진짜 위험에 처하게 둘 리가 없지’ 하는 확신으로 뒤바뀌었다.
그래서 샬럿은 땅 밑에 숨어 있던 마물이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을 덮치려고 했을 때도, 그대로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질 위기에 처했어도, 아무런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레녹스가 망설임 없이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호하듯 꼭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