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악녀 메이커 76화
그 뒤로는 아마도 절벽에서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그대로 암전이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샬럿은 다급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레녹스 경!”
그리고 그녀는 처참한 꼴의 레녹스를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기절한 것을 제외하곤 비교적 양호한 상태인 샬럿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겨, 경…… 일어나 보세요…….”
설마 죽은 건 아닐 거다. 그 레녹스가 죽었을 리 없지.
일단 그는 흉부를 들썩이며 숨을 쉬고는 있었으나, 샬럿은 덜컥 겁이 일어 그의 몸을 짚고 앞뒤로 흔들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릴 기미를 보이지 않자, 더욱 강하게 흔들어 보았다.
“이, 일어나세요. 레녹스 경, 제발 좀 깨어나 보세요. 네……?”
아무리 호수 위로 떨어졌어도 그들이 떨어진 절벽의 높이를 생각해 보면 그의 뼈가 성할 리 없었다. 그리고 레녹스는 호수에 빠졌을 때 기절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그 만신창이의 몸을 이끌고 샬럿을 호수 밖으로 끌어낸 뒤에야 정신을 놓았다.
샬럿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물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낯선 오지에 홀로 남겨졌다는 두려움에 이성이 가려진 상태였다.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흑, 흐윽…….”
샬럿은 어깨를 떨면서 흐느껴 울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아무리 목숨을 건진 뒤라고 해도 금방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할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은가.
레녹스는 기절했고, 그녀는 숲 한가운데서 조난을 당했다. 어떻게든 버티더라도 밤이 깊어지면 분명 마물들이 몰려들 테고, 그러면 둘 다 죽게 될 거다.
샬럿은 한 명이라도 누군가가 곁에서 보필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마물을 무찌르는 건 물론이고, 이런 숲속에서 음식을 구해 먹을 줄도, 불을 피우는 방법도 모르며, 가족들을 상대로 간호해 본 적은 몇 번 있지만 이렇게까지 상태가 심각한 중환자를 간호해 본 적은 없었다.
사실 평범한 귀족 집안에서 자란 영애라면 할 줄 모르는 게 어느 정도 당연했다.
하지만 샬럿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아주 심했다. 화목한 가정의 고명딸로 태어나 아기 때부터 온갖 애정을 한계까지 받은 그녀는, 그들의 과보호로 인해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샬럿은 맞서 싸우기보단 도망치고, 도전하기보단 회피하고, 벗어나기보단 안주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서러움에 눈물을 떨구는 것뿐이었다.
“으으…….”
그런데 그때였다.
샬럿이 절망감에 사로잡혀 울고 있을 때, 레녹스가 옅은 신음을 흘리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샬럿은 뒤늦게 그것을 보고서 화들짝 놀라 다급하게 물었다.
“훌쩍, 레녹스 경! 정신이 들어요?”
“……샬럿.”
눈을 반쯤 겨우 뜬 레녹스가 잔뜩 갈라진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의 힘없는 목소리를 들은 샬럿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꾸했다.
“네, 네. 경, 저 여기 있어요.”
“무사한…… 건가?”
아무리 흐린 정신으로 보아도 상태가 훨씬 심각한 게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지금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샬럿은 입술을 달싹였다.
“네, 덕분에 멀쩡해요.”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군.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 그렇게 울지 마라.”
레녹스는 그녀의 눈가에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 주면서 말했다. 아마도 샬럿이 그가 걱정되어 운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가 정신을 찾지 못할 정도로 다쳐서 운 것은 맞지만, 샬럿이 걱정한 것은 자기 자신의 안위였을 뿐이니까.
‘아…….’
그 사실을 스스로 자각한 샬럿은 충격을 받고 굳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경악으로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렸다.
‘맙소사, 내가 본인의 목숨을 걸고 내 목숨을 구해 준 레녹스 경을 앞두고 그가 죽어 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고? 내가 위험에 처할까 봐?’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착각이 아니었다. 갑자기 극한의 상황에 몰리니 그간 사람들의 절대적인 사랑 속에 감춰져 있었던 그녀의 본심이 튀어나온 것이다.
‘……아냐. 천사는 이런 생각 안 해.’
모든 사람이 그녀를 세상에 둘도 없는 천사라고 했다. 성녀의 환생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천사는 여기서 생명의 은인인 레녹스 경을 걱정해야지. 그가 깨어난 것에 감격해야지.
“레녹스 경, 저는 혹시 경이 영영 깨어나지 못하실까 봐 너무…….”
일단 샬럿은 아주 노골적이고 추악했던 자신의 감정을 감췄다. 그리고 최대한 눈물을 쥐어짜 글썽거리며 자신의 얼굴에 닿았던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레녹스가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 다친 덴 없나? 나름 보호하려 하긴 했지만, 작은 타박상 정도는 생겼을지도 모른다.”
타박상?
샬럿은 일단 어디 하나 부러진 곳 없이 성하다는 것에 안심해서,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오른쪽 다리가 표정 관리도 힘들 정도로 쑤시기 시작했다. 샬럿은 괜찮단 말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반사적으로 치마 끝을 살짝 들어 올려 자신의 다리를 살폈다.
“아…….”
생각보다 상처가 꽤 깊었다.
살갗이 벗겨지고 살짝 패여서 피가 흐르는 정도였다. 물론 레녹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 수준이었지만, 샬럿으로서는 이런 깊은 상처는 생전 처음이었다.
그러자 레녹스 또한 그녀의 상처를 봤는지 시선을 피하며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하군, 어쩌면 흉터가 생길 수도 있어.”
대체로 귀족 영애들은 몸에 작은 흔적 하나 없이 새하얀 게 미덕이었다. 흉터를 흠으로 보기 때문에 상처를 입으면 재빨리 마법이나 포션, 성수 등을 사용해 치료를 받았다.
흉터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에 내심 움찔했던 샬럿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지금 제 몸의 흉터가 문제인가요? 경은 몸도 제대로 못 가누시면서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시는 거예요.”
샬럿은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닦아 내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하게 말했다.
“움직이실 수 있으시겠어요? 힘드시다면 여기 계세요. 지금 제가 가서…….”
그녀는 ‘제가 가서 사람을 불러올게요!’ 혹은 ‘제가 가서 몸을 피할 곳을 찾아볼게요!’ 같은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간 샬럿이 불량배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은 적어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 본인에게 절대 해를 끼치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마물은 다르잖아. 이런 상황이라면 겁이 나는 게 당연해. 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걸. 오히려 레녹스 경을 혼자 두면 더 위험해질 수도 있고…….’
샬럿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은 변명들을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레녹스가 잇새를 악물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그가 아직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내심 기뻤다.
“큭……!”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레녹스가 몸을 웅크리며 신음을 흘렸다. 손으로 짚은 부근으로 보아 갈비뼈 쪽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내상도 의심이 가는 상황이었다.
“무, 무리하지 마세요.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이러다 정말 큰일이라도 나면…….”
하지만 그가 움직이지 못하면 더 큰일이 일어날 거다. 샬럿은 레녹스를 말리면서도 말리지 못하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죽기 싫다는 생존 욕구와 천사로 남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계속 엇갈렸다.
“괜…… 찮다.”
“……거짓말.”
“내부의 출혈은 기(氣)로 막으면 된다. 뼈도 살짝 금이 간 정도인 것 같고.”
“살짝인데 그렇게 괴로워해요?”
“……괴로워한 적 없어.”
사실 그는 며칠은 더 기절해 있어야 마땅한 상태였다. 하지만 샬럿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의지만을 가지고 깨어난 것처럼 보였다.
“움직일 만하니 내 걱정은 그만하고 주변을 탐색하는 게 좋겠군.”
기(氣)로 출혈을 막는다는 게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그게 치료가 되진 않을 것이다. 임시방편일 뿐이고 상태는 전과 다름없는 거겠지. 호전되기는커녕 더 나빠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날 위해서 움직인다는 거지? 그래, 당연히 그래야 살 것 아니야. 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까 그가 억지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다 같이 죽을 뿐이잖아. 이런 건 이기적인 게 아니야. 당연한 거지.’
잠시 말문이 막혔던 샬럿은, 순식간에 화색이 도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그에게서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목이 멨던 것처럼 몇 번 헛기침을 한 끝에 고개를 들었다. 레녹스는 그런 그녀를 죄책감 가득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산맥은 카젠 영지 내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이곳만 벗어나면 카젠 영주에게 몸을 의탁할 수 있을 거다.”
“오늘 안에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건 힘들 듯하군.”
믿고 의지할 사람이 드디어 움직인다는 것에 초조함은 잊고 예전과 같은 여유가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것 같았다.
샬럿은 레녹스가 몸을 검으로 지탱하고 겨우 일으키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밤이 어두워지기 전에 몸을 피할 곳을 찾아볼게요.”
“하지만 다리의 상처도 있고 위험할 텐데…….”
레녹스가 걱정하는 듯했지만, 샬럿은 상대를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웃음을 머금었다.
동시에 생각했다. 날 지키기 위해 절벽에서도 뛰어내렸는데 어차피 마물이 나타나면 레녹스가 몸이 부서진다고 해도 지켜 줄 거잖아요. 저는 경을 믿어요.
“이 앞에만 둘러보고 올게요.”
그리고 그 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샬럿은 근처에서 동굴을 발견했다. 호수에서 몇 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얕은 동굴이었지만 하룻밤만 보내는 정도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운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하며 레녹스와 함께 동굴 안으로 향했다. 다행히 짐승이 살았던 흔적은 없었다.
막상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흘러가니까 숲속에서 조난당한 일이 생각보다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상처 좀 봐.”
어쩐지 말이 없더니, 레녹스를 한참을 혼자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인지 그가 살짝 주저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아무리 크게 다쳤어도 여인의 다리를 함부로 보는 건 굉장히 파렴치한 짓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샬럿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다리를 선뜻 내밀었다. 종아리 부근에 그대로 내버려 뒀다간 흉이 질 정도의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