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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77화 (7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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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메이커 77화

피는 거의 멎은 상태였지만, 레녹스는 자신의 젖은 옷자락을 찢어 최대한 물기를 짜내고 샬럿의 상처를 지혈했다. 상처를 보여 달라기에 그에게 뭔가 특별한 수가 있을 줄 알았던 샬럿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상황에 필요한 건 마법사인데, 차라리 곁에 있는 게 셉티무스였다면 좋았을걸. 전하께서도 옅은 상처를 치료하는 정도의 간단한 마법 정도는 사용하실 수 있으신데 하필이면 레녹스 경이어서…….’

하지만 샬럿은 레녹스가 어디선가 장작을 모아 와 모닥불을 피우는 것을 보고 다시 생각을 정정했다. 황태자로 나고 자란 베르너였다면 저런 걸 능숙하게 할 줄 몰랐겠지.

샬럿은 레녹스가 해 주는 대로 그의 곁에서 가만히 손 놓고 구경했다. 부싯돌을 탁탁 부딪치는 것만으로 신기하게도 금세 불씨가 일어났다.

그녀는 흠뻑 젖은 옷 때문에 오들오들 떨고 있다가 재빨리 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은 옷이 젖어도 추운 것보다는 축축하다는 불쾌함만 가득했지만, 곧 밤이 오면 한기가 온몸에 스며들 것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옷을 말려 둘 필요가 있었다.

‘갈아입을 옷이 있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속옷이라도 갈아입고 싶네.’

마차가 뒤집혔던 곳까지 갈 수 있으면 여분의 옷이 있겠지만, 여기서 그걸 구해 올 수 있었다면 애초에 동굴에서 하루를 지낼 필요가 없었다.

샬럿이 자신의 젖은 옷의 끝자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레녹스의 제복과 후드를 흘낏 쳐다보았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남자들은 추위에 떠는 그녀에게 기꺼이 옷을 벗어 덮어 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옷도 만만찮게 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기에 옷이 젖은 찝찝함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 보였다.

샬럿은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레녹스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전보다 붉은기가 돌았다. 그러고 보니 숨소리도 점점 거칠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레녹스 경, 혹시 열이 있어요?”

그녀가 손을 뻗자, 레녹스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 그녀의 손길이 싫은 게 아니라 몸이 약해진 것을 들키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했지만, 평소에는 검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그의 캐러멜색 눈동자가 지금은 멍하게 풀려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괜찮다.”

“전혀 안 괜찮아 보여요. 열나시는 것 맞죠?”

“괜찮다고 했잖아.”

“동물들은 어디가 아프면 필사적으로 몸을 숨긴다는데, 순간 경을 보니까 그 말이 생각났네요. 혹시 괜찮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세요?”

왜 아픈 걸 숨기느냐고 샬럿이 짐짓 화가 난 듯 단호하게 말하자, 레녹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예가 잘못됐군. 그건 몸이 약해진 사이 천적에게 당할 수도 있으니까 숨기는 거다.”

“그럼 레녹스 경은 왜 아픈 걸 숨기는 건데요?”

“널 지켜야 하니까.”

망설임 없이 뱉어진 그의 한마디에 샬럿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들어 온 말이었지만, 지금처럼 극한의 상황에서는 상당히 애틋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잠시 얼굴을 붉히며 두근두근 뛰는 심장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세상을 적으로 돌린다 해도 지켜 낼 테니.”

여기서 갑자기 왜 세상이 나오는지는 모르겠고 그녀는 자신이 세상을 적으로 돌릴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감동적인 말이었다.

샬럿은 그 순간 갑자기 상황에 맞지 않은 충동에 휩싸였다.

레녹스만큼은 확실히 사로잡아 셉티무스처럼 허무하게 놓치지 않겠다는 그런 강한 욕구였다. 이 남자는 분명 한 번 마음을 품은 상대를 영원히 놓지 못할 것이다. 그럴 성정이었다.

레녹스는 헌신적이었다.

샬럿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몸 던져 희생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누군가는 단지 기사의 도리를 다하려고 한 것뿐이지 않으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샬럿은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기에 그렇게 필사적으로 지켜 내려고 한 거라고 확신했다.

샬럿은 자신만 보면 지켜드리겠다는 말을 했던 수많은 사내들을 떠올렸다.

그들 중에는 기사인 레녹스는 물론, 베르너와 트란디아 공작, 그리고 한때 그녀의 주위를 얼쩡거렸던 셉티무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간 샬럿에게 접근했던 사내들은 모두 성격도 성향도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샬럿을 크고 작은 위기에서 구해 준 적이 있었다.

샬럿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의 관심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냥 모두가 날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하니까, 난 사랑받아야 마땅한 사람이고, 그게 세상의 진리처럼 당연한 거라 그런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자각하고 나니 이제는 알았다. 연약하고, 가녀리고, 순수하고, 천진난만하고 이 모든 게…….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 낸 거야.’

샬럿은 싸움을 회피할 때 자주 사용했던 방법을 떠올렸다.

그녀는 본인이 진짜 잘못한 일이든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썼든 간에, 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사과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러면 상대가 누구든 맞서 싸우지 않아도 이길 수 있었다.

‘눈물은 내 무기고.’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마음씨가 천사같이 곱고 아량이 넓은 영애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다고 했다.

‘사실 사랑받았기 때문에 내가 사랑받는 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뿐이었던 거야. 난 천사도 뭣도 아니야.’

사람들의 절대적인 관심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보니 확실히 알았다.

천사가 아닌 천사처럼 보이는 법을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모두가 그녀를 싸고도는지.

샬럿은 자각 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악역으로 몰아 치운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나쁜 사람이니까 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고 합리화를 했다.

‘사실 그건…… 고의였어.’

그녀는 강한 깨달음을 얻으며 그녀의 기사를 자처하는 레녹스를 올려다보았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남자.

나쁘지는 않았다. 샬럿은 오히려 그가 남은 생 동안 계속 자신의 곁을 지켜 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과 결혼하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몰라.’

사랑을 받는 것에는 익숙해도, 사랑을 주는 것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샬럿이 고개를 가만히 기울였다. 만약 이게 사랑이라면, 그동안 받았던 수많은 구애를 전부 뿌리치고 레녹스와 이어지게 되는 걸까?

‘그건 아까운데.’

특히, 황태자 베르너.

샬럿은 베르너에게 남자로서의 매력은 그다지 느끼지 못했고, 또 처음만큼 온전히 자신에게 애정을 퍼붓지 않는 그의 태도에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베르너의 매력은 바로 언젠가 이 제국 땅의 주인이 될 남자라는 것이었다.

샬럿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라 알려진 셉티무스를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상태였고, 또 최근 들어 실망한 기색을 보내오기는 하지만, 힐끔힐끔 자신에게 시선을 떼지는 못하는 트란디아 공작도 있었다. 벌써 한 사람에게 정착하기에 그녀는 주위에서 너무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리고 애초에 결혼은 못할걸.’

샬럿은 그렇게 생각하며 레녹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현재 베르너에게 거의 청혼에 가까운 고백을 받은 적이 있었고, 그 대답은 아직 미뤄 둔 상태였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샬럿이 레녹스와 이어졌다고 해 보자.

레녹스는 분명 주종 관계인 황태자와의 신의를 저버렸다는 죄책감으로 황실 기사단 기사단장직을 내려놓을 게 뻔했다. 아니면 아예 기사 작위를 내려놓을 수도 있고 말이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신의를 목숨같이 지키는 레녹스의 청렴결백함은 마치 동화 속의 기사님을 보는 것 같아 대부분의 경우 멋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서는 절대 아니었다.

기사가 아닌 레녹스라면 제국에서 가장 강해 봤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샬럿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위치는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과 같았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을수록 가치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난 영원히 레녹스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겠다.’

사랑이라는 건, 받을 때는 참 가까우면서도 줄 땐 멀게 느껴지는 그런 아리송한 감정이었다.

샬럿은 타인의 사랑을 권리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만, 가끔은 아무런 이득도 없는 희생과 헌신을 왜 자처해서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보답 받을 거라는 확신도 없으면서 얻는 게 뭐가 있다고.

‘그래도 아쉽네. 같이 있고 싶으니까 나중에 감정이 깊어지면 내 기사가 되어 달라고 해 볼까? 평생 곁에서 지켜 달라고 하자.’

샬럿은 그의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천진난만하게 생각하며 여기서 레녹스의 호감을 따 놓기로 했다.

“레녹스 경, 제가…….”

경을 간호해 드릴게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혼탁하게 흐려져 있던 레녹스의 눈빛이 갑자기 서슬 퍼렇게 빛나더니, 그가 검을 뽑아 들고 모닥불을 짓밟아 껐다.

하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아직 먼 거리인 듯했으나 저쪽에서 이미 샬럿과 레녹스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내 뒤로 숨어.”

그 말에 샬럿은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허둥거리며 레녹스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만약 지금 그들이 수도 내에 있었고, 적이 인간이었으면 ‘하지만……’ 하고 한두 번쯤은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말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으니까.

샬럿은 두려움이 한가득 묻어나오는 음성으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물이겠죠?”

“그래.”

“이길 수 있겠어요?”

“이길 수밖에.”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아니고 대답이 어딘지 모호했다. 왠지 스스로 각오를 다지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만큼 이길 확률이 희박한 마물이라는 걸까? 샬럿은 그 말을 듣고 레녹스의 옷자락을 꾹 움켜쥐면서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다시금 아주 쉽게 불안감에 젖어들고 말았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진흙 마물의 흉측한 몰골을 떠올린 탓이었다.

레녹스는 지금 겉모습만 멀쩡하지, 실상은 이대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다. 샬럿은 그의 등에 몸을 바짝 붙이고 나서야 그가 열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펄펄 끓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라면 제 생명을 깎아서라도 샬럿의 수명을 늘려 줘야만 했다.

약속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준다고.

그렇다면 지켜 주겠지. 그녀는 불안했지만 그래도 믿었다. 그 ‘레녹스’였으니까.

레녹스는 눈을 감고 상대를 가늠했다. 기척은 무겁고 또 많았고, 연속적이었으며, 규칙적이지 못했다.

마물. 적어도 여섯 개 이상의 다리를 가진 상대이며, 몸집은 꽤 있으나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수였다. 무리를 이루며 움직이고 있는 듯했고 열 마리, 아니, 스무 마리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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