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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78화 (78/131)

# 78

악녀 메이커 78화

그 말은 마물이 레녹스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샬럿을 이곳에서 도망치게 할 수도 없다는 거였다.

한 마리도 보내지 말고 전부 여기서 처리해야만 했다. 레녹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물이 제 모습을 드러낼 때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마물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공기가 조금씩 탁해지면서 무언가 이질적인 냄새와 뒤섞이기 시작했다. 아주 살짝만 맡았을 뿐인데 벌써 손이 저릿해졌다.

아, 이런……!

“샬럿! 코와 입을 막아!”

림비 토드스툴.

레녹스가 그 마물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때,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군.’

레녹스는 기본적으로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전투에 임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의 경험상 이렇게까지 눈앞이 암담했던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의 몸 상태가 이 정도까지 나빠진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소드 마스터가 된 시절부터 이미 신체와 힘, 모두 일반인을 훨씬 웃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을 위기에 처할 일도, 병에 걸려 약해질 일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나타난 게 림비 토드스툴이라니. 마물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지독한 놈들이었다.

만약 오늘 이 자리에서 죽게 된다면 레녹스는 모든 기(氣)를 개방해서 마물들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전부 소멸시키지 않으면 안 됐다.

샬럿을 지키지 못하면 그가 목숨을 바친 이유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니까. 자신의 몸 상태로 보나, 마물의 특성을 보나, 길게 끌면 끌수록 불리해질 것이다.

림비 토드스툴은 일정한 간격으로 공기 중에 독가스를 뿌리는데 중추신경계에 중독을 일으켜 환각,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웬만한 독에는 내성이 있는 레녹스였지만 지금 몸 상태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독가스의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위치 또한 좋지 못했다. 하필이면 동굴에서 림비 토드스툴과 마주치다니. 그는 그렇다 치더라도 샬럿은 독가스에 그대로 노출될 게 뻔했다.

‘하지만 퇴로는 없고…….’

빨리 끝내는 수밖에 없겠군.

레녹스는 거미의 모습을 한 버섯, 즉, 버섯의 조종을 당하는 거미 림비 토드스툴을 올려다보며 제 몸 안의 기를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곳곳에 금이 가고 부러졌던 뼈와 상처 입은 장기들을 감싸던 기들이 움직이면서 그가 들고 있는 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쿨럭!”

기로 간신히 눌러두었던 내상이 드러나자, 갑자기 울컥하고 입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레녹스는 대충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 낸 뒤에 자세를 잡았다.

“샬럿, 최대한 숨을 들이쉬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어.”

그는 견고하게 두른 눈부시게 하얀 검기를 강화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샬럿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의 등 뒤에서 빠르게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대로 몸을 날렸다.

소드 마스터가 검기를 구현한다면, 그랜드 소드 마스터는 곧 검강이었다. 검기가 그저 날카롭고 예리할 뿐이라면, 검강은 동시에 빽빽한 밀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했다.

순식간에 쇄도하는 검날은, 몰려온 림비 토드스툴 알아차리기 전에 맨 앞에 있던 마물을 그야말로 반 토막을 내 버렸다.

그리고 잔상조차 보이지 않는 빠르기로 그 옆에 있는 마물을 쳐 버리고, 죽어 검은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전에 밟고 도약하여 뛰어오른 뒤, 바로 그 다음 림비 토드스툴에게 넘어갔다.

순식간에 수 마리의 림비 토드스툴이 죽어 마력으로 되돌아가자, 남은 림비 토드스툴들이 주춤하면서 레녹스와 거리를 벌렸다.

마물들은 상대를 봐 가면서 덤비는 습성이 있었다. 그들이 느끼기에 레녹스의 기운은 강하기는 하나, 힘이 폭발하고 요동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약해져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로 파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레녹스가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볼 생각이겠지.

상급 마물로 갈수록 지능은 점점 더 높아진다. 그리고 림비 토드스툴은 상급 마물에 속했다.

레녹스는 작게 쯧, 하고 혀를 차며 빨리 거리를 좁혔으나, 마물들은 다리를 들어 그를 찍어 내리려고만 하면서 이리저리 피했다.

물론, 아무리 피하려고 해 봤자 한 번 그의 손에 걸려든 이상 죽게 되었지만, 수가 너무 많아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스무 마리? 아니, 마흔 마리는 족히 되는 것 같다.

어디서 계속 동료를 불러오는 모양인지 처음보다 끝도 없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레녹스를 끝장내 놓고 싶은 마물들의 의지가 느껴지는 듯했다.

일단 샬럿이 있는 뒤쪽에는 발도 들이지 못하도록 접근하는 족족 베어 내고 있긴 하지만, 점점 정신력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약해진 몸으로 독가스를 무방비하게 오래 흡입한 영향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큭, 젠장.’

시간이 지날수록 레녹스의 시야 끝이 검게 물들었다가 갑자기 다리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가 했다.

검에 둘렀던 눈부시게 빛나던 새하얀 검강 또한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하더니, 푸른빛의 아지랑이처럼 흩어져 일렁거렸다.

검강이 검기로 되돌아왔다는 뜻이었고, 비교하자면 다이아몬드 정도의 강도가 갑자기 황금 정도로 물러졌다는 거였다.

처음엔 단박에 림비 토드스툴의 몸체를 반 토막 냈던 검날이, 이제는 다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단지 처음의 공격이 검강이라 마물이 버텨 내지 못했을 뿐, 본래 림비 토드스툴의 껍데기 강도는 엄청났다.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겠군.’

어쩔 수 없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샬럿과 레녹스, 둘 다 죽어 버리는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모여 있는 림비 토드스툴들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마지막 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목숨을 거는 정도가 아닌, 그냥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마지막 수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약해진 상태에서는 목숨과 맞바꿔야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기술.

레녹스는 작게 흉부를 들썩였다.

이제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고통에 둔해졌기 때문인지, 독가스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으나 이런 상황에선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통증 따위에 기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단번에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레녹스는 검 손잡이를 더 강하게 쥐고 마물들을 향해 겨눴다. 그리고 낮게 깔린 음성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심연에 흔들리는 연옥의 업화여! 혼탁한 어둠의 불길, 왜곡하는…….”

“아아아악……!”

아직 레녹스가 두 문장을 채 뱉기도 전에 뒤에서 갑자기 발광하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는 설마 샬럿의 안위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하고 림비 토드스툴에게 둘러싸인 상황도 잊은 채 황급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까까지 바닥에 웅크려 덜덜 떨고 있던 샬럿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샬럿!”

하지만 레녹스가 그녀를 다급하게 부르는 사이, 다시 림비 토드스툴이 매섭게 달려들어 다리를 들어 찍어 내렸다. 방심한 틈을 노린 탓에 분명 몸을 틀어 피했음에도 팔뚝에 화끈한 감각이 퍼졌다. 살점이 뜯긴 듯했다.

‘벌써 독에 중독됐나…….’

그는 솜털이 빼곡하게 난 거미의 다리를 검으로 쳐 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 와중에 샬럿의 상태를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다행히 다친 곳 없이 그냥 환각만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물이 한 마리도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았으니 다쳤을 리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또한 서서히 곧 한계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동굴과 마물밖에 없었던, 없어야 할 주변 풍경이 마치 불꽃이 터지듯 알록달록 물들어 가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그 뒤로는 온통 만화경이었다. 화려한 색감으로 번진 세계가 그대로 빙빙 돌았다.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에, 그나 그녀나 중독 증세가 빨랐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오랜 기간 노출되면 완전히 미쳐 버릴지 몰라도, 아직 이 정도라면 몇 분 뒤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빨리 림비 토드스툴을 처리하고 동굴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심연―”

“아아아악! 아악!”

부득이하게 중간에 뚝 끊겼던 주문을 영창하기 위해 레녹스가 다시 입을 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단어밖에 뱉지 못했는데, 갑자기 샬럿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무슨 환각을 보고 있는 건지, 그녀는 살짝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던 다리를 움켜쥐고 마치 다리가 잘려 나가기라도 한 듯 괴로워하고 있었다.

“흐윽, 다리. 내 다리가…….”

샬럿의 천진한 얼굴에 구슬 같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릴 때마다 레녹스의 심장이 철렁했다. 어서 그녀를 고통 속에서 구해 주고 싶었다.

“흐으, 으……. 분명 지켜 준다고, 지켜 준다고 했잖아…….”

그래, 내 영혼을 송두리째 활활 태워서라도 그대를 지키겠다. 레녹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심연’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낼 때였다.

“……레녹스으!!”

만약 비명만 지르던 샬럿이 악에 받쳐 소리치지만 않았어도, 레녹스는 망설임 없이 시전자의 생명을 갉아먹는 주문을 뱉고 그녀를 지킨 채 그대로 죽어 갔을 것이다.

“대체 뭘 꾸물대고 있는 거야! 여기까지 마물이 왔잖아요! 제 다리를 뜯어먹으려고 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환각으로 인해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샬럿은 속에 담아 두고만 있던 생각 일부를 여과 없이 뱉어 버리고 말았다.

레녹스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옅은 하늘색 눈동자는 눈물 대신 독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죽어서라도 날 살려 내야지!”

정말 그러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는 샬럿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쯤은 던져 버려도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오히려 그녀의 입을 통해 직접 그 말을 듣자, 움직임이 완전히 멎고 말았다. 순식간에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지금 내가 독에 취해 환청까지 듣기 시작한 건가?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이 세상 악의 따위는 하나도 모르는 듯 천사처럼 착하고 순수한 그녀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샬럿……?”

“제국 최고의 기사라면서 이런 것들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해?! 날 온전히 지켜 내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도 없잖아! 여기서 내 몸 털끝 하나라도 더 다치면 가만 안 둘 거야!”

만약 이 환청이 레녹스를 무력하게 만들기 위한 마물의 계략이라면 그의 약점을 아주 정확하게 짚었다고 칭찬해 줄 수도 있었다.

그는 찰나에 모든 전의를 상실했고, 머리가 순간 멍하니 굳어져 검의 기가 흩어질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으니까.

“샬…….”

레녹스의 빈틈을 발견한 수십 마리의 림비 토드스툴이 이때만을 노린 듯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허탈한 목소리로 샬럿만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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