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악녀 메이커 79화
그 순간, 그는 살갗을 난도질하다 못해 칼로 저미는 듯한 강렬한 살기를 느끼고 한 박자 늦게 등 뒤를 돌아봤다. 코앞까지 다가온 여덟 개의 눈알과 쩍 벌린 턱은, 금방이라도 그를 통째로 삼키려는 듯했다.
레녹스는 반사적으로 검 끝을 밑으로 향하게 고쳐 쥐고 림비 토드스툴의 턱을 내려찍기 위해 빠르게 직선으로 뻗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상황은 늦어도 한참 늦어 있었다. 사실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해도 검기가 제대로 구현되지도 못한 채라 아무런 타격조차 주지 못했을 것이다.
최악이었다.
모든 게 끝났다. 심지어 평정을 잃고 환각에 동요해서 샬럿을 지켜 내지도 못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레녹스는 생전 처음으로 느껴 보는 짙은 절망감과 좌절감에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였다.
거침없이 몸을 날린 어떤 작은 형체가 마물의 등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 언뜻 시야 끝에 스쳤다. 처음에는 그조차 환각인 줄 알았는데, 검을 치켜든 형체가 림비 토드스툴의 본체인 버섯을 단박에 꿰뚫었다.
키에에엑―!
마물이 다리를 바르작거리며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다리 끝부터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가루가 되어 순식간에 팍삭,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마물의 등 위에 올라서 있던 형체가 높게 올려 묶은 머리를 붉은 리본처럼 찰랑거리며 그 옆에 있던 림비 토드스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죄책감, 패배감, 수치심, 굴욕, 혼란, 의심,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뒤섞여 있던 그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명료하게 깨어났다. 마치 새까만 먹구름이 걷힌 듯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두 발 달린 인간이다. 마물의 편에 선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 무조건 그의 편일 수밖에 없었다. 즉, 지원군이 등장했다는 뜻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혜성처럼 등장한 지원군은, 림비 토드스툴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림비 토드스툴은 레녹스 같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아닌 이상, 즉, 검에 검강이라도 두르지 않는 한 절대 베어 낼 수 없을 정도의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대신 그들을 숙주로 사용하고 있는 본체인 버섯은 살코기보다 더 연하기 때문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등 위로 도약해서 버섯이 자라난 부위를 정확하게 꿰뚫으면 맥없이 죽는다. 그래서 가까이 접근하려고 하면 숙주를 이용해 다리로 찍어 내려고 하거나 독가스를 뿌리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
‘어떻게 림비 토드스툴의 등 위에 올라서고도 멀쩡하지?’
살아 있는 림비 토드스툴의 등 위에 올라타는 순간, 귀신같이 알아채고 독을 뿌렸을 것이다.
아마 정통으로 독을 맞았다면 곧장 눈앞에 환각이 피어나며 이성을 차리기가 힘들 텐데. 그래서 몸이 한계까지 약해진 레녹스 또한 될 수 있으면 그 방법을 피해서 공격했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이것저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상대는 까다로운 마물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든 뒤 민첩하고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노련한 실력자. 지금 그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는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레녹스는 마치 각성제를 맞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번쩍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붉은 머리의 지원군이 향한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온몸의 감각을 깨워 내 정신없이 마물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대체 이렇게까지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둘러 본 게 얼마 만이더라. 레녹스는 머리를 비운 채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붓듯 마물들을 처리했다.
극한까지 몰린 몸 상태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으나, 동시에 등골이 저릿할 정도로 짜릿했다. 정상의 자리에 오른 뒤부터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아주 그리운 감각이었다.
하아, 하아.
레녹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고르는 동안, 잠시 마물들과 거리를 벌렸다. 잠시 주위를 경계하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어느 순간 등에 따듯한 감촉이 맞닿았다. 어느새 함께 싸우게 되어 버린 은인이었다.
그는 내심 모르는 사람에게 목숨을 빚졌다는 사실에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가 등을 맡겼던가.’
상황이 그렇게 만들긴 했지만,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등을 믿고 맡기다니, 영 생소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등 뒤에 맞닿은 사람의 호흡과 심장 소리는 굉장히 고르고 안정적이었기에, 오히려 레녹스 본인이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등의 높이와 면적으로 가늠해 봤을 때 그보다 훨씬 체구가 작고 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음? 잠깐.
‘여자……?’
레녹스는 현재 내상을 입은 여파로 온몸에 열이 펄펄 끓고 독을 무방비한 상태로 흡입한 영향으로 환각과 현실을 넘나들고 있었다. 한마디로 완전히 맛이 가 버린 상태라는 것이다.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니.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시간조차 없이 다시 달려드는 림비 토드스툴들을 해치우러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공기를 가르는 검의 소리와 마물들의 단말마만 연속적으로 울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숨소리가 거칠어지긴 했지만 독 때문에 비틀거리는 일이 없었고, 그 외에 비명 혹은 신음을 내는 일은 일절 없었다.
레녹스는 환각과 환상과 착각에 덧씌워져 냉철함에서 한참은 벗어난 머리로 생각했다.
지원군은 굉장히 강했다.
깔끔하고 정교하고 신속하다.
게다가 마물에게 상처를 입으면 작은 소리라도 내게 되기 마련인데, 숨소리만 들린다는 건 지금껏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는 거다.
그인지, 그녀인지.
‘아무래도 상관없나.’
기사가 된 도리로서 레이디는 보호해야 한다는 신념이 찰나 머리를 어지럽혔으나, 저렇게 잘 싸우고 있는데 지켜 줄 필요가 뭐가 있나 싶었다. 그리고 명예고 뭐고 다 떠나서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지금 보호를 받고 있는 건 명백하게 레녹스였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나중에 빚을 갚을지언정 지금 상황에선 절대적으로 상대방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게 된 자신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제국 최고, 최연소라는 명예를 얻고 정상에 선 이후 그는 항상 홀로 치열해야만 했다. 기사들뿐만 아니라 백성 모두가 그를 자랑으로 여기고 우러러보며 떠받들었으니까.
날이 지날수록 그의 소문은 점점 부풀려졌다. 때로 그들은 레녹스를 기적마저 일으키는 전지전능한 구원자처럼 보기도 했다.
아무리 지금껏 단 한 번도 패배한 역사가 없다고 할지언정 때로는 너무 벅찼다. 우아하게 헤엄치며 수면 밑에서 다리를 허우적대는 백조라도 된 기분이었다.
레녹스는 수천만 명의 우상이었다.
여명의 기사. 세상이 가장 어두울 때 아침을 밝히는 희망의 빛.
그는 절대적인 승리의 상징이자,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 주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언제나 빛나고 멋있는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폭풍이 불어도 홀로 꼿꼿하게 서 있어야 했다.
확신이 서지 않았을 때도 약한 소리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레녹스는 그의 유일한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던 스승님이 세상을 떴을 때, 막연히 생각했다.
평생을 이토록 치열하고 처절하게 살아가다가 언젠가 때가 오면 홀로 고독하게 죽어 가겠지. 그 누구도 최고의 기사의 나약한 이면 같은 건 알지도, 알아주려고 하지 않은 채로.
하지만 그건 그의 숙명이었다.
그러니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날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레녹스가 타인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 건 그의 스승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러나 최고의 기사는, 자신이 타인에게 목숨을 빚져서 자존심이 상하기 이전에, 그보다 호기심이 앞서 일어났다.
누구라도 검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그가 레녹스임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미 저잣거리에서 파다하게 퍼진 게 레녹스의 초상화였다.
그런데도 스스럼없이 도우러 오다니. 심지어 꼴사납게 흐트러진 그를 보며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않는다.
‘누구일까.’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다리가 꺾여 눈앞이 휘청거렸다.
그는 가까스로 중심을 버티고 서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열 때문에 타오를 듯 뜨겁게 달아오른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았다. 검으로 땅을 짚고 겨우 지탱하고 서서 떨리는 숨을 내뱉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머릿속은 완전히 뒤엉켜 있었다.
어린 꼬마 시절의 환각부터 시작해서 처음 죽을 뻔했던 경험, 처음으로 스승님을 뛰어넘었을 때의 희열, 그리고 베르너를 주군으로 모셨을 때의 벅찬 감동, 스승님의 죽음, 샬럿에게 질척한 감정을 느꼈을 때의 자책이 뒤죽박죽 눈앞에 뛰어다녔다. 두서없고 엉망이었다.
―날 온전히 지켜 내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도 없잖아!
그리고 악을 쓰듯 외쳤던 샬럿의 환각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그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 댔을 때였다.
“힘들면 한숨 푹 자 둬요.”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의 손이 그의 눈꺼풀 위를 덮어 주었다.
검을 쓰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따듯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어떤 기사보다 한참은 작고 여려도 더 단단하고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손길이기도 했다.
“눈 뜨면 다 끝나 있을 거예요.”
여인의 음성이었다. 그럼에도 레녹스는 그 말을 들은 동시에 완전히 몸을 무너트렸다.
이성은 속삭였다.
‘모두가 지켜 주길 바라는 네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는데?’
하지만 이성을 놓고 안온한 음성에 안주하고 싶어질 정도로 그녀는 너무도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마치 그의 스승님이 여인으로 환생해 살아 돌아온 것만 같았다.
믿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오늘은 절벽에서 몸을 날린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전부 하나같이 익숙하지 않은 일들뿐이다.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굴욕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레녹스도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몸이 약해져 마음도 약해졌을 뿐, 다시 눈을 뜨게 되면 수치심은 이루 말할 데가 없으리라고.
게다가 마음에 품은 상대를 마지막까지 지켜 내지도 못했다. 목숨을 다 바치리라 각오했지만, 그녀보다 먼저 정신을 잃은 기사의 수치였다.
그런데 까무룩 암전되었던 정신이 어느 순간 다시 맑아졌을 때, 레녹스가 먼저 떠올린 것은 샬럿의 안위가 아닌 지원군의 정체였다.
“일어났어요? 좀 더 자도 돼요.”
그는 며칠은 내리 잔 듯한 개운한 상태로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얼핏 무신경하게 들리는 음성이 떨어졌다. 쓰러지기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진 몸과 정신에 당황할 새도 없었다.
‘더 자라고?’
레녹스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동굴 입구를 뚫고 들어온 눈이 시리도록 찬연한 새벽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